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인터뷰…공감] '후진양성 기여' 상공대상 수상한 김일동 대륙상운 회장

"수출입 비중 99.7%가 해상물류… 예선 멈추면 한국 멈춘다"
입력 2023-07-04 20:25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7-05 5면

공감인터뷰 (주)대륙상운 김일동 회장
김일동 (주)대륙상운 회장은 "어머니로부터 늘 '베풀고 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며 "선친의 아호인 '희양'의 뜻처럼 해양을 밝혀 학생들을 꾸준히 도와 해양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다. 부산 태생이지만 인천에서 45년째 살고 있는 김 회장은 "인천항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인천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며 지역에 대한 애착심도 드러냈다.

김일동 (주)대륙상운 회장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5년째 해양분야로 진출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는 등 후진양성 활동을 해오고 있다. 또 고액 기부자 모임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에도 가입하는 등 매년 사회공헌활동을 펼쳐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천상공회의소가 선정하는 '제41회 상공대상' 사회복리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김 회장은 40년 넘게 예선업 분야에 몸담고 있다. 예선은 1천t 이상의 선박을 지정된 장소까지 끌어당기거나 밀어서 옮기는 배를 의미한다. 대형 선박이 부두에 정박하는 과정에서 항만시설과 부딪히거나 좌초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예선, 선박 끌거나 밀어 옮기는 배… 정박 과정 충돌 예방
1985년 인천 바다 한파 얼음 깨 유조선 끌던 것 가장 기억
어머니 '베풀고 살라' 가르침 해사고 등 장학금 기부 꾸준
협동조합 이사장 역임… 이견 때 직접 현장 소통도 도맡아


그가 처음부터 예선업에서 종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선친인 김수금 대륙상운 명예회장이 한국해양대학교 교수직을 내려놓고 1972년부터 인천항에서 도선사(항구에서 선박의 출입항을 인도하는 사람)의 길을 걸으면서, 김 회장 역시 아버지처럼 해양에서 일하겠다는 뜻을 학창시절부터 품었지만 그의 원래 꿈은 1등 항해사가 돼 배를 직접 운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바다로 나가 일하는 걸 원치 않았던 김 회장의 어머니가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아버지도 젊으셨을 적부터 늘 바다에 나가 계시니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런 일상을 자식 때까지 대물림하고 싶지 않으셨던 어머니의 뜻을 따라 처음에는 육상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공감인터뷰 (주)대륙상운 김일동 회장

서울의 해운회사에서 일하던 김 회장이 본격적으로 예선업에 뛰어든 건 1983년부터다. 그전까지는 각 지역의 항만청에서만 예선을 운항했지만, 수출 규모가 늘고 예선 수요도 확대되면서 민간의 예선 사업을 허가한 시기다. 그가 처음으로 운항했던 예선은 6·25 전쟁 당시 미군이 쓰던 소해정(바다에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는 소형 군함)이었다.

김 회장은 "그 당시 운항했던 소해정은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만들어진 배였는데, 철도 침목과 비슷한 두께의 나무로 만든 배였다"며 "연식이 이미 40년 가까이 된 선박이었지만 아무런 탈 없이 운항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이어 "잘 보존해서 해양박물관에 기증했으면 국내 항만의 역사에 소중한 유산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김 회장은 예선의 역할을 설명하다가 '99.7'이라는 숫자를 언급했다. 한국의 수출입 비중의 99.7%가 해상 물류를 통해 이뤄진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예선이 제 기능을 못 하고 멈추면 국내 물류 전체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예선이 멈추는 건 사람으로 치면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트럭 운송이 파업 등을 이유로 멈췄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했다. 대중들에게는 예선의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 물류 흐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책임감도 클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김 회장은 아찔했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1985년 겨울 인천 앞바다가 강추위로 얼어붙으면서 선박 운항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조선이 인천항에 정박할 수 없어 난방유 공급에도 차질이 빚어지는 가운데, 당시 국내 정유 공급을 총괄하던 대한석유공사에서 연락이 왔다.

김 회장은 "대한석유공사 사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배 좀 붙여 달라'고 하소연했다"며 "얼음이 얼면 배를 돌리는 데 필요한 냉각수를 바닷물로 끌어올려 쓰는 것도 불가능해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권 시기였다. 김 회장은 "궁여지책으로 배 안에 냉각수를 채운 뒤 얼음을 깨면서 유조선을 끌고 들어왔다"며 "위험을 감수하고 한 일이었는데, 그만큼 국내 물류에서 예선이 눈에 띄지 않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늘 '베풀고 살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김수금 명예회장도 김 회장에게 사회공헌과 후진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해양대학교를 비롯한 해양 교육 기관에 꾸준히 발전기금을 기부해왔다.

그러다가 해양분야에서 일하는 학생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위해 지난 2018년 김수금 명예회장의 아호를 딴 희양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지난해까지 햇수로 5년째 인천해사고등학교와 부산해사고등학교, 한국해양대학교와 목포해양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 회장은 "희양의 의미가 '해양을 밝힌다'는 의미인데, 개인적으로 기부하는 것보단 꾸준히 학생들을 돕는 게 해양분야 발전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감인터뷰 (주)대륙상운 김일동 회장

김 회장은 지난 2021년부터 제8대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이사장도 역임하고 있다. 인천은 물론 각 지역 주요 항구의 예선업계와 선사들의 상황을 확인하고, 이견이 벌어지면 직접 현장으로 찾아가 소통하는 일도 도맡아야 한다. 전후좌우로 회전하면서 훨씬 몸집이 큰 대형 선박을 끌고 당기는 예선처럼 바쁘게 움직이며 예선업계의 현안을 풀어내는 일상이 매일 반복되는 셈이다.

그는 "회사를 경영하는 일 외에도 전국의 예선업을 다 챙겨야 하다 보니 항상 정신이 없다"면서도 "예선은 물류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작지만 강한 업종이기에 책임감이 크다"며 웃었다.

김 회장은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하지만 일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인천이 그의 고향이라고 소개했다. 김 회장은 "인천에서 자식들을 다 낳았고, 손녀도 인천에서 태어났다"며 "인천항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곳에서 예선업을 하는 인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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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일동 회장은?

▲부산 출생(1953)
▲목포해양대학 항해학과 졸업(1976)
▲대륙상운 창업(1982)
▲제5대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이사장(2013~2017)
▲한국해양소년단연맹 부총재(2014~)
▲중소기업중앙회 정무위원(2015~)
▲제8대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이사장(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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