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의 역사산책

위훈삭제(僞勳削除)와 정치개혁

   
▲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519년(중종 14) 음력 10월 29일 늦은 밤이었다. 초겨울이 시작되어 한기가 가득하고 이미 궁궐의 모든 전각의 불은 꺼져 있었다. 임금의 처소인 경복궁 강녕전의 앞 마당에서 두명의 관료가 엎드려 국왕에게 탄원하고 있었다. "전하, 잘못된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하여 주시옵소서." 그 탄원자의 한 사람이 조선 최대의 풍운아로 불리는 조광조였다.

율곡 이이의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간단하였다. "채 학문이 이르지 못한 상태로 나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즉 학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진적인 정책을 쓰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와 보수의 정책을 조화롭게 사용했어야 하는데 조광조가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조광조가 그런 정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건국의 주체세력들이 개혁을 이름으로 출발하였지만 지나치게 보수화 되었고,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국가권력의 공명정대함을 위하여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훈삭제였다.



조선에서는 임금의 즉위에 공이 있거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종묘사직을 지키는 데에 큰 공이 있는 신하들을 공신으로 임명하여 관직 승진은 물론 막대한 토지와 재물, 노비를 하사하고 이를 세습하게 하였다. 그런데 중종반정에 의해 임명된 공신 중 실제로는 공이 없으면서 공신으로 서훈을 받아 이익을 챙긴 무리가 많아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림파 세력들은 잘못된 이들을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받은 작위와 재물을 반납케 하자는 내용이었다.

중종반정의 공으로 서훈된 공신을 정국공신(靖國功臣)이라 하는데, 이들은 1등부터 4등까지 모두 총 117명이었다. 이는 개국공신을 비롯한 여러 공신책봉중에서 그 숫자가 가장 많았다.

반정 3대장이라 불리는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위시하여 반정 주도세력들은 반정에 공이 없음에도 자파 세력을 늘리기 위하여 측근이나 지인들에게 공신 자리를 뿌렸다. 사림파가 이런 사정 속에서 위훈삭제를 주장한 것은, 말 그대로 조정에서 소위 훈구파라 불리는 세력들을 몰아내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중종 또한 내심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집단이었던 훈구파의 약화를 원치 않는 것은 아니었겠으나, 훈구파를 적으로 돌렸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으므로 일단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당시 조정 역학상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훈구파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림파가 117명의 공신 중 2등과 3등 일부, 4등 전부 해서 총 76명의 위훈삭제를 상계하였다. 결국 훈구파의 눈치를 보던 중종도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신들이 삭제되었다.

요즘 퇴임하는 대통령이 자신과 측근들에대해 대거 국가 훈장을 수여하였다. 세간에 셀프훈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잘못된 공신들을 바로 잡아 삭제하였음을 21세기 살아가는 우리들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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