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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100人·55]前인천 상공회의소 회장 최정환

   


   >55<  前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최정환 

   최근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이하·남동산단)의 공장용지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어 아우성이다. 사업 확장을 위해 남동공단내에서 공장을 넓히고 싶은 사업주는 치솟는 땅값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안산 시화·반월 공단으로 이전하거나 아예 충청도 등 지방으로 짐을 싸서 떠나는 현상이 빚어질 정도다. 월세를 얻어 공장을 돌리는 사업주도 땅주인이 언제 임대료를 올려달란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남동산단 주변 부동산 관계자들은 현재 남동산단내 공장용지가는 작년 평당 300만원에서 현재는 450만~500만원으로 급상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인천의 중요한 공업생산 기지인 남동산단이 제기능을 잃고 외면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이 남동산단의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최정환 전 인천상공회의소 회장(1917~1987)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남동공단이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최 선생이 지하에서 알게 되면 통탄할 일이다.



   현재 남동산단이 위치한 남동구 고잔동은 폐염전 자리였다. 인천의 재래산업이었던 천일염은 1960년대 후반부터 가공염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결국 설자리를 잃었고 귀한 소금을 일구어냈던 소금밭은 폐염전으로 전락해 벌판으로 방치되고 만다.

   2005년말 현재 4천146개의 각종 공장이 입주해 연간 9조4천385억원의 생산액을 올리는 수도권 최대 산업단지로 탈바꿈하기까지는 최정환 선생의 각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게 지인들의 얘기다.

   그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남동산단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모습을 당시 비서실에 근무했던 신현수(58) 인천문화원 사무처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최 회장은 1976년부터 폐염전 자리에 공단을 유치해 달라고 4년여동안 청와대·국무총리실·국회·상공부 등을 쫓아다니면서 무려 18차례나 건의를 하고 다녔어요. 하지만 번번이 수도권정비계획법에 걸려 무산됐지요. 결국 그는 방송을 동원했어요. 1979년 12월 몹시 추웠던 날로 기억하는데 60대 노인네가 당시 MBC 방송기자를 불러 칼바람 쌩쌩 부는 그 추운 허허벌판에서 마이크를 잡고 남동공단 조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 뉴스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됐지요. 최 선생의 그때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인천에는 남동산단보다 먼저 조성된 주안(73년)과 부평(74년)산업단지가 가동되고 있었다. 정부는 1976년도에 주안·부평산단에 입주하지 못하고 난립한 `용도부적격 업체', 소규모 영세공장들에게 퇴출 명령을 내리고 충남 아산 등 지방으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용도부적격 업체'는 746개에 달했다고 한다. 인천지역 영세업체들은 지방으로 내려가면 결국 공장 문을 닫고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 선생의 노력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드디어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신현수 사무처장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신군부도 수도권정비기본계획법의 골격은 그대로 남겨두려고 했어요. 하지만 최 선생이 하도 자신있게 `된다'고 말하니까, 결국 신군부에서도 수도권정비기본계획법을 일부 개정했는데, 그것이 `단, 남동공단은 제외'였습니다. 이 여덟 글자를 법 조문에 끼워 넣으면서 남동공단이 탄생한 겁니다. 최 선생은 수년간 그렇게 뛰어다녔습니다.”

   남동산단 조성계획은 오랜 기간 우여곡절을 거쳐 1980년 7월 2일 국보위 상임위원회에서 확정됐다. 이후 1985년 4월 20일 1단계 공사 착공에 들어갔고 4년여만인 89년 12월 29일 1단지가 준공된다. 당시 공장용지 분양가는 17만4천원이었다고 한다.

   
▲인천상공회의소 최정환 전 회장이 1979년 1월 4일 시무식을 마치고 사무처 직원들과 기념촬영(가운데 뒷짐진 이가 최 회장).
   최 선생은 1970년부터 1982년까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제7대부터 10대까지 무려 12년을 인천상공계의 대표로 지낸 것이다. 인천상의 역대 최장수 회장의 기록이다. 따라서 최 선생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를 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52년에는 초대 민선시의원을 지냈고 70년대에는 국회 원내 진출의 큰 꿈을 품고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자유당 말기 인하대학교가 한진그룹에 인수되기 전에는 인하대학교 이사를 지내며 학교를 관리했고 1972년에는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위치한 신명여고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던 교육사업가이기도 했다.

   상공인으로, 정치인으로, 교육사업가로, 체육인으로 다양한 계통에서 인천의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는 1917년 음력 9월 24일 경기도 안산시 월곶동에서 경주 최씨 2남5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농이었다고 한다. 1932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경성전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에는 야간학교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그가 상의회장을 맡았을때 임원으로 활동했던 공성운수 심영섭(84) 회장은 그의 생전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어 일본 나고야에서 고국에 들어와보니 좌익계열이 득세하고 있었어. 노조도 전부 전평계열이었지. 이듬해인 1946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최 선생은 지금의 동일방직 전신인 동양방직에서 서무계장을 맡고 있었어. 그때 우익계열인 대한노총 활동을 함께 하면서 얼굴을 알고 어울려 지냈지. 소탈한 성품에 포용력이 있고 누구 한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어. 동인천 길병원 자리가 당시 용동이었는데 정종에 빈대떡을 놓고 마시면 대적하는 사람 모두 나가 떨어졌어.”

   최 선생이 인천에 남긴 자취로 인천체육 진흥에 앞장선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69년에는 경기도야구협회장을 맡았고 76년에는 경기도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최 선생은 40여년전 동일방직 전무를 맡고 있을때 현재 인천시어머니배구단을 창단한 주역이기도 하다. 인천시어머니배구단은 60년대말 한·일 어머니배구단 교류전을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정례 경기로 개최했다. 어머니배구단은 여교사팀과 30대팀, 40대팀 등 3개팀 50여명으로 구성돼 정기적인 연습과 시합을 했다고 한다. 인천이 전통적으로 배구가 강한 것은 60~70년대 전국을 제패했던 동일방직 배구단의 영향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인하대학교 최천식 배구 감독의 모친이기도 한 전 배구 국가대표 선수 박춘강(63)씨는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인천시어머니배구단은 전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유명했는데, 최 선생이 시 예산만으로는 태부족이었던 선수단 운영비를 상공인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갹출해 도움을 주셨다”며 “인천에서 그 분처럼 남자다운 분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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