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349_307260_3522올해가 4·19혁명 53주년 되는 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부터 촉발된 4·19는 단순히 대학생들의 의거가 아닌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이 뒤이은 5·16쿠데타로 인해 민주주의가 다시 숨죽이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4·19 혁명을 이승만 정권이 자행하였던 부정선거로 인해 나타난 결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4·19혁명이 일어난 것은 부정(不正)이 정의(正義)가 되고, 정의가 부정이 되는 잘못된 세상 때문이었다.

우리는 해방 이후 진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 선생님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인들의 힘으로 나라를 반듯하게 세우자는 의지로 전국 조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 백성들의 꿈은 미군정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미군정은 우리 독립운동가들 대신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해방은 되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친일파들의 나라였다.



독립운동가가 외면받고 친일파가 세력을 잡은 암울한 상황에서 1920년대 의열단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사부장을 하였던 김원봉 선생이 월북을 해버렸다.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던 그가 친일경찰의 대명사였던 노덕술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던 적이 없던 그가 해방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 의해 따귀를 맞고 고문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국민들의 석방 요구에 의해 집으로 돌아와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이 충격으로 그는 김구 선생님과 함께 1948년 남북통일을 협상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남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친일파가 득세한 남쪽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민중들의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대한 요구로 '반민특위'를 구성하였지만 거꾸로 그가 이를 붕괴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파 노덕술을 석방시키기까지 하였다. 당시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석방시키라고 하였으니 친일파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을 한 세력들에 의한 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결국 이들이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이승만 독재정권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어리석지 않은 대한민국의 대학생과 국민들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연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정치깡패들의 폭력과 독재자의 충복들의 총탄에도 물러나지 않고 마침내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거짓과 부정이 정의가 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은 것이다. 역사는 늘 그렇게 이야기한다. 부정이 정의가 되는 것은 일시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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