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할머니 가설'과 육아 정책

입력 2024-03-25 20:18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3-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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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1931~2011)의 장편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이하 '그 산')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의 후속편으로 6·25전쟁 동안 작가가 겪었던 체험을 다룬 자전소설이다. 전선이 남북을 오가며 수많은 희생을 만들어 냈던 1951년 겨울부터 1953년까지의 상황을 이십 대 젊은 여성 시선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6·25를 모르는, 또는 특정 이념들이 강요하는 6·25와는 결이 다른 시대의 진실이 생생약동 살아있다.

'그 산'은 총 8장으로 이뤄졌는데, 3장 격인 '미친 백목련'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나'와 일가족은 남한의 시민증과 인민위원회의 신임장과 식권을 모두 챙겨 들고 피란길에 오르다 파주 교하면 인근의 마을에 이르러 '마님'이라 불리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을 만나 신세를 진다. '마님'이라 불리는 이 여성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으로 민간요법을 동원하여 조카 현이의 병을 고쳐준다. '마님'은 전통 마을 어디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경험 많은 지역 공동체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와 같은 인물이다.

풍부한 인생 경험으로 삶의 방향을 인도해 주던 노인 멘토들은 지역 공동체는 물론 가족 내부와 아이들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98년에 나온 진화생물학이론 '할머니 가설'이 좋은 예다. 노년의 여성은 자손을 남길 여력이 있어도 '폐경'을 통해 번식을 포기한다. 자식 생산을 포기하면 노산의 여러 위험을 없애줄 뿐 아니라 손자들을 돌봄으로써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들을 잘 지키고 더 많이 퍼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생 경험과 삶의 지혜가 풍부한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들이 통계적으로 봐도 훌륭하게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조실부모한 톨스토이는 할머니,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여 대문호가 됐다. 철학자 러셀도 어머니가 가정교사와 바람이 나는 통에 조모 손에서 자랐으나 큰 학자가 됐고, 마르케스도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여 대작가가 됐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중심인물 우르슬라의 모델이 바로 그의 외조모다. 사르트르도 외조모 손에서 컸는데, 의성(醫聖) 슈바이처가 당숙이다. 출산율 저하와 육아로 몸살을 앓는 지금, 일본처럼 조부모 육아를 아예 정책으로 만들어 지원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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