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의 한국재벌사·69]현대-1 '현다이' 신화의 탄생

1946년 자동차 수리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8-08-07 제14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2018080601000332800014161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아내 변중석 여사와 촬영한 정주영 회장의 모습. /경인일보DB

미군차량엔진 교체·일제차 개조
1년후 건설에도 진출 '승승장구'
1957년 美군사시설 확충 급성장
자유당 정권과 커넥션은 불보듯


2018080601000332800014162
창업자 정주영(鄭周永, 1915~2001)은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논밭 4천여 평을 경작하던 중농(中農) 정봉식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고향 인근 송전소학교 졸업 후 부친을 도와 농사짓다가 가난한 농촌생활에 염증을 느껴 18세 때인 1932년에 가출, 인천의 항만하역장, 철도공사판 등을 전전하다 서울 인현동 소재의 쌀가게 복흥상회 배달원으로 취직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배달원생활 4년만인 1936년 신용을 담보로 주인에게 가게를 인수받아 경일상회란 쌀가게를 개업했다.

운영은 잘 됐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1939년 12월 '쌀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전국의 쌀가게들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 쌀가게 정리

그도 쌀가게를 정리하고 1940년 서울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란 자동차 수리공장을 3천500원(圓)에 이을학, 김명현 등과 공동으로 인수했으나 개업 25일 만에 공장이 화재로 전소,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삼창정미소로부터 다시 3천500원을 차용, 신설동 뒷골목의 조그만 대장간을 빌어 무허가 자동차정비공장을 차리고 수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서 소비자의 편리를 도모하는 등 기발한 방법으로 경영, 호황을 누렸다.

수리공장 운영 3년 만에 부채를 청산하고 약간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업정비령'이 발동돼 1943년 정주영의 정비공장은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합병됐다.

1946년 4월 중구 초동 106의 적산 대지를 불하받아 자동차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미군병기창의 차량 엔진 교체 및 중고 일제차 개조작업에 매진하는 한편 1947년 5월 25일 현대토건사(현대건설의 전신) 간판을 더 달았다.

건설업 마진이 자동차 수리에 비해 높은 데다 공사판을 전전했던 경험도 있어 사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사 1명과 기능공 10여명으로 건축업을 했는데 첫해 매출액 1천530만원을 기록했다.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자본 3천만원(75만원 불입)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6·25전쟁이 발발, 부산으로 피난했다.

정주영은 부산에서 주한미군 건설공사에 주목해 첫째 아우 정인영(鄭仁永, 1920~2006)을 끌어들였다.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정인영은 해방 직후부터 주한미군 통역으로 활동해왔다.

현대건설이 주한미군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은 1950년 10월 서울 대학로의 전 서울대학교 법대 및 문리대 건물을 개조, 미8군 전방기지사령부 본부 막사를 설치하는 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전국의 미군기지 건설공사 수주에 주력했고, 현대건설이 독점하면서 공사 이익은 실행예산의 56배 정도로 대박이었다.

환차익이 준 이익은 보너스였다. 1950년 1천800원대(1달러)였던 것이 1951년에는 2천500대 1로, 1952년에는 6천대 1로 뛰었다.

이 무렵 미군 공사뿐만 아니라 국내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긴급복구공사에도 참여했다. 1951년 2월 서울이 재수복되면서 전략물자수송 및 군사작전을 위한 긴급복구공사와 전재 복구공사가 발주됐는데 현대건설은 주로 교량복구공사에 참여했다.

한편 정부는 1953년 2월 15일 화폐가치를 100대 1로 절상하고 화폐단위도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전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대건설은 1955년 1월에 자본금을 1억환으로 증자하는 등 건설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당시 1천여 개의 건설업체들이 난립했는데 대동건설, 조흥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 등이 선두그룹을 형성, '건설 5인조'로 회자됐다.

1957년 현대건설의 수주액은 5억3천900만환으로 도급순위 9위였다.

그러나 1957년 7월부터 시행된 미군의 핵무장화 등 주한미군 증강정책에 따른 반영구적인 각종 군사시설 확충으로 건설업은 또다시 활기를 띠어 현대건설의 미군수주액은 1957년의 171만달러에서 1959년에는 281만달러 등으로 급성장했다.

>> 현대건설 부상

이후부터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는데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57년 9월 한강 인도교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국내 최대의 정부공사였던 인도교 복구공사는 굴지의 건설업자들이 장·차관 등 고위관료들까지 동원해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했는데 현대는 응찰결과 2순위였다.

"1위 가격을 써낸 흥화공작소의 가격을 본 내무부 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의사가 없는 것 같다'면서 2위인 현대로 낙찰했다. 이 공사에서 40%의 이익을 거뒀고 '건설 5인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현대건설35년사Ⅰ')

현대건설이 다각화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7월 현대상운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정부는 부산진역 부근에 외자 창고를 신축하고 창고 보관업무를 현대건설에 대행했는데 조건은 정부가 현대에 월 200만환의 보관료를 준다는 것이었다.

부산 중앙동 4가15-3 제2 부두에 연건평 2천167평의 외자 창고를 건설하고 매월 받는 보관료 200환은 현대건설의 운용자금으로 전용했다.

현대건설은 설립 10여년에 대형 건설업체로 부상했다.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당시 건설수주가 관급 공사 위주였던 점을 고려할 때 자유당 정권과의 커넥션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현다이(Hyundai)'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이한구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