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422_323452_654숙종의 아들로 훗날 조선의 20대 국왕이 된 경종은 남자구실을 못하는 사람으로 전해졌다. 백성들은 경종이 성불구가 된 것이 어머니 장희빈이 어린 세자의 남근을 뽑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수군댔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 전에 이씨(李氏) 왕족의 혈통을 단절시켜 버리겠다고 아들의 남근(男根)을 뽑았다고 야사(野史)는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희빈은 참으로 무서운 여인이다. 아무리 남편인 숙종이 미워도 자식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야사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를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믿지 않았다. 다만 경종이 늘 허약한 것이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종실록(景宗實錄)을 보면 분명 장희빈의 행위가 사실로 보인다. 경종이 승하하고 난 후 이조판서 이덕수가 쓴 그의 일대기에 "선대왕은 전혀 여인을 알지 못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는 매우 완곡한 표현이지만 경종이 성불구였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장희빈이 어린 아들의 남근을 뽑아 버렸다는 야사의 이야기가 사실인 것이다. 정말 무서운 여인이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어떻게 평민 여인에서 조선의 국모까지 되었을까? 단순히 그녀의 미모에 반한 숙종의 바람기 때문이었을까? 사실 장희빈은 만들어진 여인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역관(譯官)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당숙이 당대 최고의 역관 장현(張炫)이었다. 조선시대 역관은 중국과 사신단 왕래 시에 무역업을 독점하여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개성, 평양, 의주의 상인들이 실상 역관의 손아귀에 있었다. 엄청난 돈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 진정으로 가지고 싶었던 것이 바로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신분은 양반이 아닌 중인이었기에 그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南人) 계열이었기에 더더욱 권력을 갖고 싶어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미인계였다.



어린 시절부터 미모가 있었던 장희빈에게 그들은 글과 노래, 춤과 악기 연주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막강한 정보와 돈으로 궁중에 나인으로 투입시켰다. 국왕을 모시는 지밀 나인들은 보통 4세에 입궁을 하지만 장희빈은 무려 15세가 넘은 나이에 궁중에 들어가 바로 숙종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 13살의 나이에 국왕이 되어 어머니 명성왕후의 간섭에 몸서리치던 숙종은 장희빈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곧 정4품 내명부인 숙원에 봉하였다.

끝없는 욕망을 가지고 여인으로서 최고의 권력까지 올라가고자 한 그녀는 끝내 왕비를 내쫓고 스스로 조선의 국모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과도한 욕망은 거꾸로 숙종을 피곤하게 하였다. 친동생 장희재를 비롯한 친인척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숙종은 장희빈에게서 낳은 원자를 세자 책봉하는 것에 반대한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에게 사약까지 내릴 정도로 장희빈을 사랑했지만 그녀의 욕망까지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녀의 욕망이 그녀 스스로를 파괴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잘못된 욕망은 끝내 화를 부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여인, 장희빈!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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