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김윤철 할아버지 (1)

주인선 공사로 인천과 인연 '흥남철수의 산증인'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함남 북청 출신 김윤철11
김윤철 할아버지가 옛 주인선 과도교 구조물 앞에서 1950년대 말 주인선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경인전철 제물포역 인근에 있는 주인선 과도교는 1997년 철거됐고, 구조물 일부가 남아있다.

인민군 징집 피해 4형제 흥남부두로
1957년 미군 화물수송철도 현장 참여
기술 익혀 40년 넘게 인천 건설업 몸담아

"기름 나르던 기차" 주인선 1994년 폐선
일부구간에 주인공원 조성 '흔적'
학교 신축 일 하며 초교 선생인 아내 만나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관련 주인선 사진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김윤철(85) 할아버지는 40년 넘게 인천지역 건축업계에서 일했다. 전쟁통에 피란 나온 후 1957년 인천항 인근 미군부대와 부평미군부대를 잇는 주인선 철도 공사현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4남1녀 중 넷째인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5일 고향인 북청군 신북청면 양가리 632를 떠나 100㎞ 정도 떨어진 흥남부두를 향해 걸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기고, 인민군 징집을 피하고자 4형제가 모두 집을 나섰다. 고급중학교(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7살 때다.



"국군이 12월에 후퇴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인민군 가기 싫은 동네 남자들이 함께 흥남으로 내려갔어요. 영하 20도쯤 될 법한 추위에다가 1m 넘게 눈이 쌓여서 어머니와 동생은 도저히 같이 갈 수 없었어요. 식구들이 인민군한테 죄지은 것도 아니고, 그때는 다들 3개월이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할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흥남철수작전의 산증인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부터 전세가 불리해지고 퇴로마저 차단당했다. 유엔군은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흥남부두에서 철수작전을 단행했다.

이때 미군은 흥남부두에 몰린 피란민 30만명 가운데 약 9만명을 군 수송함(LST·Landing Ship Tank)에 태웠는데, 김윤철 할아버지도 가까스로 수송함에 오를 수 있었다.

피란민들은 문이 열린 미군 수송함으로 달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넘어진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인파에 밟혀 죽는 끔찍한 광경을 할아버지는 여러 번 목격했다. 선박에 달린 그물망을 타고 배 위로 오르려다 떨어지는 사람, 간신히 올랐어도 갑판을 가득 채운 인파에 밀려 또다시 바다 위로 떨어지는 사람도 봤다.

할아버지는 승선하는 피란민을 통제하던 미군 병사가 휘두른 방망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김동리(1913~1995)가 쓴 단편소설 '흥남철수'(1955)에서 묘사한 당시 상황도 김윤철 할아버지 증언과 다르지 않다.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하여, 일단 혼란은 멎었으나, 그와 동시, 이번에는 또, 그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가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거제도에 도착한 날짜를 12월 19일로 기억했다. 거제도 주민들이 나와서 피란민들에게 밥 한 덩어리씩을 나눠줬다. 그래도 허기가 달래지지 않아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가 챙겨준 1천환으로 고구마 두 개를 사서 먹었다.

1천환은 북청에선 소 한 마리 값일 정도로 거금이었지만, 당장 배고픔에 화폐 가치 같은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는 게 할아버지 얘기다. 고구마 2개 값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쌌다. 한국전쟁 중에는 도매물가가 16배 이상 폭등했다고 한국은행은 설명했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함남 북청 출신 김윤철2
1981년 9월 경인전철 제물포역 인근 주인선 과도교 공사현장 모습. 당시 제물포역 앞 도로를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과도교도 늘어났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왼쪽사진)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때 미군 수송함(LST)를 타기 위해 흥남부두에 몰린 피란민. /(사)흥남철수기념사업회 제공

거제도에서는 한 초등학교 강당에 배치돼 산에서 나무를 하는 등 남의 집 품을 팔면서 1년 6개월을 머물렀다.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형제들을 거제도에서 다시 만났지만, 먹고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할아버지도 부산에 있는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했다. 휴전 뒤에는 서울의 전후 복구작업 현장에서 일했다.

김윤철 할아버지는 그의 나이 25살이던 1957년 가을 주인선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인천에 왔다. 주인선은 수인선 남인천역과 경인선 주안역 사이에 동서로 뻗은 총 3.8㎞ 길이의 미군용 화물수송철도다.

인천항과 인접한 남인천역 미군부대에서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미군부대(애스컴·ASCOM)를 연결했다. 국비와 미국 원조자금(ICA)을 투입해 1957년 9월 착공, 1959년 7월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공사 초기 선로측량 작업을 보조하다가 콘크리트를 배합해 배수관로를 만드는 일도 하고, 흙을 나르는 일도 했다. 소위 '막노동'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다.

"그땐 기술이 없어서 측량사가 하라는 대로 뽈대(측량용 막대)를 잡고 서 있었어요. 주안역부터 히다찌(日立)까지 측량을 했는데, 선로 계획선 안에 들어온 주택에 대해선 미군이 나와서 직접 보상금을 치른 것이 특이했어요. 지금도 왜 그랬는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미제 시멘트는 노깡(관로·どかん)이나 옹벽을 만들고도 엄청 남아서 너도나도 빼돌렸지요."

여기서 '히다찌'는 일제강점기 전기·기계업체인 히타치(日立)제작소 인천공장이 있던 용현SK스카이뷰 아파트 일대를 부르는 옛 지명이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휘발유와 경유 등 유류는 주인선의 주요 수송물자 중 하나였다. 할아버지는 주인선을 가리켜 "기름 나르는 기차였다"며 "미군 파이프(송유관)에서 사람들이 기름을 빼서 쓰는 것을 일일이 감시하기 어려워서 기름 수송철도를 깔아버린 것"이라고 했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함남 북청 출신 김윤철1
주인선 폐선 구간 일부에 조성한 주인공원에서 당시 선로에 놓였던 침목을 가리키고 있는 김윤철 할아버지.
인천 남구가 지난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용현동·학익동)'에 따르면, 인천항 쪽인 주인선 남인천역과 남인천신호소 부근에 미군부대인 캠프유마(Camp YUMA)와 캠프레노(Camp RENO)가 있었다.

이들 미군부대는 용현동 히타치제작소 인천공장 부지에 한국전쟁 때 설치된 미군 유류저장소(POL)를 관리했다. 인근 학익동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성매매 집창촌인 일명 '끽동'이 생겨나기도 했다.

유류저장소 송유관은 철길을 따라 지상에 노출돼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송유관 이음새가 터져서 새는 기름을 받아 쓰거나 고의로 이음새를 망가뜨려 기름을 빼돌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경향신문 1961년 5월 30일자에는 한 일당이 조직적으로 용현동 송유관에서 휘발유 140드럼을 훔쳤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가 실렸다.

"인천 와서 사귄 황해도 출신 친구도 미군 기름 빼먹으면서 돈 많이 벌어 남동구에 식당을 크게 차렸지. 지금은 돌아갔고, 아들이 식당을 물려받아 계속 영업하고 있어요."

퍼주기만 한다고 생각한 당시 주한 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인간 이하'였다. 미군들은 한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를 예사로 저질렀다. 경향신문 1957년 7월 11일자는 송유관에 올라앉아 있던 3살배기 아이가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주인선은 부평미군기지가 축소된 1985년부터는 화물수송철도로 운행하지 않았다. 다만, 1980년대 인천에서 논산 연무대로 가는 입영열차로 하루 두 차례씩 운행하다가 1994년 폐선됐다. 인천시는 제물포역 인근부터 남인천역 간 폐선로 1.4㎞ 구간에 주인공원을 조성해 주인선의 흔적을 남겼다.

용현동 미군 유류저장소는 1968년 대한석유공사가 인수했으며 1980년부터는 지금의 SK그룹인 선경이 소유했고, 최근에 용현·학익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SK건설이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했다. 끽동 자리에는 2000년대 초반 중학교와 2010년 53층짜리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주인선 공사를 마친 김윤철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건축일을 하던 첫째 형 김윤숙 씨와 재회했다. 할아버지와 큰 형을 비롯한 고향 사람 7명이 의기투합해 '청해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인천지역 학교 교사 신축공사를 전문적으로 수주했다고 한다. 도화동 시절 동인천고등학교, 인천기계공고, 부평중학교는 물론 경기도지역 학교 건물까지 지었다.

회사는 1970년대까지 승승장구했다. 매일경제 1970년 6월 2일자에는 큰 형인 김윤숙 청해건설 대표가 대한건설업협회 경기지부 신임 지부장에 선임됐다고 보도했다. 인천이 포함된 경기지역 건설회사를 대표할 정도로 회사의 영향력이 컸다.

5년 전 사별한 아내는 경기도 하남 망월초등학교 공사에서 현장소장을 할 때 만났다. 망월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었다. 1960년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다.

1933년 계유년생인 김윤철 할아버지는 주민등록증에 1926년생으로 기재돼 있다. 무려 7살이나 많게 주민등록을 한 이유는 세 차례나 인터뷰를 가진 뒤에야 어렵사리 들을 수 있었다.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20대 중반 경남도청에서 나이를 끌어올려 주민등록을 고쳤다고 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비록 형제들이 같이 피란 내려왔지만, 각자 흩어져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인 청년의 생계에 대한 막막한 심정을…. 요즘은 돈 있고 백 있는 집 자식들만 군대를 빼잖아요. 늙은이가 인제야 고백한다고 누가 잡아가진 않겠지만, 평생 마음에 걸렸어요. 가진 것 하나 없어 절박했던 시절의 허물을 기자 양반도 이해해 주구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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