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칼럼

[박석무 칼럼] 최익현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 먹지 않겠다'

입력 2023-05-22 19:55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5-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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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1873년은 고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로 고종의 나이 22세, 아버지 대원군의 섭정을 받지 않아도 임금 노릇이 가능한 때였다. 그때 비록 낮은 벼슬에 있던 41세의 당당한 직신(直臣) 면암 최익현(1833~1906)은 어느 누구 입도 뻥긋 못하고 대원군 위세에 눌려 숨죽이고 살아가던 시절, 대원군의 모든 독단과 국정 농단에 대한 실정을 나열하며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렸다.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큰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고종과 민비는 그런 때를 학수고대하며 자신들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던 때, 최익현에게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 임명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으로 특진시켰다.

그런 강력한 탄핵 상소에 대원군은 마침내 권력을 놓고 양주로 퇴거해버린다. 그러나 대원군의 세력들은 온갖 음모를 꾸며, 최익현이 임금의 아버지와 아들을 이간시킨 인륜의 죄를 지었다고 감옥에 가두고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3년만에 최익현은 풀려서 귀향했다. 역사는 이때부터 망국의 징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1886년 병자년,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일본의 통상을 허용해주는 수교가 이룩된다. 친일파들의 꾐에 빠진 민비의 실책으로 망국에 입문하는 조치였음을 가장 명확히 파악한 최익현은 곧바로 광화문 앞에 도끼를 붙들고 상소를 올려 조약파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무도한 민비 세력은 최익현을 흑산도로 귀양보내 4년이나 고통을 당하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고 충신·열사들은 비통함을 참지 못해 자결로 순국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죽기야 쉽지만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망한 나라를 찾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다고 의병대장이 되어 민중 직접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일본은 오직 조선을 삼킬 생각만으로 모든 조약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파기만 하면서 침략의 마수만 뻗치고 있었다.

병자수호조약·을사늑약 '망국징조'
국권 회복 위해 직접 투쟁의 길로


74세의 노충신 최익현은 '기신배의(棄信背義)' 16죄를 열거하여 일본의 악행에 강력히 항의하며 의병을 모아 전투에 앞장섰다. 나라를 삼키기 위해 모든 약속을 어기고 모든 의리를 배신한 일본의 죄악상에 통렬한 꾸짖음을 담은 최익현의 주장은 오늘 읽어도 통쾌하고, 일본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할 죄악을 저질렀다. 마치 오늘날 일본은 조선을 강제침략하여 35년에 이르는 온갖 만행으로 우리 국민들이 당한 아픔과 고통은 잘못이 아니라 여기면서, 강제 노력동원이나 위안부들의 고통도 잘못이 아니며, 독도도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꼬락서니는 그때 일본의 침략자 첨병들이 하던 짓과 어떤 차이도 없다. 수구파의 대명사요 척사위정의 보수적 인물이라던 최익현은 일본의 잘못에 목숨을 내걸고 항의하고 따지고 전쟁으로라도 그들을 무찌르자고 했는데, 120년이 지난 개명한 오늘의 정권은 일본의 악행에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면죄부를 주면서 그들의 편만 들고 있단 말인가.

최익현은 의병전쟁에서 패하고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일체의 일본 요구에 응하지 않고 당당한 조선의 벼슬아치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마침내 일본에서 주는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먹지 않겠다고 단식으로 항거하다 노병으로 끝내 순국하여 거룩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목숨을 바치며 일본에 항거한 최익현 정신은 어디로 가고, 일본을 존중하면서 일본 뜻대로 모든 외교가 진행되니 그때처럼 나라는 망하는 것 아닌가. 두렵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정말로 나라가 이래도 되는 건가.

조선 강제침략했던 일본의 만행
위안부 고통 잘못 아니라며 여전
면죄부 주는 現정권 두렵고 위험


최익현은 호가 면암이다. 면암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당시 양근(지금의 양평)에 살던 대학자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등과 척사위정의 사상을 승화시켜 조선 최후의 학자이자 의병장, 나라와 백성을 사랑해서 목숨을 바친 천하의 의인이 면암선생이다. 비록 호남의 태인·순창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포천 사람이고 최치원의 후손이었다. 총칼로 위협하는 왜군에 맞서 당당히 싸우던 그런 면암 같은 충신은 오늘에는 없단 말인가. 그의 관(棺)이 부산에 당도하자 모두가 철시하고 통곡하던 그때의 민족혼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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