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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안산 '터미산성'

6C 축조 성태산성과 3㎞거리

치열했던 삼국시대 역사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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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산성의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돌. /원일중 제공

통일신라때까지 사용된것으로 추정
인근명칭 '둔터' 군사 주둔했던 흔적
발견후 방치·훼손… 보존대책 시급


지난 2000년 3월 안산시 반월동에서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태산성이 발견되고 얼마 뒤 동쪽으로 3㎞ 정도 떨어진, 반월저수지를 끼고 있는 터미산 중턱에서 같은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이 발견됐습니다.

성태산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세력을 넓히던 6세기 중반에서 후반경에 축조돼 통일신라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터미산성도 그 성태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시기는 해안가의 주요 지점과 교통로에 산성들이 있는데, 안산 일대는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교통의 요지이자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인접해 접전을 치른 곳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산성을 축조한 것이라 추정됩니다.

터미산성이 성곽임을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산성 북쪽으로 반월저수지 인근 지역 명칭이 '둔터'라는 것입니다.

둔터는 '군사가 주둔했던 터'라는 뜻으로 이곳에 둔전(屯田)이 있었다는 것이죠. 군사들이 주변 어딘가에 주둔하면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다는 것으로, 아마도 성태산성이나 터미산성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농사를 지은 농토가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곳은 오래전부터 수원에서 안산을 거쳐 인천과 강화지방을 가거나, 인천과 안산에서 수원지역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유일한 육로였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군사들의 이동 경로와도 같은 의미로 해석되니 중요한 이동 경로에 성을 쌓아 요충지로 삼았다는 뜻이겠죠?

이렇듯 안산은 치열했던 삼국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역사를 온전히 지키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터미산성은 발견된 이후 아무런 학술적인 조사와 지표조사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성벽도 훼손돼 가고 있어 시급히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전 터미산성에 주둔했던 병사는 분명 이곳 출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던 병사들은 무거운 돌을 들고 산에 올라 성을 쌓고, 성벽에 올라 성을 지켰으며,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가 없는 기간에는 둔터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며,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모두가 소망하는 세상입니다. 평화를 바라는 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의 옛 흔적들을 찾아 그곳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신대광 원일중학교 수석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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