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칼럼

[박석무 칼럼] 대동법의 명재상 잠곡 김육

입력 2023-04-10 20:01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4-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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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조선 후기는 나라도 가난했지만 백성들은 참으로 배가 고팠다. 가난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배고픈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는 일이 정치의 최대 책무였건만 주자학에 매몰되어 이(理)다 기(氣)다만 따지며 싸우던 유학자들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는 매우 등한시했다. 나라의 형편이 그러하던 시절, 1580년 16세기 후반에 태어나 17세기 중반인 1658년에 79세로 타계한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탁월한 경세가로서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하여 그 일을 성공시킨 위인이었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에 시행되었던 가장 합리적인 세법(稅法)이었다. 이 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말을 납부하게 하는 세법으로 그간 공물 진상, 관수(官需), 쇄마(刷馬) 등 각종 명목으로 잡다하게 걷어들여 균등치 못한 조세를 형평하게 만든 제도였다. 이 제도는 김육이 착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광해군 원년인 1608년 이원익·한백겸 등의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시행을 시작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타지역으로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광해군 시절 벼슬하지 않고 경기도 가평에 은거하면서 10년 동안 농사를 짓던 김육이 인조반정 이후 나라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왔고, 1624년 4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을 시작하면서 대동법 확대 시행을 간곡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44세에 인조반정으로 벼슬길 올라
탁월한 경세가로 백성 구제하자고
'대동법 전국 시행' 성공시킨 위인


김육은 어떤 사람인가. 1580년 한양에서 청풍김씨의 대표적 인물인 기묘명현 동천 김식(金湜)의 현손(玄孫: 고손자)으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가 타계하자 참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율곡 이이·우계 성혼의 학문 전통을 이어받아 김상용·김상헌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과거시험에 열중했다. 13세에 임진왜란을 겪고 1604년 25세로 소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했으나 그때는 광해군 시절이어서 벼슬할 뜻을 버리고 1613년 34세 때에 경기도 가평군 잠곡 청덕동 화개산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10년을 살았다. 농민이나 백성들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목격하고 경험했던 시절이었다. 1623년 44세의 김육은 인조반정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45세인 1624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1636년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이후 세 차례 더 중국을 다녀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많은 식견을 얻는다. 1638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충청도에 대동법 시행을 극구 주장하고, 1649년 대사헌에서 우의정에 올라 마침내 충청도에 대동법 시행을 실천하게 되었다. 1652년 좌의정에 오르고 1655년 영의정에 오른다. 1658년 79세로 운명하기 직전 호남에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여 마침내 그 실행이 이룩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유학은 명분론과 관념론에 빠져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양란 이후의 무너진 국가제도와 파탄난 국가재정을 위해서는 실학적 논리가 아니고는 다른 길이 없을 때였다. 김육은 바로 그런 때에 온갖 제도를 혁신하자면서 역법으로 시헌력 시행을 주장하고 상평통보의 주조로 화폐유통을 주장하여 실행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경세가에 개혁가임이 이런 데서 드러난다. 전통유학에서 실학사상으로 옮겨가는 중간 지점에서, 실학사상을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으로 열어주는 연계 역할을 해준 분이 바로 김육으로 실학의 선구자였다.

옳은 정책 양보않고 실행 '실천가'
요즘 여야 싸움에 '김육이 그립다'


문장에 뛰어나고 유학에 밝았지만, 경세가의 높은 위치에 오른 애국자가 바로 김육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국가정책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많은 반대파들의 저지를 뚫고 끝내는 실행해내는 실천가의 한 사람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난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경세가가 바로 잠곡 김육이었다. 요즘 나라의 경제는 참으로 어렵고 일반 국민의 삶은 말이 아니다.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고 여야는 싸우기만 한다. 이런 때에 김육 같은 재상은 없단 말인가. 경기도 사람이던 김육이 그립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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