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톡

[이대연의 영화 톡 세상 톡] 무산을 떠나온 무산자의 일지 ‘무산일기’

세속적질서·위선 얼룩진 한국

탈북자 담담한 시선으로 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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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에서 왔다. 오직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고향을 떠나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는 ‘탈북자’, 혹은 ‘새터민’, 혹은 ‘이탈주민’등 생경한 단어들이 그를 규정한다. 그리고 125로 끝나는 주민등록번호.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계임에도 그에게 주어진 몫은 없다.

박정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산다’가 개봉하면서 전작인 ‘무산일기’(2010)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세계 유수 영화제 수상과 초청이라는 작품 외적인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무산일기’는 한 출중한 작가로서 신예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값싼 연민도 넘쳐나는 분노도 아닌 담담한 시선으로 카메라가 ‘승철’이라는 탈북자의 일상을 쫓아갈 때 영화는 남과 북, 선과 악, 타락과 구원, 가난과 부의 이원적 구조를 통해, 그리고 계급과 종교의 문제를 착종시킴으로써 한 이방인 혹은 경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없이 순수하지만,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안고 있는 승철이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다가 문을 열고 나섰을 때 그가 마주친 것이 절벽이라는 사실은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온 그가 겪어야 했던 절망과 무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노래방 도우미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은 성(聖)과 속(俗)을 넘나드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것은 노래 자체의 문제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 사회의 세속적 질서와 위선적 태도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무산은 중국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북한 함경북도 무산이기도 하면서 우리 사회의 무산자를 상징한다. 무산을 떠나온 무산자 승철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사회의 천박함이다. 후반부 승철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며 붙였던 벽보를 찢는다. 그토록 붙이고 싶었지만 붙지 않았던 그것들이다.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이 이 땅에 붙기 시작한다. 체념하고 분노하는 순간부터, 그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는 순간부터 그의 변모가 시작된다. 그것이 구원이든 타락이든 그것은 관계없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개가 죽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죽은 개를 한없이 바라보며 승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대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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