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공분을 산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를 엄벌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가해자들은 법망을 피해 사각지대를 파고들고 있다. 2020년 4월 말부터 불법 촬영물을 유포·구매뿐 아니라 소지하거나 시청만 해도 처벌하는 형법·성폭력처벌법·아동청소년보호법 개정안,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또한 인천디지털성범죄예방대응센터와 경기도디지털성범죄피해자원스톱지원센터를 비롯한 전국 각 시도에 있는 디지털 성범죄 대응 기관들은 불법 촬영물이 유포된 사이트에 영상 삭제를 요청하고 있다.하지만 트위터,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성인물 사이트는 자신의 플랫폼에 올라온 영상 중 디지털 성범죄로 입증된 영상에 대해서만 삭제 요청을 받고 있다. 이는 삭제를 요청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성범죄 영상물임을 직접 입증해야 하는 책임을 진다. 또 이 사이트들은 외국에서 운영되거나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 국내법을 적용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국인이 개발한 한국의 1인 라이브 방송 플랫폼에서 피해자의 영상이 불법으로 유포됐는데, 이 플랫폼은 법인을 일본에 두고 있어 영상물을 삭제할 수 없었다. 이처럼 운영자나 현지 수사 당국이 협조하지 않으면 영상물 삭제가 어려운 것이다.국내법 적용 받지 않아 '협조 필수'요청하는 기관이 범죄물 입증해야"인터폴 영향력 높여 공조수사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용빈 의원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상반기 개인과 기관에서 온라인 사이트 등에 불법 촬영물 삭제를 요청한 건수는 11만197건이다. 그러나 절반에 가까운 4천786건(46%)에 대해서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로 판단하지 않는 등 자의적으로 해석해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김기범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개발도상국은 사이버 범죄수사기술이 부족하다. ODA(공적개발원조)를 통해 수사 기술을 전파하고 공조 수사 범위를 넓혀야 한다"며 "우리나라가 인터폴 등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영향력을 높이고 선진국과 공조 수사를 펼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 관련기사 3면([n번방 사건 2년, 여전히 불안하다] 디지털 성범죄 수사·판결 문제점은)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사회적 공분을 산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를 엄벌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가해자들은 법망을 피해 사각지대를 파고들고 있다. /연합뉴스
불법 촬영물은 유포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피해가 커져 '골든타임'을 사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현장에선 사건 발생 초기에 불법 촬영 가해자를 붙잡거나 증거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겨우 검거해 재판정에 세우더라도 집행유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지난해 3월 발표한 '2020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보고서'를 보면 2020년 전국에 있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접수된 피해 유형은 '불법 촬영'이 2천239건(32.1%)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유포' 1천586건(22.7%), '유포 불안' 1천50건(15.0%) 등의 순이었다.보고서 내용과 같이 불법 촬영 피해자들은 유포와 유포 불안 등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문에 경찰이 불법 촬영물 유포를 막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수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포땐 심각한 피해, 초기대응 중요 불구수색영장 발부 오래걸려 증거인멸 가능성 지난해 불법 촬영 피해를 당한 20대 여성 A씨는 "경찰 수사가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증거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증거를 직접 수집해야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분통을 터트렸다.현장 수사관들은 "수사에 어려움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불법 촬영 혐의를 수사하기 위해선 수색영장이 필요한데, 영장 발부 조건이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는 것이 현장 수사관들의 설명이다. 인천의 한 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수사관은 "불법 촬영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해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는 한 전자기기를 압수수색할 수 없다"며 "특히 주말에 사건이 나면 수색영장을 받는 데 2~3일이 걸릴 때도 있다"고 했다.수사 인력이 부족한 문제도 있다. 불법 영상물이 담긴 저장 장치를 확보해도, 수사관 1~2명이 방대한 양의 사진과 영상을 모두 조사해야 한다. 인천의 또 다른 경찰서 수사관은 "불법 촬영 영상 등 증거물이 1TB(테라바이트)가 넘어도 일일이 다 확인해야 하니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사건 발생 초기에 가해자를 검거하거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가해자는 그만큼 증거를 인멸하거나 유포할 시간을 버는 셈이다.최근 1년 인천지법 89건 판결중 53건 집유실형은 24% 불과… "양형 기준 개선해야" 불법 촬영 가해자들이 실형을 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경인일보가 불법 촬영 범죄와 관련한 인천지방법원의 지난 1년(2021년 3월~2022년 3월) 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89건 중 53건(59%)은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 중에는 무려 255회나 불법 촬영 행위를 했으나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은 사례도 있다.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에 따르면 카메라나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대상자 의사에 반해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상당수는 초범이거나, 영상 또는 사진에 있는 사람이 피해자인지 식별하기 어렵거나,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등의 사유로 형량이 감경됐다. 실형은 22건(24%)이었는데, 이마저도 폭행·강요·협박·강간·성추행 등 불법 촬영 외 다른 양형 사유가 있는 경우였다.한국여성변호사협회 인권이사 서혜진 변호사는 "최근에는 휴대전화 1개가 아니라 여러 전자기기를 이용해 불법으로 영상을 찍거나 공유하고 있다. 불법 촬영 수사에서 휴대전화 1개만 조사하는 것은 고질적 문제"라며 "불법 촬영 피해자의 감정을 고려해 수사기관이 피해자가 이해할 만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실제 처벌 수위가 낮다는 지적에 대해선 "지난해 1월 불법 촬영(카메라등 이용 촬영)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마련됐지만, 200~300차례 같은 범행을 저질러도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있다"며 "불법 촬영 범죄 양형 기준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승희(사진)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 수법이 음지화·개인화되고 해외 서버 사이트를 통해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다며 '강력한 처벌 법·제도 도입'과 '수사 범위 확대' 등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서승희 대표는 최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불법 촬영 범죄에 대해 "한국은 이미지와 동영상을 인터넷상에서 빠르게 유통하는 기술력을 가졌다. IT 기술이 디지털 성범죄에 쓰이고 있는 셈"이라며 "이 같은 디지털 성범죄를 그동안 국가와 공권력이 방치해 왔다"고 비판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2017년부터 1천명이 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해온 단체다.서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은 얼마 안 됐지만, 이미 2000년대 중·후반부터 웹하드를 중심으로 이 같은 범죄가 있었다"며 "당시 정부와 수사기관에서 디지털 성범죄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성착취물이 하나의 성인물 콘텐츠가 됐다"고 지적했다.2000년대 중후반부터 웹하드 중심 성착취물 퍼져… 공권력 '콘텐츠화' 방치'n번방 사건'후 중대범죄 인식… 대규모 범죄 줄었지만 치밀하고 악랄해져 서 대표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를 운영하며 끊임없이 디지털 성범죄를 막기 위한 강력한 법·제도 도입을 주장해왔다. 그는 "2017년 센터 설립 이후 성착취물을 소지·시청·저장·구매하는 수요 행위를 처벌해 달라고 요구해왔다"며 "하지만 과잉 처벌이라는 여론이 주를 이뤄 입법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2020년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인 이른바 'n번방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며 "이마저도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아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은 법망을 피해갔다"고 덧붙였다.그는 n번방 사건 이후 마련된 대책에 대해 아쉬움도 털어놨다. 서 대표는 "사건 이후 성착취물 유포가 중대 범죄라는 인식이 생긴 것은 성과"라면서도 "처벌 수위는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 비해 여전히 낮다"고 했다. 또 "비슷한 사건을 두고 재판부별로 형량이 다르거나, 양형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판결이 나오는 등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서 대표는 n번방 사건 이후 '음지화'되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정부와 수사 당국이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n번방 사건 이후 겉으로 드러나는 디지털 성범죄가 많이 줄었다. 집단이나 대규모 범죄도 감소하는 추세"라며 "대신 범죄가 음지화·개인화되면서 범죄 수법이 더 치밀하고 악랄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이어 "성착취물이 해외 서버(텔레그램·디스코드 등)에서 유포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선 경찰이 유포자뿐 아니라 사이트 운영자, 이용자에 대해서도 인지수사를 펼칠 필요가 있다"며 "이러한 수사를 위해 인력이나 예산이 필요하다면, 정부와 국회가 나서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서 대표는 "사이버 성폭력은 성착취물을 찍거나 유포하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상에서 벌어지는 스토킹, 성희롱 등도 포함된다"며 "여러 종류의 사이버 성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처벌 법률이 현재는 없다. 이처럼 부족한 부분도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승희 대표.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2020년 초 이른바 'n번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며 국민의 공분을 산 지 약 2년이 됐다. 사건 이후 여러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정부와 지자체가 디지털 성범죄 대응에 노력하고 있지만, 불법 촬영 등 디지털 성범죄는 여전히 곳곳에서 뭇 여성을 위협하고 있다.최근에는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영상을 촬영·유포하고 이를 가지고 협박하는 사건도 다수 발생하고 있다. 지인의 얼굴 사진으로 만든 딥페이크 영상이나 10대 청소년과 발달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악질적 디지털 성범죄가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실정이다.경인일보는 범죄 피해자의 어려움과 현장 수사의 한계점 및 제도적 보완 사항 등 디지털 성범죄 사각지대를 세 차례에 걸쳐 집중 진단한다. → 편집자주평범한 회사원이었던 20대 여성 김서윤(가명)씨 일상은 어느 날 받은 전화 한 통으로 무너져 내렸다. "불법 촬영 피해자로 확인되셨습니다." 지난해 7월께 인천의 한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이 전화 이후 김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그는 "처음에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며 "일상생활에 집중하기 힘들어 모든 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가해자는 인천의 한 20대 사업가 A씨로, 2020년 9월께 이른바 '길거리 헌팅'으로 김씨와 만나 사업 이야기로 친분을 쌓은 뒤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김씨가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보다 약 10개월 후인 지난해 7월이었다."불법촬영 피해자" 경찰 연락믿기지 않는 현실, 직장 그만둬심리치료중 계속된 합의 전화 김씨는 심리 치료를 받으며 회복에 집중했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그는 "경찰과 검찰로부터 사건관련 연락을 계속 받아야 했다"며 "가해자 측에서 합의를 요구하는 전화도 수차례 걸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건을 잊으려고 노력해도 이러한 전화들 때문에 잊을 수 없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체포 당시 A씨의 USB와 하드디스크 등에서 발견된 불법 촬영 영상만 약 80개였다. 중·고등학생 등 청소년들의 영상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김씨는 "영상이 유포되지 않았길 바라고 있다"면서도 "가해자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올 때마다 이 사람도 내 영상을 본 것은 아닌가 불안했다"고 했다. 이어 "사람들 시선이 너무 무서워져 개명과 휴대전화 번호 변경까지 고민했다"고 했다.A씨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올해 1월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김씨는 "이제 겨우 1심 선고가 났다"며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게 되면 앞으로 수년 동안 이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대법 판결까지 수년 걸릴수도""디지털 성범죄 예방 강화해야"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n번방 사건 이후 2년이 지나는 동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규제와 처벌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여전히 유포된 영상을 완벽히 삭제 못 하거나, 가해자 처벌 수위가 낮은 등 기술적·법률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을 늘리는 등 디지털 성범죄 예방을 위한 선제적 조치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관련기사 3면([n번방 사건 2년, 여전히 불안하다] 창문 넘어 들어온 '검은 손'… 가해자는 지금도 같은 아파트 산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인천의 한 다중이용시설 여자화장실 입구에 '불법촬영은 범죄입니다!'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발생한 지 약 4년이 지났지만, 유사한 또는 이보다 진화한 수법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인지역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피해자 지원 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피해자의 절반가량은 10·20대 여성이었다. 2022.3.20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9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인천의 한 아파트에 사는 20대 여성 정혜수(가명)씨는 지난해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지난해 7월 며칠 전부터 아파트 복도 창문에서 누군가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혜수씨는 곧장 아파트 인근 지구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경찰은 일단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지켜보자고 했다. 혜수씨는 집으로 돌아온 직후 방 안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한 남성이 혜수씨의 방 창문을 살짝 연 뒤 휴대전화를 들이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겼다.이를 확인한 혜수씨는 112신고를 했고, 경찰은 주변을 수색해 2시간여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인 용의자 40대 남성 A씨를 특정했다. 하지만 경찰은 현장에서 확인한 A씨 휴대전화에서 불법 촬영물로 보이는 사진이나 영상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해 경찰서까지 임의동행했다. 이날 용의자 A씨는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후 귀가했다.혜수씨는 최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경찰의 이러한 초동 조치에 분노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방 안에 설치한 카메라에 용의자가 휴대전화를 들이미는 정황이 담겼는데도 불법 촬영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며 "A씨가 도주한 2시간 동안 영상을 지웠을 수 있고, 애초 다른 휴대전화로 촬영했을 수도 있다. 경찰이 현장에서 무엇을 근거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20대 女 혜수씨, 불법촬영 정황 신고이웃 주민 특정했으나 '증거' 미확보조사과정 4번이나 '피해 진술' 반복 혜수씨는 불법 촬영과 주거침입 피해자 신분으로 경찰서를 방문했는데, 경찰이 당초 현장에서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했기에 형사과에서 진술해야 했다. 사건의 본질인 불법 촬영 혐의에 대한 고소장은 별도로 써내야 했다. 이 때문에 혜수씨는 자신이 불법 촬영 피해자라는 증거를 직접 모아 고소장을 써낸 후에야 여성청소년과 수사관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혜수씨는 "여성청소년과 수사관들에게 '성범죄로 단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불법 촬영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가 담긴 영상을 보여주며 수사관들을 설득해야 했다"고 주장했다.이 과정에서 혜수씨는 경찰의 보호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공포스러웠던 그날의 경험을 형사과, 민원실, 여성청소년과, 신변 보호 요청 담당자에게 총 4번이나 진술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해당 경찰서 관계자는 "주거침입 혐의로 형사과에 우선 접수된 사건이어서 형사과가 계속 수사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오해한 것 같다"며 "결코 성범죄 수사를 축소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피해자가 여러 부서를 찾아 각각 진술해야 했던 점에 대해선 "원스톱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여러 번 진술을 반복하게 한 부분은 유감"이라며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정 조치했다"고 덧붙였다. 경찰 진술 최소화 시스템 무용지물'성범죄' 불기소… 주거침입만 적용"9개월 지났는데 여전히 불안 떨어"원스톱 시스템은 성범죄 피해자에게 여성경찰관 등 전담 수사팀을 배정해 피해자가 진술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인데, 혜수씨 사건의 경우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경찰은 혜수씨의 고소장을 접수한 지 닷새 후에야 A씨가 제출한 휴대전화에 대해 디지털 포렌식을 했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A씨는 지난해 11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미수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혜수씨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혜수씨는 "사건 이후 9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경찰의 신변 보호를 믿을 수 없어 사설 보안업체까지 신청했다"며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이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편, 가해자 A씨는 주거침입 혐의로 4월께 열릴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인천의 한 다중이용시설 여자화장실 입구에 '불법촬영은 범죄입니다!'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발생한 지 약 4년이 지났지만, 유사한 또는 이보다 진화한 수법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인지역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피해자 지원 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피해자의 절반가량은 10·20대 여성이었다. 2022.3.20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지난해 12월 인천 연수구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미성년자들에게 접근해 음란물을 촬영하도록 협박하고 유포한 고등학생 A군이 체포돼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A군은 지난해 초부터 SNS에서 친분을 쌓은 중·고등학생 7명을 협박해 나체 동영상과 사진을 찍도록 했다. 경찰이 A군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에 대해 디지털 포렌식 작업을 진행한 결과 수백 건의 성착취물이 발견됐고, 이 중 일부는 유포된 것으로 밝혀져 공분을 샀다.작년말 인천서 또래 협박 착취물 제작10대 일당 검거… 친밀감 형성후 범죄 지난해 11월에는 SNS 등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인천의 20대 남성 B씨와 10대 남녀 등 총 6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 중 5명은 10대였다. B씨 등은 지난해 1월부터 이른바 'n번방'과 '박사방' 등을 통해 유포된 7만5천여 건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등을 텔레그램으로 판매했다.이들은 아동·청소년 5~6명에게 새로운 성착취물을 제작하도록 하는 등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A군과 B씨 등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성착취물 제작·배포 혐의 등으로 입건돼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n번방 사건 이후에도 미성년자 등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게 저지르는 디지털 성범죄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인천디지털성범죄예방대응센터(6~12월)와 경기도디지털성범죄피해자원스톱지원센터(2~12월)에 접수된 피해자 세부 현황 자료를 보면, 전체 463명 중 10대가 197명(42.5%)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10대 다음으로는 20대(113명) 피해자가 많았다. → 그래픽 참조피해 '그루밍' 최다… 상습·지속 특징"적극적 수사 가능토록 제도 개선을" 특히 A군 사례에서 보듯 온라인상에서 청소년 등 미성년자와 친밀감을 형성한 후 영상물을 찍어 유포하는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인천에 접수된 피해 유형 중에는 온라인 그루밍이 전체 96건 중 22건(22.9%)으로 가장 많았다. 그루밍 성범죄는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쌓는 등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안정시킨 뒤 성적으로 학대하는 범죄로, 특히 10대 청소년과 발달장애인 등이 취약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종하기 때문에 상습적·지속적이라는 특징도 있다. 10대 청소년이 그루밍 성범죄에 노출되면 장기간 성적 학대를 받고 많은 양의 성착취물이 유포될 수 있는 것이다.아동·청소년 인권단체 '탁틴내일' 이현숙 상임대표는 "10대 청소년은 범죄에 노출됐을 때 대처 능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져 범죄자들의 타깃이 되기 쉽다"며 "아이들의 디지털 정보 해석과 이해를 돕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인터넷 플랫폼과 연계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 정황이 포착되면, 경찰 등 해당 기관이 적극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인천의 한 다중이용시설 여자화장실 입구에 '불법촬영은 범죄입니다!'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발생한 지 약 4년이 지났지만, 유사한 또는 이보다 진화한 수법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인지역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피해자 지원 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피해자의 절반가량은 10·20대 여성이었다. 2022.3.20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국내 가상자산시장이 시가총액 60조원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급격한 성장세와 비교해 제도적 안전장치는 허술한 상태다. '욘사마 코인' 퀸비 상장폐지 사건 등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지만, 이를 사전에 예방할 장치도 현재로선 전무하다.이 때문에 업계는 물론 투자자들도 사업자의 역할과 책임 및 투자자 보호 등 산업 발전을 위해선 가상자산 산업의 영업·사업 범위를 규정하는 '가상자산 업권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발의된 '가상자산업법' 등 관련 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다.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현재 원화로 코인·토큰 거래를 할 수 있는 원화마켓 가상자산거래소는 업비트, 빗썸코리아, 코인원, 코인빗 등 4곳이 있다. 최근 시중은행과 입출금 제휴를 맺은 고팍스가 코인마켓에서 원화마켓으로 신고 변경 절차를 마치면 5곳으로 늘어난다. 지난해 하반기 국내 가상자산 시가총액은 55조2천억원으로 집계됐다. 시중 은행의 가상자산 거래업자와의 결합이 이어지면 올해 말엔 시가총액이 6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거래소·상장사 '투명한 정보' 시급한국거래소와 동일 기관 필요성도산업 전반 살핀 '업권법' 제정 요구 업계와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거래가 늘어나는 만큼 지금이라도 가상자산 거래업자(거래소) 및 상장사의 투명한 정보공개를 위한 공시 의무와 불공정 거래행위 금지 등을 담은 제도 마련을 시급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자본시장법에 근거한 한국거래소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가상자산 거래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제안까지도 일각에선 나온다. 관련 법을 마련해 가상자산을 제도권 안의 산업으로 인정해야 건전한 육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금세탁 방지와 과세에만 방점을 둘 것이 아니라, 산업 전반을 살피는 가상자산 업권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대선 등 정치권 사정으로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 소위가 열리지 않아, 업권법 제정 관련 새로운 논의 사항이 현재로선 없다"며 "국회가 전문가와 금융위가 제시한 쟁점을 법 제정 과정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3면()/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지역자치부=김환기 부국장,정치부=손성배,경제산업부=김동필,사회교육부=이시은 기자,사진부=김도우 기자국내 가상자산시장이 시가총액 60조원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급격한 성장세와 비교해 제도적 안전장치는 허술한 상태다. '욘사마 코인' 퀸비 상장폐지 사건 등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지만, 이를 사전에 예방할 장치도 현재로선 전무하다. 2022.2.22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증권시장에는 주가조작과 시세조종 등 불공정 행위를 막고 건전한 시장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법규와 장치가 있다. 반면 가상자산 시장은 하루 평균 11조원 이상이 오가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는데도, 법정 개념조차 없어 '무법지대'가 되고 있다.증권시장과 가상자산 시장은 대규모·비대면으로 자본 거래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구조와 운영 행태가 비슷하다. 하지만 증권시장과 달리 가상자산 시장은 불안정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증권시장 출범 원년은 1956년이다. 한국거래소는 대한증권거래소라는 명칭으로 출범한 뒤 70년 가까이 존속하며 투자자와 상장사 보호 체계를 확립했다.반면 가상자산 시장은 첫 번째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출현한 2009년을 기점으로 하더라도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지 1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소득에 대한 과세만큼이나 거래 안전성 보장과 재산권 보호를 위한 장치 마련을 선행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가상자산 시장의 미흡한 거래 보호 장치=증권시장의 규제는 투자자를 허위, 조작, 사기 등 불공정 행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투자자 보호에 근간이 있다. 증권시장은 증권 발행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정보비대칭성을 보완하고자 '공시규제'를 엄격히 적용한다. 공시는 증권 발행기업의 정보와 유가증권의 가치평가에 영향을 주는 정보를 제공해 투자자들의 투자의사결정을 돕는 장치다.증권시장 '공시규제' 엄격히 적용가상자산 검토보고서는 '일회성'거래중지·상폐 뚜렷한 기준 없어"상장·운영 다하면 사고날수 밖에" 가상자산 시장에서 각 거래소는 '가상자산 검토보고서' 형태로 투자자들에게 코인 발행 상장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검토보고서 자체가 일회성이고 공시 사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코인 발행(상장)사가 건전하고 사업을 꾸준히 영위할 수 있는지도 불명확하다. 게다가 거래소의 투자유의종목 지정, 거래중지, 상장폐지의 뚜렷한 기준도 없어 공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이뿐 아니라 미공개 중요정보를 이용한 내부자 거래,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를 차단할 상시 기구도 없다.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의 가상자산 거래업자(거래소) 운영은 제도권 밖에 있기 때문에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꼬집는다. 이 연구위원은 "가상자산 거래소는 상장 심사와 유의종목 지정, 상장폐지 권한을 모두 쥐고 있다. 민간이 하더라도 주식시장의 한국거래소처럼 공적 기능을 가진 곳에서 해야 한다"며 "민간 거래소에서 상장과 운영을 다 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거래소마다 각각 코인(토큰) 가격이 다른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탈세 숨기는 가상자산?=금융정보분석원(FIU)이 발표한 가상자산 일 평균 거래 규모(지난해 하반기 기준)는 11조3천억원이다. 가상자산 시장은 거액이 움직이는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세금 체납자의 '뒷주머니' 역할도 했다. 경기도가 지난해 가상자산 거래소에 지방세징수법에 따른 질문검사권을 행사해 체납자 1만2천613명으로부터 압류한 가상자산은 530억원에 달한다.체납자 1만2천여명 530억원 압류동결만 가능·원화 매각 동의 필요 문제는 실명 입출금 계좌 제휴를 맺지 않은 코인마켓 거래소에선 체납자의 가상자산을 찾기도, 압류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게다가 체납자의 가상자산을 압류하더라도 계좌를 묶는 동결만 가능할 뿐 원화로 바꿔 징수하려면 체납자의 동의가 필요해 여전히 빈틈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도 조세정의과 관계자는 "일반 금융권의 경우 증권 자체를 압류해 매각하는 추심의 법적 근거가 있지만, 가상자산을 강제 추심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며 "압류한 530억원 중에 60억여원은 31개 시·군 담당자들이 체납자를 설득해 징수했지만, 나머지는 묶어만 둔 상태"라고 말했다.체납자가 숨긴 가상자산을 압류하기도 힘든 판국에 정부는 가상자산 소득에 과세를 하는 소득세법 개정을 했다.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소비자보호연구센터장도 "정부가 특정 소득을 과세 대상으로 해 국가 재원으로 쓰려면 해당 소득을 발생시키는 거래의 안전성을 보장하고 납세자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며 "가상자산 시장이 법 제정 없이 방치하기엔 너무나 큰 규모로 성장했기 때문에 가상자산 사업자를 기존 금융기관에 준해 관리 감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가상자산업법 제정 논의 어디까지 왔나=국회에 발의된 가상자산 시장 관련 법안은 전자금융거래법·특정금융거래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6건과 가상자산업법안(대표발의 이용우 더불어민주당)·가상자산 거래 및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권은희 국민의당)·가상자산산업기본법안(윤창현 국민의힘) 등 7건 등 총 13건이다. 모두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이다.전자금융거래법과 특정금융거래법 등 기존 법률에 대한 개정안의 등장 배경은 가상자산 사업자의 불공정행위와 거래소 해킹 또는 오류 등으로 인한 피해자 보호 근거 마련이다. 불공정행위·해킹·오류 등 차단관련 법안 13건 국회 정무위 계류개정안 제안 이유와 주요 내용을 종합하면 ▲가상자산의 법정 정의 ▲사업자 준수 의무사항 규정 ▲이용자 피해 사전 방지 위한 손해배상 책임 명시 ▲시세조종 행위 등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구제와 보호 규제 정립 등으로 일맥상통한다. 가상자산사업 관련 새로운 법률을 만들자는 제정안 7건엔 가상자산 산업을 보다 명확히 규정해 육성하고 가칭 가상자산정책조정위원회 설치, 가상자산산업발전기금 설치 등 정부 조직·기금 신설안도 담겨있다. 최화인 금융감독원 블록체인 발전포럼 자문위원은 "우선 이용자 보호를 위해 자본시장법 일부 내용을 개정해 가상자산을 금융투자상품에 포함하면 다단계, 유사수신, 시세조종, 내부자거래, 미공개 중요정보 이용, 일방적 상장폐지 등으로부터 이용자의 자산과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며 "전담기구를 신설해 시장교란 행위가 발생하는 지점에만 개입하는 핀셋 규제를 적용하는 것도 기술기반 디지털 가상자산시장 생태계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표 참조 /기획취재팀※기획취재팀지역자치부=김환기 부국장, 정치부=손성배, 경제산업부=김동필, 사회교육부=이시은 기자, 사진부=김도우 기자가상자산 시장이 하루 평균 11조원이 오가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음에도 가상자산 그 자체의 법정 개념조차 없어 거래 안전성 보장과 재산권 보호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라이브센터. 2022.3.1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정부가 가상자산을 화폐로 인정하지 않고 규제 만들기를 게을리하는 사이 허술한 법망을 틈타 가상자산 범죄가 판을 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자산투자 열풍이 불면서 가상자산 시장에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며 서민을 노린 금융범죄까지 횡행하고 있다. '욘사마 코인' 퀸비컴퍼니 상장폐지 사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장사가 금융위원회에 가상자산사업자 등록 신고를 마친 정상적인 거래소에 상장했다가 해킹 등 코인 물량의 비정상 유출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같이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의 고소가 잇따르고 있다. 빗썸글로벌과 빗썸코리아에 상장했다 거래지원이 종료된 '욘사마 코인' 퀸비컴퍼니와 퀸비와 계약을 맺고 투자한 블록체인업체 렛츠컴바인은 지난 2020년 각각 서울중앙지검과 서울용산경찰서에 특경법상 컴퓨터 등 사용 사기 혐의로 고소장을 냈다.두 고소인은 현재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 각자 소유한 암호화폐 지갑의 퀸비 코인 QBZ를 원격 조종으로 해킹해 탈취해 갔다고 주장했다. 퀸비의 추산 피해액은 당시 QBZ 거래액 기준 우리 돈으로 26억1천여만원이고, 렛츠컴바인의 피해액은 5억5천500여만원이다.이강혁 퀸비컴퍼니 대표는 "당시 해킹으로 의심되는 비정상 코인 유출로 거래소 빗썸글로벌과 빗썸코리아에서 일정 시간 퀸비 코인 거래를 전량 정지시켜야 했다"며 "해킹 이슈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코인 거래 자체가 불가피하게 중단되면서 유통에도 차질을 빚었다"고 말했다. 현재 이 사건 수사는 서울중앙지검에서 서울강남경찰서로 넘겨져 2년째 진행 중이다.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서민을 대상으로 한 가상자산 사기 피해가 전자금융사기(보이스피싱)의 피해액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실제 경찰청 경제범죄수사과 자체 집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가상자산 관련 범죄 피해금액은 3조87억원으로, 지난해를 통틀어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액 7천744억원의 3.9배로 나타났다. 작년 피해액 3조 이상 '피싱의 4배''퀸비사건' 비정상 물량유출 피해상장사, 해킹 고소 '2년째 수사중'"대표가 재벌 손자, 안 망해" 현혹거래소 설립후 투자금 빼돌리기도 가상자산 투자로 고수익을 올렸다는 성공 사례가 알려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코인을 거래할 수 있다고 꼬드기고 유명무실한 거래소를 설립해 투자금만 빼돌리는 등의 범죄 피해액이 쌓여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을 크게 넘어섰다.대표적인 사건은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가 수사한 실체 없는 가상자산 거래소 브이글로벌 사기 사건이다. 브이글로벌 일당은 "대표이사(33세 남성)가 재벌 손자이니 절대 망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거짓말로 투자자 5만여명을 현혹했다. 이 사건을 맡은 수원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김미경)의 판결문에 따르면 법률상 속여 뺏은 금액만 약 2조원으로 추산했다.재판부는 브이글로벌 가상자산 사기 사건을 '대규모 범죄를 일으킨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금융거래의 안정을 침해했으며, 다수 피해자에게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혔다고 명시했다. 이어 "국민들의 사행심을 조장해 건전한 근로 의식을 약화시키고 정상적인 소득활동을 저해해 여러 사회적 피해를 발생시켰으며,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켜 궁극적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질서를 교란했다"고 판시했다.주범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브이글로벌 대표이사 이모(33)씨다. 법원은 지난 11일 그에게 징역 22년을 선고하고 추징금 1천64억2천800여만원을 명령했다. 또 수사 초기 이씨로부터 몰수보전한 법인 명의 예금계좌에선 100억4천400여만원도 국고 환수했다.이런 극단적인 상황에도 정부는 과세 외 가상자산 거래를 제도권 안으로 들일 계획이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 사이 애꿎은 투자자 피해만 커지고 있다. → 관련기사 3면([욘사마코인 '퀸비' 왜 쓰레기가 됐나·(2)] 가상자산 호재 노린 범죄의 원인은)/기획취재팀※기획취재팀지역자치부=김환기 부국장, 정치부=손성배, 경제산업부=김동필, 사회교육부=이시은 기자, 사진부=김도우 기자정부가 가상자산을 화폐로 인정하지 않고 규제 만들기를 게을리하는 사이 허술한 법망을 틈타 가상자산 범죄가 판을 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라이브센터. 2022.2.22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가상자산에 투자자가 몰리는 세태를 악용해 서민 주머니를 털어가는 범죄의 원인으로는 시스템의 불완전성과 정보의 비대칭성이 꼽힌다.퀸비컴퍼니 상장폐지 사건 역시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을 종합해보면 가상자산을 보관하고 있던 투자자들의 컴퓨터에 누군가 침입해 거래소에 풀려선 안 되는 비정상적인 코인 물량이 유출된 정보보안 시스템의 취약성이 있었다.■ 불완전한 가상공간의 '자산'= 퀸비는 2020년 2월 빗썸글로벌(현 비트글로벌)과 빗썸코리아에 코인 QBZ를 상장한 뒤 3차례 '해킹'으로 의심되는 코인 비정상 유출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퀸비가 코인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웹 익스플로러 이더스캔을 활용해 파악한 결과, 가장 많은 물량이 유출됐을 당시인 지난해 4월23일 QBZ 4억9천836만8천400여개 중 5천5만4천개가 빗썸코리아의 계정으로 빠져 나갔고, 나머지는 빗썸글로벌에 있는 지갑 계정으로 옮겨진 뒤 빗썸코리아로 재차 옮겨졌다.당시 퀸비는 잇단 계정 해킹으로 인해 거래소에 유통할 수 있는 코인 수보다 많은 물량이 나오자 투매(투자 손실을 감수하고 투자 자산을 팔아버리는 행위)를 우려하며 빗썸코리아와 빗썸글로벌에 거래정지를 요청했다.퀸비 입장에선 비정상적으로 많은 양의 코인이 시장에 나오는 상황을 급히 막아야 했지만 거래소 입장은 달랐다. 진상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래정지를 할 경우 또 다른 투자자의 손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입출금 거래정지 조처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퀸비는 빗썸 거래소로 빠져나가유통 코인보다 많은 물량에 '투매'거래정지… 풀린 물량은 대책 없어 당시 빗썸은 잇단 해킹에 거래정지요청을 받은 당일 오후 6시30분 긴급하게 입출금 거래정지를 공지했으나 이미 풀린 물량에 대해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보안 취약성이 가상자산의 약점으로 작용해 투자자들에게 위험 부담을 안기고 있다.이 사건에 대해 빗썸코리아 관계자는 "QBZ 재단이 3차례 해킹을 당해 보안 취약점을 보여 계정 입출금 제한 조치를 했고, 보안 강화를 위해 거래소에서 재단의 스마트컨트랙트(smart contract)를 업데이트해 주기도 했다"며 "투자자 손실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다"고 설명했다.스마트컨트랙트는 블록체인을 기반해 체결하는 계약으로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개인 투자자가 소유한 코인 지갑과 달리 코인 발행 재단에서 관리하는 계정이다. 물량을 이동시키거나 묶어둘 수 있는 보안 기능으로 통용된다.■ 법 개정에도 거래소만 가진 '독점적 지위' =앞서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3월 가상자산사업자에 대한 규율 근거를 마련하고자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정금융정보법)을 개정 시행했다. 이 개정 법률에 따라 가상자산사업자(거래소)는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 은행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발급 등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이후 금융위원회는 신고를 수리한 거래소에 대해 자금세탁 등을 검사할 수 있다.기존에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정을 발급받았던 거래소 업비트와 빗썸, 코인원, 코빗이 지난해 하반기 잇따라 원화로 가상자산을 사고 파는 거래소 지위를 인정받은 데 이어 최근 고팍스가 전북은행과 실명계정 발급 협의를 거쳐 요건을 충족하고 신고 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법개정했지만 거래소는 정보 독점상장사 건전성 임의 판단 권한 행사'거래지원 종료' 마땅한 기준도 없어 문제는 거래소의 정보 독점과 폭넓은 권한이다. 퀸비 사례로 비춰보면 상장 직전의 페이퍼컴퍼니 의심 해외 법인과의 계약과 빗썸과의 직접적인 협의 없는 상장 과정, 이후 해킹으로 의심되는 비정상 코인 물량 유출까지 코인을 발행한 퀸비 자체적으로 진위를 파악하고 대응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특히 상장사의 건전성을 각 거래소가 임의로 판단해 투자유의종목 지정과 거래지원 종료 등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데 민간의 영역이라는 이유로 법원에선 가상자산사업자의 권한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례까지 나와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는 규제를 보다 촘촘히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정보보호·블록체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법무법인 한별의 강민주 변호사는 "가상자산 거래소가 주식처럼 내부적인 절차가 있고 공정성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며 "투자유의종목 지정과 거래지원 종료에 마땅한 기준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들 입장에선 횡포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실제 가상자산 범죄를 다루는 경찰 역시 마찬가지 의견을 표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개정된 특정금융정보법에는 가상자산사업자로 신고를 하면 정보보안 시스템을 구비하고 은행을 통해 실명을 확보하라는 조항만 실효성이 있다"며 "현재로선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처벌조항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수사를 할 수밖에 없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기획취재팀지역자치부=김환기 부국장, 정치부=손성배, 경제산업부=김동필, 사회교육부=이시은 기자, 사진부=김도우 기자이더스캔으로 확인한 비정상 유출(해킹 등) 코인 이동 경로. /퀸비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