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칼럼

[박석무 칼럼] 조선의 선비 화서 이항로의 애국심

입력 2023-07-10 19:46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7-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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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선비란 유학에 고명하고 애국심이 투철하여 백성과 나라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글만 잘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선비는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속유론(俗儒論)'이라는 글에서 선비 중에는 참선비(眞儒)와 속유(俗儒)가 있으며 선비라면 참선비이어야 한다면서 참선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식(文識)과 무략(武略) 등을 갖추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다산의 이야기에 의하면 선비란 글이나 잘 하고 온순하고 모범적인 처신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한다. 정치에도 밝아야 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경제에도 밝아 부강한 나라를 만들 그런 역량까지 지녀야만 참선비라는 말을 듣게 된다. 500년 전통의 조선에는 참으로 많은 선비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고 하는데, 특히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한말에 경기도 출신 참다운 선비 한분이 계셨으니 바로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고종 3년, 병인양요로 '민심 흉흉'
대원군 기세에 바른말 못하던 시대


정조 16년인 1792년 2월, 경기도 양평군(당시는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의 청화정사(靑華精舍)에서 이항로는 태어났다. 청화정사는 아버지 때부터 있던 기와집으로 화서의 서재요 강학하던 곳이지만, 한말 의병운동과 척양척왜의 기본논리인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시대정신이 싹텄던 세기의 토론장이었다. 화서는 큰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적은 많지 않고 아버지 우록헌(友鹿軒) 이회장(李晦章)이 글 잘하던 진사(進仕)였는데 대부분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 뒤 독학으로 연구를 거듭하여 대학자에 오르게 되었다. 학문이 깊어져 명성이 높아지자 경기도 일대는 물론 다른 지역의 학자들까지 학문을 물으려 청화정사에 몰려들면서 백계마을은 크게 알려져 학문을 강론하는 세기의 명소가 되었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효장들인 중암 김평묵(金平默)·성재 유중교(柳重敎)·면암 최익현(崔益鉉)·의암 유인석(柳麟錫) 등 척사이론과 의병투쟁으로 혁혁한 인물들이 화서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화서는 한말 조선의 대표적인 3대 성리학자의 한분이다. 전라도의 노사 기정진, 경상도의 한주 이진상과 함께 주리(主理)의 성리학자로 '이주기객(理主氣客)'이라는 독창적인 논리를 개발한 화서의 학문은 너무 우뚝 섰던 학자로 나라에서도 대접해야 할 수준에 이르렀다. 마침내 나라에서 49세의(1940년 6월) 화서에게 휘경원 참봉이라는 종9품 벼슬을 내렸으니, 유학자가 징사(徵士)에 오르고 산림(山林)의 대접을 받는 위치에 올랐다. 오로지 학문이 높다는 이유였으니 그런 영광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는가. 지금과는 다르게 낮은 벼슬이지만 학자에게 벼슬을 내리는 일은 벼슬의 높고 낮음과 관계 없이 큰 영광이 되었다. 물론 화서는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 양성에 생을 걸고 있었다.

조선 대표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
'전쟁 강경론' 척사위정 논리 개진
거침없이 직언… 공판 벼슬도 불응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준다. 1864년 고종이 등극하자 본격적으로 화서를 산림으로 인정해 정3품 당하관의 벼슬을 내렸다. 물론 사양했다. 1866년 9월 화서가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임명되면서 이항로의 이름이 벽계산림으로 울려퍼졌다. 이 무렵은 고종 3년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나 도하의 민심이 흉흉하고 세상이 온통 뒤집히던 때였다. 난세에는 어진 인물을 찾기 마련이다. 동부승지로 이항로가 입궐한다는 소문이 돌자 모든 백성들이 큰 기대를 걸고 희망을 말하던 때였다. 임금을 대면한 화서는 벼슬을 사양하고 상소를 올려 당시의 어려운 국가적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직언을 올렸다.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올바른 말을 못하던 그때, 화서는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전쟁에는 화의는 안 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강경론에 척사위정의 간곡한 논리를 거침없이 개진하였다. 75세의 노학자,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직언을 올렸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위엄이 높은 군왕 앞에서 바른말을 거침없이 주장할 수 있는 선비정신, 병인양요라는 시대가 영웅 화서를 배출했다. 뒤에 공조참판까지 벼슬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고 77세의 인생을 마친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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