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칼럼

[방민호 칼럼] 상처 입은 말, 피 흘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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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말은 우리 말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쓴다. 하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초원을 뛰는 말이다.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는 선명한 자태를 보이지만 이 둘은 그래도 통하는 것 같다.

상처 입은 말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초원이다. 배에 독한 화살촉을 맞은 말이 쓰러져 있다. 말은 거꾸러진 채 네 발을 바둥거리고 있다. 화살이 꽂힌 배에서는 흥건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말의 눈동자에서는 상처로 인한 고통의 빛이 흐른다. 말은 지금 살아있기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단말마의 순간을 맞이할 것처럼 처절해 보인다.

그와 달리 푸른 초원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을 생각해 보자. 그는 지금 어떤 야생동물에도 쫓기지 않은 채 풀을 뜯다가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부는 대로 고개를 돌려본다. 이 말의 눈동자는 더할 수 없이 평화롭고, 그래서 그런지 말은 지구상 어느 짐승보다도 고매해 보인다. 말은 갈기도 꼬리도 모두 매끄럽고도 윤기 있게 빛나다 못해 탐스럽기까지 하다. 


선거 다가오며 말은 더 거칠어졌다
말은 부드럽고 고상하고 기운찬 것


벌써 이십 년 전, 십오 년 전부터 우리들의 말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말은 진흙 구덩이 같은 진창에서 뒹구는 듯 더러운 칠을 하고,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는지 모르는 화살들을 온몸 여기저기 맞아 피를 흘리게 되었다. 오물과 피가 뒤섞여 말은 빛나는 초원 위를 한가롭게 거닐던 아름답고 '귀족스러운' 자태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인터넷과 유튜브를 장악하고도 모자라 공중파 방송에로까지 번진 온갖 악취 나는 더러운 화살들에 여기저기 상처 입은 채 신음하고 있다.

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누는 말은 어떤 것인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말은 말끼리 만나 서로 코를 킁킁거리며 상대방이 화나지 않게 기분 상하지 않게 서로를 그윽하게 쳐다볼 줄 알아야 한다. 말들이 서로 만나자마자 뿔 가진 소처럼 상대방을 들이받을 듯 돌진하는 모양은 얼마나 볼썽사나운가. 처음 만나 서로를 마주보는 말들의 눈빛은 반가워하면서도 사려 깊고 은근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말은 유머러스해야 하고 위트 있어야 한다. 유머와 위트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다독거려 줄 수 있음을 뜻한다. 유머는 그냥 단순한 웃음이 아니요, 사람이 가진 약점과 단처를 따뜻하게 끌어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웃음이다. 좋은 유머는 상대방을 악의없이 웃게 하며 그러면서 자신의 약점과 단처도 솔직하게 내보이는 행위다. 우리는 또한 말의 위트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태에 처하여 이 사태의 본질적 측면을 날카롭되 짧고도 웃음 어린 표현으로 짚고 넘어갈 때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싱긋 웃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사태의 본질을 발견하는 그 순간 통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나누는 말은 깊고도 넓은, 의미의 함축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직설적인 말, 거친 말, 공격적인 말, 생경한 말,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말, 그리고 상황에 어울리지도, 상대에 어울리지도 않는 말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적절한 표현, 세련된 표현, 아름다운 표현, 겸양 어린 표현,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표현을 접할 때 기쁨을 느낀다.

정치 전면에 나설 때조차 우리 말을
아름답고 늠름하게 지킬 필요 있다
그것이 '신령스러움' 지켜 가는 길


앞에서 나는 십오 년 전쯤, 이십 년 전쯤이라고 했다. 그때쯤 우리는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빠르게, 편리하게 말을 쓸 수 있는 기술을 익혔는데, 그러자 말은 상처 입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말은 훨씬 더 거칠어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화살을 맞은 말들, 고삐 풀린 듯 뛰어다니는 말발굽에 우리는 어쩔 줄 모른다.

말은 생각해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얼마나 부드럽고 고상하고 기운찬 것인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어디로 끌고 가고 있나. 정치가 전면에 나설 때조차, 우리는 이 말을 되도록 아름답고 늠름하게 지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 말의 '신령스러움'을 지키는 길 아닐까.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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