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

[윤상철 칼럼] 근대적 한국인, 근대적 대한민국

입력 2023-07-31 20:03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8-01 18면

윤상철_-_기명칼럼필진.jpg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계단주의'라는 경고문을 흔하게 발견한다. 영어식 표현인 'Watch your Step!'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계단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기에 의미의 맥락은 달라진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당신의 행동에 유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이를 계단으로 해석한다면 비탈길, 젖은길, 자갈길 모두에 각각의 주의표시를 해야할 판이다. 이와 달리 물품이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점에서 '선반 주의'가 아니라 '머리 주의'라고 씌어 있는 곳들도 종종 발견된다. 다른 예로 테니스 동호인들은 자신의 공이 네트에 걸리면 "오늘따라 네트까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우리식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독특한 표현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피동적이고 방어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자유로운 행위주체로서의 근대적 개인은 없다. 자신의 행위를 구속하는 외적 요인을 강조하고 자신을 그 피해자 혹은 '을'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른바 '구조'를 개인의 행위를 제어하는 한계 혹은 개인 자유의 한계로 이해하고 인식한다. 반면 자유로운 개인과 주체적, 자발적 행위를 강조하는 미국인들은 '구조(structure)'라는 단어의 개념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개인들의 자유가 충돌하는 경계에서 자신의 행위의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어떠한 합의와 보상의 방식을 통하여 그 한계들을 돌파하는 방안을 찾는다.  


한국인 피동적이고 방어적 세계관
국가간 충돌, 외부 요인 먼저 인식


개인 혹은 국가간의 충돌 속에서 우리는 외부의 뭔가에 의한 좌절을 먼저 인식한다. 사람간의 정당한 이해갈등을 흑백논리 등을 통해 하나의 적대로 이해한다. 자본가들이 적이 되거나, 국가 혹은 국가의 현실적 구성원이 적이 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계약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근대국가는 종종 자본가, 지배세력, 기득권을 보호하는 적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한 통일운동가이자 종교인은 '벽도 밀면 길이 된다'는 말로 분단의 장벽을 넘고자 했다. 이후 대통령을 꿈꾸던 한 정치인은 '벽도 밀면 문이 된다'는 말로 자신의 포부를 펼쳤지만 그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이들이 '벽이 있으면 문을 찾아라'고 했다면 스스로가 만든 벽에 갖히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근대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의 결사체로서 그들을 묶어주는 자기정체성을 가진다.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행위의 결과이고 그들의 자기실현이기도 하다. 국가는 공동체로서의 자기실현이자 개인들의 성공과 실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성공과 실현은 많은 실패와 좌절을 안고 있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좌절된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새로운 국가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조선 인민들의 삶을 기화시킨다. '친일세력과 야합한 독재체제'는 사회주의체제로 기울던 변방의 국가를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수립'으로 이끌어 오늘의 성공적인 나라를 만들어낸 역사를 부정한다. '군부권위주의와 노동인권을 압살한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세계 최고의 빈국을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이끈 경제발전'의 성취를 위축시킨다. 반면 '쓰레기통의 장미처럼 사회로부터의 성공적인 민주화'는 그 주역인 사회운동세력의 권력과 자기이익 추구에 의해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역설을 낳고 있다.

'일제에 좌절된 대한제국 근대화'
절치부심했던 조선인민들 삶 기화
자기실현의 역사, 국가지속성 담보


미국 법원은 전쟁포로수용소 피해자였던 미군 병사가 일본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각하면서 '원고가 받아야 할 충분한 보상은 앞으로 올 평화와 교환됐다'고 판결한 바 있다. 우리는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인민의 헌신의 역사를 제국주의 국가 혹은 우리 국가에 의해 약탈당한 피해의 역사로 둔갑시켰다. 이 국가를 만들어낸 공헌에 대한 정신적 찬양을 그 과정에서 받은 피해와 노력에 대한 물질적 보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근대국가의 한국인들은 이 역사적 공동체를 위해 모든 이들이 헌신했고 그들 자신의 실현으로 이 나라를 만들어 내었다. 그 다면적 성취가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헌신으로 이 나라의 역사를 협애화한다. 지금 한국은 그러한 한국인들의 주체적 자기실현의 역사를 그 대상도 불명확한 자기 실패의 역사로 변형시키고 있다. 성공과 자기실현이 사라진, 그럼으로써 주체로서의 자기공간이 사라진 실패와 억압의 역사는 결코 한 국가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