박석무 칼럼

[박석무 칼럼] 난세의 명재상 오리대감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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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나고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라는 옛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책임총리로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조선시대의 영의정이야말로 국난을 극복하는 위대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역사적으로 위대한 재상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가장 칭찬했던 대표적인 위기 극복의 명재상은 바로 '오리정승', '오리대감'이라 호칭되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었다. 요즘 정권교체기를 맞아 온갖 어려움에 처해 있는 나라의 형편을 지켜보면서, 40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명재상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위기를 극복할 명재상이 오늘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리정승은 왕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선산이 있는 오늘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일대를 고향으로 여기고 자주 찾아 은거하기도 했지만, 생의 마지막을 또 그곳에서 마쳐 묘소도 그곳에 있고 기념시설 또한 그곳에 있어 경기도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경기도야말로 조선시대 인물의 보고인 지역이었다. 학자 정치인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살았던 곳이요, 조선 후기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나왔지만, 정치가 한 사람을 꼽자면 당연히 이원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수선한 민심 수습 정치적 역량
겸손함·자신 낮추는 위대한 능력


이원익은 1564년 18세에 생원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원로 재상 동고 이준경의 사랑을 받는 청년이었고, 1569년 23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자 명재상 서애 유성룡의 신임을 얻어 벼슬살이가 승승장구로 열리기만 했다. 황해도 도사(都事) 벼슬에 부임하자 그곳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율곡 이이의 눈에 들어 다시 중앙관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촉망받는 미래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큰 정치가들인 이준경·유성룡·이이 등은 각자가 진영이 조금은 달라 서로 화합하지는 못하던 때인데, 이원익은 그들 모두에게 진영의 논리와는 관계없이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던 관료였으니, 그의 화합과 통합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저절로 보여진다.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체찰사의 임무를 맡아 왜적 퇴치에 앞장서서 일을 수행하였다. 1595년 49세부터 우의정 정승에 올라 4도체찰사로 왜적 퇴치의 공신이 되었다. 1599년 53세 때 좌의정·영의정에 올라 전후의 나라 질서회복과 민심수습에 큰 역할로 재상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했다. 이로부터 40년의 재상 생활에서 5번이나 영의정에 올라 혼자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대업을 수행해냈으니 위대한 재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40년의 정승 생활, 인조반정으로 당파가 다른 서인 정권이 들어섰으나 남인이던 이원익을 모셔다 영의정을 맡기고 반정 초기의 어수선한 민심 수습을 감당하게 했다면 그의 정치적 역량과 반대파 포용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이원익을 찬양했다.

나라의 안위가 공에게 달려 있었고 社稷以公爲安危 / 백성들의 잘 삶과 못 삶도 공에게 달려 있었네 生靈以公爲肥 / 왜구들의 진퇴도 공에게 달려 있었고 寇賊以公爲進退 / 나라의 윤리와 기강도 공에게 의존했었네 倫綱以公爲頹整 / 대체로 그렇게 하기 40년 蓋如玆四十年 / 장하다 나라의 중심을 혼자 쥐고 있었다 偉勻衡之獨秉 - 고 영의정 오리 이공화상 찬(故領議政梧里李公화像贊)

만인이 숭앙하는 훌륭한 정치가
오늘날 정치인들 공정·청렴 실천
난국 해결할 수 있다는것 알아야


다산 정약용의 저서가 500권이 넘는데 한 개인에 대한 칭찬을 이렇게 위대하게 표현했던 예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70년 벼슬살이에 재상으로 40년 동안 그런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가의 이유까지를 다산은 밝혀냈다. '짐이 국가다'가 아니라 '영의정 이원익이 국가였다'라는 찬사를 바친 이유를 보자. 40년 재상 벼슬을 했으나 아주 조그마한 체구에 섬약한 얼굴 모습, 꾀죄죄한 주근깨만 가득한 안면, 독(독)에 숨겨놓은 옥처럼 보이지 않게 내공을 몸속에 가득 채운 인물이었기에 어떤 반대파도 그에게는 승복하는 거대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진단했다. 또 하나 평생 벼슬살이에 이원익은 공정과 청렴만을 끝까지 지키며 살았다. 그가 퇴관하고 광명의 소하리 오두막으로 은퇴하자 사는 집도 누추했지만 먹을 양식도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잘난 체 하지 않는 겸손함과 자기 비하의 위대한 능력, 공정과 청렴의 공직자 본분을 제대로 지켰기에 그는 만인이 숭앙하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다. 오늘 같은 난세에 정치인들은 자기를 낮추고 공정과 청렴을 실천할 때에만 이런 난국의 정치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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