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군과 인천·(2)한반도 운명 바꾼 3번의 상륙]침략 - 점령 - 희생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7-12-01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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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교전 신미양요 '살육과 약탈'
해방 직후 인천항 통해 총독부행
日서 통치권 인수과정 '한국 소외'
6·25 전쟁땐 '인천상륙작전' 무대
전세 뒤집었지만 도시는 '초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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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한반도 최초 상륙지는 인천 강화다. 1871년, 미군은 강화도에 상륙해 상대가 되지 않는 조선군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였다. 신미양요다.

그 70여년 뒤인 해방직후 인천항,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미군이 전개한 3번의 '인천 상륙'은 그때그때 목적을 달리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마다 한반도의 운명은 춤을 추었다.

미군의 첫 한반도 상륙의 목적은 '침략'이었다. 1871년 4월 14일(음력)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손돌목 해역으로 들어온 미군 함대와 조선군이 교전을 벌였다. 열흘 뒤인 4월 23일, 미군은 군함과 최정예 해병대를 이끌고 초지진 상륙을 시도했고, 덕진진과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

미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사흘 동안 어재연(1823~1871)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군이 전사했고, 민가는 미군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됐다.

한국과 미국의 역사상 첫 교전이자 유일한 교전인 신미양요는 이같이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미군은 신미양요 수년 전에 일어난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침몰사건'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문호개방을 위한 군사적 위협이었다.

강화도는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다. 강화를 비롯한 인천 앞바다가 서구열강과의 전장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이끈 미군은 인천항을 통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한반도에 진주해 북위 38도선 남쪽 지역을 '점령'했다. 해방 후 미군의 인천항 상륙 과정을 살펴보면,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시각이 드러난다.

상륙 당일에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에 나온 군중에게 일본 경찰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인천지역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인물인 권평근(1900~1945) 등 2명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들을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미군 상륙에 앞서 몽양 여운형(1886∼1947)을 비롯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의 면담요청을 거부한 하지 중장은 상륙 이튿날인 9월 9일 서울에 있는 일본 총독부로 곧장 향했다.

이날 일본으로부터 한반도의 38도선 남쪽지역을 넘겨받는 조인식을 가졌다. 일제강점이 공식적으로 끝난 이날 조인식에선 미군정의 개막을 알리는 미국 국가가 울려 퍼졌다. 한국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9월 15일 '구원'을 기치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불리했던 한국전쟁의 초반 전세를 역전했다. 구국의 상륙작전 성공에는 인천의 희생이 뒤따랐다.

아군과 적군의 포격전으로 인천 도심은 초토화됐다. 미군이 상륙 전 사전정지작업을 위해 월미도에 퍼부은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이 숨지거나 크게 다쳤다. 인천항 등 주요 도시기반시설과 수많은 민가가 폭격을 맞아 박살이 났고, 산은 깎이고 벌거숭이가 됐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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