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

입력 2024-01-28 20:03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1-29 18면
연극 '아들에게' 조선희 소설
'세여자'의 파란만장한 삶 떠올려
여기에 현미옥을 추가해야할 듯
그 어디서든 배척당한 인생 그려
대사가 지닌 무게 모두를 짓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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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아들에게'(구두리 작, 김수희 연출, 1월13~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극단의 시대를 살았던 한 삶에 관한 보고서다. 그 이름은 현앨리스. 우리 이름으로는 현미옥. 1903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1953년 평양에서 체포될 때까지 어쩌면 평생 신은 구두보다 더 많은 도시를 전전했다. 그가 머문 도시는 자그마치 열 곳이 넘는다. 하와이, 서울, 상하이, 오사카, 거창, 블라디보스토크, 부산, 뉴욕, 로스앤젤레스, 프라하 그리고 평양. 평생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여러 나라와 도시를 오갔다.

역사의 연표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시대 전체에 대한 통찰을 이끄는 표지가 될 수 있다. 극단의 시대라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보다 시대가 더욱 역동적인 행위자로 부상한 때이니 말이다. 현미옥의 요람에서 무덤 사이에는 3·1운동(1919),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해방과 분단(1945), 한국전쟁(1950) 그리고 휴전(1953)이 있다. 조국의 독립을 그토록 꿈꾸었으나 해방된 조국은 급기야 전쟁을 치르고 만다. 하나로도 벅찰 사건이 생애 내내 연이어서 일어난다. 야만과 폭력이 난무한 이 연표에 한 사건을 더해도 좋다면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꼽고 싶다. 1894년을 지나며 일본 군국주의의 급팽창으로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질서는 요동한다. 이후 한반도는 아주 오랫동안 피로 물들게 되는 극단의 시대를 지속하게 된다.

연극은 역사적 사실과 극적 상상을 교직하며 전개한다. 역사적 사실 부분은 현미옥의 연대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현순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나는 이야기에서부터 북한에서 미국 간첩 혐의로 숙청당하는 에피소드까지 50년의 세월이다. 극적 상상 부분은 가공의 인물인 박기자가 현미옥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러니까 인터뷰와 연대기가 서로 맞물리도록 한 형식이다. 여기에 장치 하나를 추가하여 기자를 현미옥의 아들로 설정하였다. 연극의 제목을 아들에게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은 기자가 아니라 의사였다는 점이다. 북한으로도, 미국으로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 아들 정웰링턴은 체코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7세 때(1963년)의 일이다. 정웰링턴과 현미옥은 그렇게 인터뷰의 형식을 빌려 상상으로나마 만나게 된다. 아마도 해원을 했을 것이다.



연극 '아들에게'는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세 여자는 주세죽(1901년생), 허정숙(1902년생) 그리고 고명자(1904년생)를 일컫는다. 이들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성도 드물 것이다. 이제 여기에 현미옥을 더해야 할지 모른다. 이들 넷은 해방과 혁명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이었으나 삶의 경로와 죽음을 맞이한 장소와 시간은 서로 달랐다.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1953), 허정숙은 평양에서(1991), 고명자는 서울에서(1950) 그리고 현미옥은 미확인(남로당 숙청 시기로 추정)이다. 이들이 꿈꾼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극단의 시대가 이들을 짓누르지 않았다면 삶의 경로가 조금은 달랐을까. 연극은 '일본제국의 신민,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 중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 위험한 존재'(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로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모두에게서 배척당한 현미옥을 그리고 있다.

연극 '아들에게'는 하나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극단의 시대 이후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극단의 시대에 속해 있는가. 냉전이 사라진 이후에도 평화체제로 전환하지 못한 채 여전히 판문점 체제에 머물러 있는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인가.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라는 현미옥의 대사가 지닌 무게가 그토록 무겁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군사주의가 팽창하는 현시점에서 이 불안한 정전체제를 살아야 하는 모두를 짓누르는 무게가 아닐 수 없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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