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오클라호마의 돌개바람

우리나라 산지 많은탓에돌개바람을 키울순 없지만홍수·가뭄등 기후재난에 취약올해도 어김없이 이상기후 징후더 늦기전에 '재난·안전관리'정치 중심으로 떠올라야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과 그 위 파란하늘에 피어오른 흰 뭉게구름. 오클라호마 지역의 평화스러운 5월 모습이다. 그러나 이 구름색깔이 검게 변하고 지평선과 맞닿으면서 깔때기 모양으로 변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시속 500여킬로미터의 믿을 수 없는 속도의 돌개바람은 광란의 재앙이 되어 단숨에 모든 것을 쓸어간다. 토네이도라는 것이다. 오클라호마에서는 올해 5월에만 두 차례의 토네이도로 6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여러 개의 마을이 초토화 되었다. 히로시마 원폭의 600여배가 되는 위력이었다고 한다.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기술의 진보에 오만해져 있는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는 자연의 위력이다.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피해를 일으킨 토네이도가 없었다. 산지가 많은 탓에 돌개바람을 키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지가 많은 것이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이고 종심이 짧은 반도의 형태라서 홍수와 가뭄 등 기후재난에 대단히 취약하다. 특히 여름철에 집중된 강우는 일시에 많은 양의 물이 급경사를 따라 쏟아져 내려와서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키고, 비가 적은 계절에는 물이 부족하다. 농경시대에 치산치수를 왕도의 중심으로 삼았던 이유다.올해도 어김없이 이상기후의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기후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겪은 겨울철의 혹한은 여름철의 혹서를 예고하고 있다. 태풍, 호우 등 기후재난은 절대적으로 기온과 바닷물 온도의 변화에 좌우된다. 특히 태풍은 높은 해수온도에서 급속하게 성장한다. 이론적으로 해수면 온도 1℃ 상승시 태풍의 최대풍속은 5%가 증가된다고 한다. 지난 30년간 평균 해수면 온도가 0.5℃ 가량 상승했으며 이에 따른 최대풍속 증가는 3% 정도이고 태풍의 잠재강도는 대략 10% 증가되었다고 한다. 태풍 1개가 원자폭탄 1만개에 해당하는 위력이라고 할 때 10% 증가는 100개의 원폭이 더 폭발하는 위력인 것이다.실제로 지난 1960년대 후반부터 지구의 평균온도는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난 한 세기동안 우리나라의 평균온도상승은 세계평균의 2배에 달하고 한반도 주변 해수면 온도의 증가도 아주 높은 편에 속한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기후재난의 강도는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에 내습한 태풍의 순간최대풍속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2000년을 전후해서 분포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도시가 위험하다.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의 강도가 급격하게 커지기 전까지만 해도 도시는 비교적 안전했다. 큰비로 제방이 터지고 마을이 물에 잠기는 곳은 하천정비가 안되고 하수도 시설이 미비한 비도시 지역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호우의 양과 강도는 기존의 집배수시설의 용량을 크게 넘어섰고, 게다가 녹지와 습지를 대체한 건물과 포장노면은 강우의 대부분을 일시에 낮은 곳으로 쏟아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도시가 물에 잠기면 그 피해는 크다. 많은 사람과 비싼 시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마비는 경제를 위축시키고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크게 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국토의 골간이 되는 주요 강이 정비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도시의 배수시설과 저수시설을 확충한다 해도 넘치는 물을 처리할 강이 부실하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도시를 재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돈과 좋은 방법, 그리고 세월이 필요하지만 특히 필요한 것은 정부의 결단과 시민의 뒷받침이다. 왜냐하면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투자와 조처이지만 재난에 대한 경각심은 당할 때 뿐이기 때문이다.우리의 도시들은 과연 이 강력한 이상 징후에 대비하고 있는가? 기후변화 시대, 더 늦기 전에 재난 및 안전관리가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라야 한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6-23 박연수

추모(追慕)와 위령(慰靈)의 문화를 다시 생각한다

국가위해 목숨바친 영혼들을추모 하는건 국민의 도리이고국가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위령 하는건 국가의 의무이다추모 문화보다 평화의 문화를위령 문화보다 사랑과 자비를오뉴월은 전 국민적으로 죽은 자를 기억하는 시기이다. 살아있는 우리가 그 삶과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국민이 유난히 많이 저 세상으로 간 때가 그 즈음이다. 무엇보다 5·18과 6·25는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숫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숫자 속에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기억 속에 뼈저린 아픔과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서려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죽임을 그 숫자는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언제나 그러했듯이 올해도 그 숫자를 생생한 역사로 만든 무덤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 앞에 꽃을 놓거나 심기도 했고, 술과 음식을 진설하기도 했으며, 절을 하며 울기도 했을 것이다. 안타깝고 서러운 심정에 선뜻 돌아서지 못한 채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부모와 형제자매, 일가친척들, 그들이 모두 우리의 국민이다.국가적으로도 그 무덤의 주인들을 추모하고 위령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죽은 '국가유공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민주화 유공자' 등 희생자들이다. 전자는 '국립 OO현충원' 혹은 '국립 OO호국원'에 안장되어 있고, 당사자나 가족이 관련 법률에 따라 예우와 지원을 받는다. 후자는 '국립 OO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당사자와 가족이 예우와 명예회복, 보상을 받는다.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국가와 국민이 예우하고 그 가족을 지원하는 일은 마땅하다. 국민 모두가 그 은혜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현양하고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국가의 모든 의식에서 '애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행하고, 도처에 추모시설을 설치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그래도 그분들의 죽음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국가를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의 길을 가야 했지만, 그래서 그 죽음이 고결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한 죽음마저 없길 바랄 것이다. 가족과 친구도 그 죽음을 슬프고 애달프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국민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국민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고 애국심을 함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희생이 필요 없는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훌륭하고 용감한 군인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그러한 군인마저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국가가 더 좋은 국가가 아닌가.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거나 희생당한 사람들에게는 응당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분들에게 명예회복은 물론 그 가족에게 피해를 보상하고 최대한의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민주화를 위해, 독재에 저항하다가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민주 유공자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위령탑을 세우고 위령시설을 건축하며 위령 사업을 지원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는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국민도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가 가장 중시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국민이 억울하게 죽지 않는 국가가 더 좋은 국가가 아닌가.물론 국가를 위해 죽거나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국민이 전혀 없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죽음과 죽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모와 위령의 문화가 횡행하는 국가와 사회에서 국민들은 마냥 편안할 수 없다. 검은 옷 입은 정치인들이 국립묘지에서 추모의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고 행복감을 느낄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령제를 지내는 종교인들의 기원과 발원도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도록, 그래서 더 이상 추모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정치인이 참된 정치인일 것이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위령을 필요로 하는 억울한 영혼이 없는 세상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일상으로 하는 종교인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013-06-16 류성민

벼슬자리 청탁과 백제 목간

예나 지금이나 정권이 바뀔땐벼슬자리 청탁·인사추천 심해참 말도 많고 탈도 많다투명하고 공정하게 할순 없을까청탁할땐 몰래 했다고 하지만결국 몇천년후 다 밝혀지는것을흔히 우리가 벼슬이라 일컫는 관직은 인간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쳐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특히 벼슬에 나가고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출세의 기준으로 여기는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보다 좋은 벼슬자리를 갖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안간힘을 다했다. 스스로 노력하여 자신의 실력으로 다행히 원하는 벼슬자리를 얻는 것은 능력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자신을 알아달라고 선전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에게 힘을 빌리고 도움을 요청한다. 취직이나 승진, 전직 등 벼슬자리를 부탁하는 인사 청탁은 그 종류와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 물론 벼슬자리 청탁은 아주 오래 전에도 있었다.지난 5월 25일 '문문'(문헌과 문물) 학술대회에서 백제시대 벼슬자리 청탁의 실례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글이 발표되었다. 부여 구아리 319 유적에서 출토된 13점 목간 중에서 442번 목간에 적힌 묵서의 내용이 그것이다.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그 사용이 용이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 흔히 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목독) 또는 대나무 조각(죽간)에 썼으며, 이것들을 통칭하여 목간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죽간이 보다 많이 발견되었고, 일본에서는 목간이 많이 발견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목간이 소량 확인되었다. 그러나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당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442번 목간에는 글자가 앞면에 12자, 뒷면에 20자가 쓰여 있다. 물론 이것이 쓰인 시기가 워낙 오래된 까닭에 글자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아 정확한 판독과 해석은 어려움이 있으나, 그런 대로 대강은 이해할 수 있다. 발굴자 심상육의 발표에 따르면 그 내용은 "보내주신 편지 삼가 욕되게 하였나이다. 이곳에 있는 이 몸은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주십시오.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나이다"라고 한다.이 목간을 보낸 이와 받는 사람의 이름이나 호칭이 적혀 있지 않다. 보낸 곳과 받은 곳도 날짜도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 있는 누가 보낸 것이고 또 누가 받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출토된 곳이 부여이고 이곳이 백제 후기의 도성인 사비성인 만큼 약간의 추측은 해 볼 수 있다.이것은 벼슬자리를 청탁한 편지 성격의 글이다. 첫 문장을 보건대 사비성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구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리하여 편지를 받은 사람은 보낸 이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는 수고를 끼쳤다고 의례적인 사과를 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가 목간이 발견된 사비성 안에 거주하는 지체 높은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고 다시 그에게 답신으로 작성한 것임을 추측케 한다.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누군가가 사비성 안의 사람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하는 글을 보냈고, 이에 받은 사람이 편지를 보내 무언가를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이에 청탁한 사람은 자신은 가난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좋고 나쁜 것에 화를 내지 말아 달라. 당신으로부터 입은 어떤 음덕이라도 뒷날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하는 내용이다.이것은 이른바 칭념형 서간문으로, 자신이 바라는 목적과 생각을 편지글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벼슬자리를 갖고자 하는데 도와달라는 청탁이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과연 벼슬자리를 얻었을까? 또 편지를 받은 사람은 벼슬자리를 만들어 주었을까? 못내 궁금하다. 아마 백제시대에 이 목간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몰래 보관했을 것이다. 그런데 약 1천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발굴자에 의해 드러나고 말았다. 목간을 주고받은 인물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이것이 벼슬 추천의 실제이건, 아니면 인사 청탁의 비리건 백제시대 사회생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옛날이나 지금이나 벼슬자리 청탁, 인사 추천은 참 말도 말고 탈도 많다. 정권이 바뀔 때면 더욱 그러하다. 좀 투명하고 명확한 자료에 의해 공정하게 추천하고 부탁할 수는 없을까? 설사 청탁할 때는 몰래 했다고 하지만. 이 목간을 보세요. 몇 천 년 뒤에도 밝혀지는 걸!/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2013-06-10 김창겸

대통령의 취임 100일

보여주기식 일회성 이벤트포장대통령 기자회견 꼭 할 필요없어부족하면 부족한 대로의미 있는건 의미있는 대로국민과 진솔하게 마주할때소통에 성공한것 아닐까내일이 박근혜 대통령 취임 100일이 되는 날이다.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 처음 100일은 여러 모로 상징성을 갖는다. 인수위 시절 다듬었던 국정 청사진의 대강(大綱)을 선보이고, 정부 직제의 확정과 내각과 청와대 인사 등을 통하여 임기 동안의 이념적 지향과 국정 추진의 밑그림을 확정하는 기간이다. 야당도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언론과 국민도 차분히 새 정부의 지향을 지켜본다. 각종 개혁 정책의 기반도 이때 다져놓지 않으면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 100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통해서 임기 초의 국정성과를 설명하고, 향후 정책과 국정운영에 대한 청사진을 밝혔던 이유이다. 따라서 취임초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율은 선거때의 득표율을 상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100일의 지지율은 대체로 50%를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기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보다는 낮지만,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100일은 상징성 있는 정책이나 특징적인 산출이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에서 개혁과 사정이란 단어를 쉽게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역대 대통령들과 대조를 이룬다. 정부직제개편이 늦어졌고, 각종 인사의 난맥이 취임초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았다. 윤창중 사건같은 대형 악재는 인사 실패의 상징이 되었고, 지지율 하락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한미정상회담은 성공적이라는 평이 지배적이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한 안보 위기의 무난한 관리는 급전직하했던 지지율을 50%이상으로 끌어올렸다.관례적으로 해오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이 시대 정치의 화두는 소통이다. 인수위 시절, 언론과의 '불필요한' 접촉에 대해 유난히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하며,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특종도 낙종도 없다'식의 불통 이미지 등은 국민과의 소통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윤창중 사건때의 청와대 참모들의 '부적절한' 사과 이후에 나타난 대통령의 반응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때의 사과 발언이었다. 대국민성명이나 담화, 기자회견을 통한 진솔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제3자적 관점에서의 사과가 얼마나 국민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을까.'박근혜 스타일'은 '보여주기식 이벤트'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미래창조과학부 주최로 창조경제 비전 선포식이 박 대통령 지시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벤트 성격이 강하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 때문이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아직도 창조경제 개념의 애매모호성이 지적되고 있는 마당에 비전선포식의 의미를 크게 두기는 어렵다. 일회성 이벤트로 포장된 포퓰리즘적 행사가 진정성을 상실하고, 정치적 상징 조작에만 치우친 예는 많다. 과거 정권때 '국민과의 대화'가 대표적이다. 김영삼 정권때의 '신한국인', 김대중 취임 초의 '신지식인' 등도 알맹이 없는 보여주기식 이미지 창출에 다름없다.그러나 일회성 이벤트와 국민과의 부단한 소통의 시도는 구분되어야 한다. 취임 100일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여하히 부여하느냐가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보여주기식 이벤트'로 보느냐, 국민과의 소통으로 보느냐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소통은 단순히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 1조 1항과 2항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위임한 권력의 지출과 수입의 명세를 주인에게 보고하는 것은 소통의 차원을 넘는 의무이다. 기자회견에 인색한 대통령이 될 필요는 없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의미있는 것은 또한 그것대로 진솔하게 국민과 마주할 때 소통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평론가

2013-06-03 최창렬

우리 사회가 싫어하는 것은 '오만함'이다

가진 자의 오만함과황폐한 기업문화에최근 공분하고 있는 한국갑의 횡포에는 분노하면서오만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지우리는 되돌아 보아야한다미국사회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실수는 용납해도 거짓말은 관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이 나면 두고두고 싸늘한 시선이 따라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재기의 기회는 사정없이 박탈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막가는 사람도 거짓말을 조심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미국이 되는데 중요한 신뢰라는 날실이 형성되었다.최근 우리 사회가 특정한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있다. 이른바 가진 자의 오만에 대하여 싸늘한 시선을 넘어서는 공분과 무관용의 현상이다. 대기업 계열사 임원의 여승무원에 대한 도를 넘은 인격무시에 참지 못한 시민들의 반발로부터 시작된 이 현상은 중소 베이커리 업주의 안하무인을 준열하게 꾸짖고 급기야 슈퍼 갑의 지위에 기댄 어느 분유회사 영업사원의 횡포에 분노하고 있다.이 현상은 특정인의 행동의 잘못됨을 징치하는 것 같지만, 실은 현재 우리사회가 가진 자 또는 우월적 지위(갑)에 있는 사람이 약자 또는 열등한 입장(을)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억압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이를 못견뎌하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개 소속원에 불과한 당사자의 그 잘못된 행위를 들어 대기업의 인식과 행태를 비판하고 대기업이 아니라도 가진 자의 오만함과 그 오만함에 기초한 황폐한 기업문화를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자존심에 유달리 민감한 민족이다. 일제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무단통치아래서도 온 국민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존을 해칠수록, 오만함이 더할수록 그리고 억누름이 강할수록 참지 못하는 것이다.그러나 갑과 을의 관계는 경우에 따라 변한다. 을의 입장에서 고통받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갑의 위치가 되기도 하는 일이 다반사다. 또한 갑과 을의 관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경우 외에도 힘 있는 자와 약한 자, 기득권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젊은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많은 경우에서 그렇다. 행여 남의 오만함에는 분노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오만함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지 신랄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자기보다 약자라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무시하고 무례하며 경우에 맞지 않는 것도 감수하기를 요구하면서 강자를 인정하지도 않는 잘못된 자존심, 아전인수식 자존심으로 뭉쳐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지난 해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리틀싸이'라는 애칭을 얻은 8세의 어린이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온당치 못한 언어폭력을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중문화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쾌거이자 국민적 자존심을 높여준 그 작품속의 천진난만한 어린이에게까지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뿌리 깊은 오만함이자 천민의식의 발로로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강남스타일'에 열광했던 베트남 사람들이 느낄 분노의 대상은 몇몇 온당치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이 될 것이고 그 분노의 크기는 또 얼마나 클 것인지 우려스럽다. 국제적으로도 다문화 시대에 살면서 인종과 출신국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오만함을 탓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이 기회에 우리 한국사회는 오만함을 관용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스스로 오만함을 경계하는 사회풍토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몸에 배고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밝고 훈훈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문화국민으로서의 가치 있는 번영을 구가해가는 인간적인 대한민국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제안한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5-27 박연수

神들의 전성시대… 어떤 신을 믿을까?

부자되게 해달라고 기원하고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빌고…나와 당신이 생각하고 믿는신은 항상 누군가의 신이다우리가 신을 바라보는 눈이곧 신이 우리를 보는 눈이기에프랑스의 천재 작가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3부작 소설 '신'이 모두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었다. 신이 되고자 하는 후보생들의 치열한 분투와 경쟁이 무수한 신화와 종교의 이야기와 접목되면서 흥미진진한 판타지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아마도 신이 되고픈, 아니 최소한의 신적인 능력이라도 갖길 바라는 인간의 끊임없는 열망과 그 좌절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직장의 신'이란 드라마가 공중파 TV에서 방영되고 있다. 직장에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해대는 주인공은 '신'이라 칭해진다. '경영의 신', '공부의 신', '게임의 신' 등등 온갖 '신들'도 회자된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을 그렇게 '신'이라 부르곤 한다. 그런 '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픈 우리의 소망은 온갖 신들을 만들어내어 추앙한다.인도에는 3억3천의 신들이 있다고 한다. 창조의 신도 있고 창조한 것을 보존하고 유지토록 하는 신도 있으며 그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신도 있다. 전쟁의 신이 있는가 하면 평화의 신도 있고, 사랑의 신이 있는가 하면 증오의 신도 있다. 직업마다 그 직업을 관장하는 신도 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신들을 대하며 산다고 한다. 그래서 신들은 인도인들의 애환과 성패를 좌우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신들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여서 사람들은 늘 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기원한다. 사랑과 성공도, 건강과 행복도, 그리고 죽은 후의 환생이나 환생을 하지 않는 영원한 저세상도 신을 향한 사람들의 기원이다.오직 하나의 신만 있다고 믿는 종교인들도 있고, 신들 사이에 최고신을 정점에 두고 무수한 신들의 서열을 정하여 신전을 만든 판테온(Pantheon, 萬神殿)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도 있고,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하여간 사람들은 신을 믿고 경배하면서 자신들의 소망을 간청한다.우리가 자유를 빼앗겨서 노예처럼 살아가게 될 때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나 불치의 병으로 고통과 고난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신께 용기와 지혜를 구한다. 피할 수 없는 가난에 허덕이게 될 때 신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신자가 있겠는가!영원히 죽지 않게 해달라고, 아니 적어도 150살 정도는 살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청한다면 어떨까? 거액이 걸린 복권을 사면서 당첨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도 신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우리와 같은 조건에 있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도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 운동 경기를 하면서 자신들보다 뛰어난 상대편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신이 들어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그런데 만일 우리가 신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과 같은 능력을 조금이라도 갖게 된다면 그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보통사람들로부터 신이라 불리게 될 정도라면 그 재능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까? 누구의 기도를 들어줄 것인가? 어떤 기원을 풀어줄까? 어떤 일에 신적인 재능을 쓸까?그렇다. 신은 항상 누군가의 신이다. 내가 생각하고 믿는 신은 나의 신이고 당신이 생각하고 믿는 신은 당신의 신이다. 우리가 신에게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면 우리가 믿는 신은 부자의 신이다.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신께 빌면 우리는 해방의 신을 믿는 것이다. 신에 대한 우리의 기원이 우리가 믿는 신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바라보는 눈이 곧 신이 우리를 보는 눈이다./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013-05-19 류성민

신라 해적의 일본 침입과 동아시아 인구이동

9세기 신라·당·일본서 발생한많은 유이민은 동아시아를혼란속으로 몰아갔고인구이동은 3국에 심각했지만인적·물적 교류로써 상호작용東亞 변화발전의 요인이었다9세기 중국의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은 다함께 혼란에 빠졌다. 그 현상의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해적의 극성과 인구 이동을 들 수 있다. 신라 역시 정치사회 변동으로 많은 유이민이 발생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해외로 이동하였다.특히 바다 건너 일본 서부 연안으로 진출한 많은 신라인의 잦은 출현을 일본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일본에 나타난 신라인의 모습은 오랜 표류와 굶주림에 지쳐 처참하였다. 게다가 자신을 지키고자 무장을 하고, 많은 수가 무리를 지어 활동하였으며, 때로는 연안지역에 불법 상륙하여 노략질하거나 공물을 약탈하는 해적집단 모습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마도와 일본 대재부를 비롯한 서부지역 관민이 공격을 받아 다치거나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다.일본 역사서에는 신라인들이 일본의 풍속과 교화를 흠모하여 자발적으로 귀화하였고 일본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돌려보냈다는 식으로 자국 우월에 입각하여 기술된 것이 보인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일본에 간 이유와 배경은 일본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측에 더 있었다. 물론 단순한 표류의 경우는 태풍과 폭우 등 자연재해가 이유이다. 그리고 상인들은 부의 획득 대상지로 일본을 선택하였다. 반면에 피난민이나 범죄자, 유망민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일본으로 진출한 것이다. 이 경우 신라인들은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세계를 찾아 나선 생존투쟁이었다.이렇게 출몰하는 신라인들이 많아지고 빈도가 잦아짐에 일본에서는 이것을 신라인의 침공이라 여기고 공포감이 조성되어 심각한 정치사회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다양한 대비가 있었다. 처음엔 단순 표류인으로 보고 귀국조치하거나 귀화인으로 받아들여 안치하였다. 그러나 869년에 발생한 신라 해적의 공물 약탈사건을 전후하여 그 반응과 대책은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중요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여 경계경비를 한층 강화하였다.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는 신라인의 출몰과 약탈행위에 불안해진 분위기를 틈타 조만간 신라의 침공이 있다거나, 신라인과 연계한 반란을 도모한다고 고변하는 정치사건이 발생하는 등 매우 흉흉하였다. 게다가 신라가 침공하면 일본 대재부 관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이 내응할까 염려하여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 표착 신라인을 추방하듯이 귀국 조치하였으며, 그들의 상륙을 저지 퇴치하고 때로는 추격 체포하여 처형하였다.한편으로는 여러 신사의 신들과 사찰의 불상에가호를 빌어 막고자 노력하였다. 9세기 말에 신라 해적의 침입이 더욱 극심해지자 일본 조정은 신라 해적 토벌군을 편성하여 대대적으로 추포하였다. 그러나 신라 해적의 출몰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9세기 많은 신라인의 진출이 일본에 끼친 파급 효과는 대단히 컸다. 특히 극성스러운 신라해적의 잦은 출몰과 침공 위험은 종전 일본의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대외교류 방향을 이후 한동안 소극적이고 배타적이며 패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하였다. 한편 신라인들의 일본지역으로의 활발한 진출은 인구 이동과 함께 문물의 전파가 이루어져, 일본의 역사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요인이 되었다.일본 특수지역에 인구를 보충하고 성씨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우수한 신라 기술과 문물을 일본으로 전하는 전파자 구실을 하였다. 일본은 신라 해적선에 대응하려고 신라의 우수한 건조술을 배웠다. 또 신라 병기의 제작기술을 습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신라인들이 이주함에 불안과 위협을 느낀 자국내 일본인들의 유망을 방지하면서, 신라인 침공에 대비해 해안지역에 축성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침공을 불교의 힘을 이용하여 막고자 하여 사찰의 신축이 있었다.결국 9세기 신라와 당, 일본에서 발생한 많은 유이민은 동아시아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이것은 연계 작용하였다. 간혹 해적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신라와 당과 일본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지역간 인적 물적 교류로써 상호 작용하였고, 당시 동아시아의 변화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었다./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2013-05-13 김창겸

건강한 야당

국민들의 관심은 정치권내부정치적 이해득실 계산에 의한볼썽사나운 이합집산이 아니라실질적인 이익을 반영하고갈등을 표출해서 집약하는새로운 정당체제 개편이다대의민주주의는 정당정치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정당의 기율이 다르고, 태생적 차이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현대정치의 경향 중 뚜렷한 흐름 중 하나가 정당정치의 퇴조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 정당을 빼고 정치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당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고, 국민의 이익을 표출, 집약함으로써 정책을 수립한다는 정당이론의 원론적 측면과 시민사회의 균열을 조직화 해야 한다는 당위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정당의 역할은 그래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 정당이 위기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당정치의 위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책임성이다. 정책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고, 국민의 대표로서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에 대해 반응하고 설명해야 할 의무이다. 정당정치를 책임정치라 하는 이유이다.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이 확립되고 난 이후, 역대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제외하곤 임기말에 예외없이 자신이 속한 집권당에서 탈당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비중의 차이는 있으나, 후보자 요인과 정당지지가 결합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정치적 관점이다. 그러나 자신을 공천한 정당을 탈당한다는 것은 적어도 정치이론적으로 볼 때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현실정치에서 예외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정치관행은 한국정치에서 책임정치가 실종되는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모습이다. 대통령의 임기 초에 집권당이 청와대의 위세에 눌려 정당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에 소홀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임기초 대선 패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정당의 모습도 여전하다. 국민의 선택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기는 대통령이나 헌법 기관인 국회의원들이나 같은 무게로 인식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제왕적 대통령'의 수사를 달고 다니는 한국의 대통령제는 정당마저 위축시키고 있다.제1야당인 민주당이 김한길 의원을 새 대표로 선출하고, 4명의 최고위원과 함께 단일성 집단지도체제의 닻을 올렸다. 대선 패배의 여진이 강력하게 남아있고, 당내의 폐쇄적이고 기득권에 집착하는 계파가 적대적으로 존재하는 민주당을 여하히 환골탈태(換骨奪胎)할 것인가가 민주당의 새 지도부에게 주어진 임무다. 김한길 대표는 상향식 공천을 도입할 것과 당원들의 정당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비주류로 분류되는 김한길 의원의 대표 선출은 친노를 중심으로 하는 범주류가 강력히 존재해도 대선패배에 친노가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이것이 당심이다.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나타난 민심과 당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127석은 결코 적은 의석이 아니다. 비록 최근의 4·24 재보궐선거에서 완패했지만 더 이상 민주당은 물러설 곳이 없다. 10월의 재보선에서도 현재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민주당은 당의 간판을 내려야 한다. 이번 전대가 기사회생할 수 있는 모멘텀으로 기능하지 않으면 야권의 지각 변동은 불가피해질 것이다. 내년의 지방선거가 야권 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의 권력구도를 바꿔 놓을 수 있다. 단순히 광역단체장과 지방의원의 당선 숫자에 의한 정치공학적 승패가 아닌, 정치권의 지형 자체가 바뀔 개연성이 크다.국민의 관심은 정치권 내부의 이합집산이 아니다. 바람직한 지각 변동은 선거 전후 나타나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 득실 계산에 의한 볼썽사나운 '헤쳐모여'가 아니라, 국민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갈등을 조직화해내서 담아내는 새로운 정당체제의 개편이다. 정치권과 항간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정치지형의 변화 담론이 '그들만의 리그'로 그쳐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10월의 재보선은 제도권 정치에 진입한 '초선 거물' 안철수와 민주당이 경쟁하는 첫 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과 '안철수 현상'은 경쟁적 협력관계에서 적대적 갈등관계로 얼마든지 전화(轉化)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무엇이든 국민들의 이해를 조직화해내지 못하고, 의미있는 갈등들을 표출해서 집약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이든, 안철수든 정치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야당이 건강해야 정치가 산다./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평론가

2013-05-06 최창렬

도시에 답이 있다

신개념 도시의 기반은'그린과 스마트'로 구성되며압축개발로 근린생활권 회복과인간중심 도시로 형성된다또한 첨단기술을 활용하면공공·개인 비용 줄이는 효과도산업혁명 이후 인구의 도시집중이 심해지면서 각국도시정책의 대세는 억제와 분산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바뀌었다. 도시는 혼잡, 과밀, 범죄, 공해라는 인식에서 도시는 국가 경쟁력이며 기회, 활력, 혁신, 문화, 효율이라는 측면으로 바뀌었다. 도시는 과다한 인구의 수용과 수많은 사회문제의 관리, 그리고 높은 효율과 생산성은 물론 융합적 창조를 가능하게 하고 개성있는 현대인에게 두루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 세계적으로 해결의 기미를 당최 보이지 않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기후변화와 중산층의 빈곤화 및 고착화로 집약된다.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의 자정능력을 훨씬 벗어난 탄소배출이 주원인이다. 탄소배출은 화석연료를 근간으로 발전되어 온 현대문명의 숙명이다. 그를 근원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멀다. 과다한 탄소배출의 원인은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에도 있다. 물질위주의 가치관은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과 그를 바탕으로 한 낭비적 생활문화를 확산해 왔다. 또한 사회환경시스템도 과다한 에너지 사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이로 인하여 에너지 비용의 가파른 상승과 함께 유한한 지구자원도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자리의 불안과 함께 높은 생활비 부담으로 중산층의 빈곤화, 고착화 현상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많이 쓰지 않을 수 없고 비싸지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 저절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그렇다면 적게 쓰고도 불편하지 않는 새로운 시스템적 해결방안은 없을까? 그리하여 적어도 새로운 에너지원이 개발될 때까지 또는 그 이후까지도 우리의 사회와 문명에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는 없는 것일까.도시에 답이 있다. '그린 어바니즘(green urbanism)'이라는 신개념 도시이다. 이 신개념 도시는 기존의 도시개발과는 다른 구도심 재생의 방법과 신도시 건설의 방법으로 구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세계적으로 신개념 도시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송도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 신개념 도시의 기반은 그린(green)과 스마트(smart)이다. 즉, 압축개발을 통한 공공녹지의 확보와 첨단기술을 활용한 안전성, 효율성, 편리성, 융합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것의 성공여부는 자동차 중심의 경관이 얼마나 바뀌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압축형 개발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근린생활권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을 수 있는 쾌적하고 안전한 녹지가 많고, 걸어서도 생활이 가능하며, 길에서 이웃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환경오염, 혼잡, 사고, 고립, 고비용 등의 문제를 지닌 자동차에 대한 의존을 과감히 떨쳐낸 인간중심의 도시를 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첨단기술이 적용되면 도시의 효율이 높아지고 공공뿐만 아니라 개인도 비용이 줄어든다. 이는 좋은 생활환경을 원하는 국제기업과 전문인들을 모이게 하고 그들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융합의 인프라 위에서 비즈니스와 기술의 활발한 교류와 발전을 경험하게 된다. 좋은 일자리가 생기는 생태계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이 신개념 도시는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대안이기도 하다. 탄소세, 탄소배출권 등의 규제를 통한 방법은 경제성장 위축, 선후진국간 형평성 문제 등으로 쉽지 않다. 탄소배출의 53%를 차지하는 자동차와 건물부문의 획기적인 절감이 없이는 이뤄지기 어렵다. 뉴욕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미국 평균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도시는 대중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압축형 도시는 이동을 최소화한다. 그린 어바니즘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근린형 생활권,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에너지 절감형 빌딩과 효율성을 높인 도시 인프라는 탄소배출저감 목표달성의 거의 유일한 길이다.관건은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4-29 박연수

창조는 자유에서 비롯된다

기존의 관행과 관습에서 벗어나자유의지에서만 변혁·혁명 가능중복게재·표절사례 논란 잇따라우리학계 연구윤리문제 '구설수'남의 것 절도행위 모든 책임져야'어설픈 창조' 자유를 모독할뿐요즘 '창조'라는 말이 각종 언론과 매체에서 자주 사용된다. 창조경제나 창조과학이란 말이 마치 한 단어처럼 쓰이더니 정부 부처에도 미래창조과학부가 생겨나기도 했다. 도대체 창조가 무엇인가? 무엇이 창조이기에 너나없이 창조를 말하는가. 말 그대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창조(創造)다. 그렇다고 신이 아닌 이상 없는 것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있는 것에 약간의 새로움을 더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창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것에 익숙하고 너무 많이 있어 걱정인 사람들에게 창조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오래 간직하고 긴요하게 이어온 전통도 창조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늘 하던 대로 살아오면서 쌓인 관습도 관행도 창조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창조는 불필요하게 여겨지게 마련이다.창조는 가져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거나 낯선 환경에서 생겨나게 마련이다. 갖고 있는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 때, 전통의 부조리함을 느낄 수 있을 때, 관행과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창조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행복을 찾아 고민하고 분투할 때 비로소 창조가 절실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에는 자유가 필수적이다. 아니 자유롭지 않으면 창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기존의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기존의 가치와 논리와 주장을 넘어서고자 하는 자유의지에서 창조는 비롯된다. 물론 모든 창조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자유가 없으면 창조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유로운 지성에서 학문의 창의가 가능하고, 자유로운 발상에서 발명이 가능하며, 자유의 갈망이 변혁과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리라.근자에 우리 학계에서 연구윤리 문제가 크게 불거져 있다. 다른 학자의 논문을 표기도 없이 인용하거나 아예 표절하기도 하고, 자신의 논문을 여러 학술지에 중복 게재하는 것 등 연구윤리 위반 사례가 드러나게 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심지어 징계를 받아 학교를 떠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한 행위들은 사실상 학문의 자유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창조적 견해에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행을 핑계 삼아도 부주의를 사과한다고 해서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되지 못한 논문은 논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창조를 자기 창조처럼 꾸미는 것은 협잡이고 도둑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자유를 포기한 사람은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위 공직자들도, 사회 저명인사들도, 심지어 연예인들까지 학위 논문의 표절이 드러나고 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학위를 반납하기도 하고 학교로부터 학위 취소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도둑질한 물건을 되돌려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학위를 받음으로 해서 얻게 된 모든 지위와 명예와 이익이 포기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로 인한 모든 피해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미국 동북부의 뉴햄프셔 주를 여행하면서 그 주에 등록한 모든 자동차 번호판에 쓰인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자유롭게 살든지 아니면 죽든지(Live Free or Die)'. 미국 독립전쟁 당시 가장 유명했던 뉴햄프셔 출신 장군이 독립 후 축배를 들면서 외친 말이었고, 후에 그 주(州)의 모토가 된 것이다. 자유를 위해, 자유로울 수 있는 독립을 위해 결사(決死)의 투쟁을 했던 정신을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이다.사실상 자유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리고 죽은 자는 창조할 수 없다. 함부로 창조를 말해서는 안 된다. 창조를 쉽게 생각하거나 어설프게 창조하려는 것은 자유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많다./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013-04-21 류성민

패강진 설치의 역사적 의미

북쪽세력 침입에 대비한특수 군사지역으로 설치된후예성강 이북지역은 한주에서떨어져나가 별도 관할 통제헌덕왕대 이후엔 패서도라는독립된 구역으로 편재오늘날 경기도 지역은 신라시대 한산주(한주)에 속했다. 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예성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발해와 서로 국경을 맞닿게 되어, 발해의 남하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고, 더구나 8세기 초반의 잦은 자연재해로 농민들의 몰락과 유망이 증가하면서 국가의 재정수입이 감소하여 새로운 지역 개척이 절실히 요구되었다.패강 이남 지역은 비교적 넓은 평야를 이루는 곡창지대였고, 또 신라국가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몰락한 농민들이 일찍부터 많이 유입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은 수취 대상의 확대, 즉 국가재정의 수입 증대와 직결되었다. 신라는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인정받음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736년 윤충 등 대신들을 파견하여 평양(한산주)과 우두주의 지세를 검찰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북방개척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748년(경덕왕 7) 대곡성(평산군) 등 14개 군현을 설치하고, 762년 멸악산맥에 인접한 오곡성 등 6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각각 태수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을 계속 전개하여 헌덕왕대에 취성군(황주)과 그에 속하였던 토산현(상원), 당암현(중화), 송현현(송현)을 더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 기록된 28개 군과 49개 현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모두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이러한 신라의 북방개척은 발해의 남진을 저지하고 패강 이남 지역을 군현으로 편제하여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는 방향에서 진행하였던 바 당연히 군현 설치와 더불어 이 지역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적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당시까지 한산주에 설치된 군사 조직들은 모두 한강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 개척한 지역을 북방세력으로부터 방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신라의 중앙정부는 781년 사신을 파견하여 패강 이남 군현의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782년(선덕왕 3) 왕이 직접 한산주를 순행하고 이 지역 백성들을 패강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패강지역에 새로운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782년 대곡성에 진을 설치하는 것으로 구체화되고, 드디어 패강진을 설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치된 군현은 모두 한(산)주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패강 이남지역까지 한산주의 영역이 확대되었다.패강진이 설치된 이후 한산주 관내에는 829년(흥덕왕 4) 화성시 남양면에 당성진을, 844년(문성왕 6) 강화도에 혈구진을, 그리고 장산곶 근처에 장구진을 설치하였다. 한산주 관내의 이들 진들은 모두 해상교통상의 요지였다. 중국에 신라 사신과 유학생, 구법승 등을 파견하거나 해상교역에서 이들 진은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거나 최종 기착지였다.신라 하대에 이르러 서해안에는 해적이 빈번하게 나타나 신라인들을 잡아가 중국에 노비로 팔거나 해상교역을 방해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 서해안의 치안상태가 불안하자 신라 정부는 안전한 해상교통을 확보하고 해상무역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들 진을 설치한 것이다. 북쪽 세력의 침입에 대비한 특수 군사지역으로 패강진이 설치된 후에는 예성강 이북지역은 한주에서 떨어져나가 별도로 관할, 통제되었다. 헌덕왕대 이후에는 패서도라는 독립된 구역으로 편재되었다. 그 결과 한주는 관할 영역이 675년(문무왕 15) 단계의 범위로 축소되었고, 이것이 뒷날에 행정구역 황해도와 경계선의 기초가 된 것으로 보겠다.한편 9세기 후반에 패강진의 장관은 군사적으로 관할하던 지역의 민정권도 함께 갖게 되었다. 더욱이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지방 통치체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패강진 군관들은 진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막강한 지방세력가로 변하였다. 왕건 집안이 혈구진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호족으로 발전하였듯이, 패강진 지역에서 성장한 군진세력들이 고려 건국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2013-04-14 김창겸

헌법 제1조 제2항

수평적 리더십에 대한 이해와거버넌스에 대한 천착,사회와의 소통이 전제됐다면'17초 대독 사과'는 없었을것새정부는 '주권은 국민에게,국민이 주인'이란것 명심해야새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40일 남짓, 너무 어수선하다. 한국 대통령제의 구조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임기말 측근비리가 없는데도 임기초인지, 임기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단순히 새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낮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지도는 오를 수 있다. 임기초의 과도한 지지율 상승이, 지지율의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레임덕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정권 출범 초기의 낮은 지지율이 오히려 국정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역설을 설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설적 형식 논리는 안일해 보인다. 아직도 박근혜 정부의 일부 부처 장관은 인사청문회 이후 임명 여부가 불투명하다. 한미와 북한과의 긴장 국면은 적절히 관리되고 있는 건지, 심각한 위기 국면인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집권세력 내부의 권력게임이나 야당의 계파 갈등의 정도가 설령 높더라도, 한국 정치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할 수 있다. 유례없이 강도 높은 부동산 활성화 대책과 추경을 둘러싼 여야의 논점의 차이는 조율하면 된다. 문제는 한국 정치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 정치행위자 중 여전히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청와대 권력의 인식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17초 대독 사과'는 아직도 청와대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으나, 만에 하나 임기초의 정치적 부담때문이라고 백번 양보한다 해도 청와대의 인사실패와 소통 부재에 대해 보인 청와대의 '17초 대독 사과'는 민심의 소재에 대한 몰이해와 인식 부재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굳이 진정성을 거론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국민에 대한 예의 부족 등의 평가는 또 얼마나 부질없는가. 대독을 시킨 허태열 비서실장이나 이를 대독한 김행 대변인 모두 국정 최고지도자를 보좌할 참모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인사들이다. 지시를 받아도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어야 대변인이다.국내외적으로 위기가 중첩되어 다가올 때가 있다. 정치가 문제해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해도, 시민사회의 능력이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압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 2항은 실질적인 권력 현상 구현의 추동세력인 집권세력의 인식 여하에 따라 형해화, 사문화될 수 있고, 상당 부분 생활정치에서 구현될 수도 있다.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여당과 청와대 수석들을 비롯한 참모들의 역할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권을 창출한 구체적 정치 주체는 정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승리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후보자 요인도 중요했겠지만, 정당의 공천도 유권자 선택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정당정치의 설 땅이 좁아져도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정권을 재창출한 새누리당의 왜소한 모습과 상대적으로 강해 보이는 청와대 권력은 지극히 비대칭적이다.당·정·청 워크숍에서 인사실패에 대한 여러 비판이 나왔으나, 당청관계가 건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당과 청와대, 정부는 각각이 집권세력의 한 축이다. 상호 긴장과 협력 관계가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물론 견제와 비판은 기본이다. 대통령제의 원리인 삼권간의 견제와 균형 이전에 관철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현재의 집권세력의 내부는 청와대의 우위가 압도적이다. 지나친 권력의 편중은 생산적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 없으며, 위기해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현재는 분명 위기국면이다. 안보위기는 물론이고, 경제불안, 사회적 원심력의 증가, 기대와 좌절의 교차, 이를 해결할 정치의 왜소 등 중첩된 층위가 교차하고 있는 상황이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수사와 정치공학적 언술이었는지 통합과 대탕평을 입에 올리는 것은 어딘지 쑥스럽다.아직 임기초다. 어수선하지만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한국사회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해결 능력이 작동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평적 리더십에 대한 이해, 거버넌스에 대한 천착,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와의 소통이다. 그랬다면 '17초 대독 사과'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행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헌법 제1조 제2항을 곱씹어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평론가

2013-04-07 최창렬

고용 없는 성장, 방법은 없는가

GDP대비 고용창출력 비중 큰금융등 생산자서비스 부문과복지등 사회서비스업 발전시켜일자리 획기적으로 늘리고정부는 관련 규제완화와필요규범 정립위해 적극 나서야교정 한 편에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내밀었다. 무채색의 겨울 풍경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봄이 시작되었다. 학창시절은 인생의 봄이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에게서 봄이 발산하는 생기발랄함은 찾기 힘들다. 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다. 취직이 안 되어 걱정이 많은가 하고. 아니란다. 무엇이 걱정인가. 그들은 벌써부터 지킬 것이 많다.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편리함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데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이제 갓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큰 부담인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벌써부터 경쟁에 지쳐있다.그런데 부모의 그늘을 떠나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기나긴 경쟁의 본선이 남아 있다. 두려운 것이다. 불안의 그늘이 깊어서 설레는 희망의 싹이 클 자리가 없다. 70년대, 잃을 것도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있던 그 시절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의 고민은 취직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갈만한 직장을 찾기가 어려운 데 있는 것이다. 좋은 급여와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지만 역설적이게도 잘나가는 기업의 자리는 늘어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런 기업은 고용 없는 성장의 단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생산성은 커지고 고용은 줄어들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생산에 대한 직접 기여는 거의 없어질 수도 있다. 일은 로봇에게 시키고 인간은 누리는 세상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앞서 커지는 생산성의 독점을 막을 수 있는 지혜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자의든 아니든 커지는 생산성의 소수독점으로 귀결되게 된다. 커지는 생산성이 독점되게 되면 될수록 경쟁은 심해지고 불만은 커지며 세상은 각박해진다. 일자리는 희망의 근원이다. 희망의 싹이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사회, 불안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진 사회는 가진 자 못가진 자 어느 쪽에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고용 없는 성장, 방법은 없는가.많은 연구와 대안이 모색되고 있다. GDP 대비 고용창출력이 큰 법률, 회계, 금융 등 생산자서비스 부문과 의료, 복지, 실버산업 등의 사회서비스업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하여 서비스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를 위하여 규제 완화와 필요 규범의 정립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기도 한다. 심지어 고부가가치 수공업의 부활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서비스업 분야의 일자리가 늘어나기 위해서는 그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럴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선순환의 엔진은 꺼지고 말 것이다.결국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성장의 과실이 급여를 통하여 골고루 배분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 새로운 메커니즘은 벼랑 끝에서 발견되는 공존공생의 깨달음 위에서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장의 사회환원' 과정에서 만드는 아름다운 일자리로서 인간을 위한 기술혁명을 완성시키려는 인간혁명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 땅을 사들이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말라는 '아름다운 부자' 경주 최부자의 유훈에서, 그리고 카네기의 '부자인 채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라는 교훈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고용 없는 성장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치열한 경쟁환경과 기술의 선량한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성장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만들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는 진정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3-31 박연수

인사청문회와 콘클라베

'자리'가 사람을 만들게해서는 안 된다.과정·절차 중시되는 제도 통해공직자를 선임해야시스템에 의한인사가 필요하다중학생일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수학 시험문제를 잘 풀어 답을 찾았으나 답안지에 잘못 옮기는 실수를 했고, 결국 시험을 망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그 때 이런 망상이 떠올랐다. 만일 시험 문제와 사람의 머리를 함께 집어넣으면 바로 성적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좋은 성적을 받았을 텐데….이런 망상이 다시 떠오른 것은 아마 새 정부의 장차관과 많은 고위직 인사(人事) 때문인 것 같다. 후보로 지명되거나 거론된 사람들의 인사청문회와 각종 하마평을 보면서 편하지 못한 심사가 있어서일게다. 그러한 자리들에서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할 만한 자격과 인품 등을 입력한 다음 후보자를 넣으면 바로 가부를 알려주는 기계라도 있으면 좋겠다.정치인이든 정부 고위직 관리든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사실상 그 어떤 공복(公僕)도, 특히 고위직은 누구나 맡고 싶은 자리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명예와 권력, 부귀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줄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인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온 이력과 성품과 자질에 대한 공정하고 타당한 평가를 통해 그 자리에 맞는 인물이 선택되어야 한다.시험(고시)이나 선거를 통하든 임명권자의 임명에 의하든 간에 최대한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담보되는 공직자 임명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새 정부의 인사 문제는 그러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거나 불비한 경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명권자의 자의적 천거나 정치적 이해관계 혹은 친소(親疎)와 인맥(人脈) 등 불합리한 요인들이 인사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와 그 운영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얼마 전 세계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새로 선출되었다. 무려 266대 교황이다. '콘클라베'(Conclave)로 알려진 교황 선거 시스템은 2000년의 가톨릭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제도이다. 그동안 평신도와 성직자의 대립과 갈등, 여러 명의 교황이 선출되기도 했던 혼란, 선출된 교황 자격 논란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이다. 선거의 비밀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외부의 압력을 일절 받지 않는 것, 무기명 투표 방식과 3분의 2 이상의 득표를 얻어야 하는 것, 선출 이후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투표용지를 소각하는 것, 새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계속 투표를 하는 것 등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조항들이 있다. 대부분 최적임자를 선출하고 선거 이후의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내용이며, 교황 선거방식이 가장 이상적인 선거방식의 하나로 여겨지는 이유이다.새로 선출된 교황(프란치스코)에 대한 여론의 평가도 그 선출방식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는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병으로 폐 하나를 절단한 채 살아왔으며, 주교 관저가 아닌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면서 대중교통을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에이즈 환자의 발을 씻겨 주고 입맞춤까지 하는 등 청빈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성직자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교황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오기보다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했다는 그의 말도 가슴을 울린다. 물론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다 만족하는 교황은 될 수 없을지라도, 시스템적으로 잘 작동되는 선거 절차와 과정을 통해 선출됨으로써 정당성과 신뢰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황이 되었다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교황선거를 지금의 우리나라 고위직 인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곧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정하고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인사가 되도록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게 해서는 안 되며, '자리'에 맞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013-03-24 류성민

드라마 '대왕의 꿈'과 역사 이해

김춘추가 왜에 다녀온 이유는 ?백제 침략으로 위기 직면고구려 청병 요구도 거절당한 탓왜 친당 목적과도 맞아 가교역할창작물이라도 대중매체 감안정확한 역사전달위해 보완 필요신라시대 김춘추를 주인공으로 한 '대왕의 꿈'이란 TV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얼마 전에 방영된 것 중, 김춘추는 백제의 침공을 받아 대야성 전투에서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이 죽음을 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고, 곧이어 바다 건너 왜국에 다녀온 내용이 있었다.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청병을 했으나 실패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김춘추의 왜국 방문은 기록이 있음을 대부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일본서기'에는 왜의 개신정권은 '임나의 조'를 끝내기 위해 효덕천왕 2년(646) 박사 고향흑마려를 신라에 보내어 인질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이듬해(647) 김춘추가 왜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만 보이는 임나의 조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일 양국 고대사 연구자들간에 가장 논쟁이 심한 것이다.임나일본부와 임나의 조가 실재했던 것이라고 하면 김춘추가 왜에 간 사실을 인질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임나의 조가 일본이 만든 허구거나 또는 일방적 명분에 그치는 것이라면 김춘추가 일본에 간 것은 실제 인질이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연구자들 간에는 임나일본부나 임나의 조가 허구이고 김춘추가 일본에 갔다는 기록 자체를 거짓이라고 보는 주장과 임나의 조는 거짓 내지 명분에 불과하지만 김춘추가 일본에 간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으로 나뉘어 있다.신라는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김춘추의 고구려 청병이 실패하여 당시 백제의 대대적인 공세에 시달리면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한편 왜국에서는 645년 6월 중대형 황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백제의 소아씨 가문을 타도하는 을사정변이 있었고, 효덕천황이 즉위하여 황족 중심의 개신정권이 들어섰다. 개신정권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수립을 도모하고자, 당의 선진적 정치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방법으로 소아씨 세력을 제거한 개신정권은 646년 고향흑마려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이에 답하여 647년 김춘추가 반송사로 왜에 건너갔다. 이렇게 파견된 신라 사신 김춘추를 왜는 국내적으로는 인질이라 하여 사실과 달리 허구로 기록한 것이다.김춘추가 왜에 건너간 것은 왜가 신라에 반송사를 요청함에 자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춘추는 당시 신라가 백제 침략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또 대야성의 패전으로 자기 가문의 명성이 실추되었으며, 게다가 직접 고구려에 청병을 갔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이러한 상항에서 왜로부터 신라는 사신 파견 요청을 받았으며,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외로이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고자 혹여 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가늠하고, 또 왜가 백제와 연계할 가능성 등 왜의 국내 정세를 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추락한 자기 가문의 위상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스스로 원했을 것이다. 김춘추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 648년에는 신라 사신이 일본의 국서를 가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가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친당적인 신라에 중개를 청한 것이며, 결국은 김춘추가 입당하여 왜와 당의 우호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역사 드라마도 창작물이다. 그 소재를 역사에서 빌려왔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작가의 창작물이다. 이런 이유로 이 드라마에서는 왜 조정이 김춘추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중대형 황자가 정변을 일으키는 등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가공의 내용이 방영된 것이다.시청자들은 김춘추가 왜에 다녀온 이야기에서 보듯이 드라마의 내용 중 어떤 것이 역사 사실이고, 어떤 것이 작가가 창작한 허구인지 몰라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비록 역사드라마가 창작물이기는 하나, 현재 학교에서 역사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대중매체가 그 상당한 구실을 하는 만큼, 시청자들에게 정확한 역사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보완될 필요가 있다./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2013-03-18 김창겸

여야 대치,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으로 풀어야

우리가 처한 대내외적 현실직시하고 위기극복 위해선여야가 정치 복원에 힘쓰고박대통령의 수평적 리더십과거버넌스 리더십도 절실히 필요정부조직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가 도를 넘고 있다. 여야의 정치력의 복원을 요구하거나 여야 일방에게 양보를 주문하는 것도 덧없어 보인다. 요체는 미래창조과학부로의 SO업무 이관 여부이다. 여야가 타협의 진정성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는지 조차 의문이다. 지난 해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국회의장 직권상정은 천재지변이나 전시사변 등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면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여당 원내대표는 이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여론몰이의 일환으로 제안한 것인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져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개정을 들고 나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간다. 야당도 전후맥락 없이 원내대표가 공영방송 이사 추천 요건의 강화와 언론청문회 개최 요구, MBC 사장의 퇴진 등을 조건으로 SO의 미래부 이관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함으로써 스스로 기존 주장의 당위성을 훼손하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여야 공히 당내 논의 과정없는 무책임한 모습이다. 여당에게 과연 자율성과 협상력은 있는 것인지, 야당은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것인지, 무력한 여당과 무능한 야당의 카르텔 조합이 정국을 꼬이게 만들고 있다.여야 지도부의 현실인식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위기가 아닌 적이 언제 있었겠는가라는 논란을 차치하고, 지금의 대내외적 상황은 엄중하다. 대외적으로 북한은 3차핵실험 이후 남북불가침 합의나 정전협정 파기, 전면전 불사 등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고, 단순히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에 대한 반발로 보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대내적으로도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경제부흥과 국민행복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는 잔뜩 높아져 있고, 새정부의 리더십은 시험받고 있다. 야당을 지지했던 절반에 가까운 유권자는 하시라도 등을 돌릴 태세가 되어 있다. 환율전쟁과 물가상승, 양극화는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휴화산같은 상태다. 여야는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정확한 현실진단이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이명박 정권의 장관도 현직에 있는 한 대한민국의 장관일터 당장 일상적이고 시급한 현안은 국무회의를 열어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정권출범 2주일이 지나도록 국무회의는 실종상태다. 인수위원회때부터 불거진 불통과 오만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는 것처럼 비친다. 많은 비판이 따랐던 인사스타일에서 비치는 강고하고 완고한 이미지, 정치와 조정보다는 통치와 지시의 리더십 스타일은 대선 기간의 온화한 미소와 유연하고 살가웠던 표정과는 상충된다. 야당의 책임도 가볍지 않으나, 국정을 맡은 세력은 집권측이다. 집권세력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국정운영의 한 축인 야당에게 퇴로를 열어주고 명분도 주어야 한다. 정권을 맡겼다 해서 만기친람(萬機親覽)형의 리더십으로 일관한다면 과거 권위주의의 리더십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수직적 리더십을 지양하고 정당, 시민사회, 사회의 각 분야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거버넌스의 리더십을 확립해 나갈 때다.정부직제를 포함하여 모든 현안과 법제적 사항은 아무리 훌륭한 안(案)이라도 의회에서 추인받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정책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다소의 비능률과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많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민주주의의 원리이다. 더구나 대통령제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일단 국회로 안을 넘겼으면 여야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새누리당도 집권당으로 기능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과 국가를 위한 충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절차와 과정의 투명성과 적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위임민주주의와 유사민주주의로 전락한다.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좋으나,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는 정치를 우회하여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려 했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종종 차용했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처한 엄혹함을 직시하고, 여야가 정치를 복원함으로써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수평적 리더십과 거버넌스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합의도 박 대통령의 유연한 리더십에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평론가

2013-03-11 최창렬

세계를 이끌어 갈 새로운 비즈니스모델

햇살이 밝아지고 바람결에 온기가 실렸다. 봄이 오고 있다. 지난 겨울은 길고도 추웠다. 그러나 시대는 온난화의 시대, 금세기 연 평균기온은 꾸준히 상승추세를 보이고 있다. 사슬처럼 이어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일진대 그렇다면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워야 상승하는 평균에 맞추어질까 그리고 그 격한 더위는 얼마나 드센 태풍과 홍수와 가뭄을 불러올 것인지 걱정이다.기후가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거대한 흐름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다. 기후변화가 무서운 것은 온유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삽시간에 노도와 같은 위력을 앞세운 무서운 재앙으로 변한다는 데 있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의 힘은 태양 앞의 반딧불이 같이 하잘 것 없는 것일 뿐이다. 정작 진짜 위기의 상황에서는 크게 소용이 되지 못하는 문명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더럽혀서 자연을 격노하게 하는 데는 너무나도 큰 위력을 발휘한다. 화석연료 중심의 문명은 짧은 시간동안에 복원력을 넘어서는 오염의 일상화를 가져왔고 개발을 위한 과학과 장비의 발전은 지구가 감당해낼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수만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열대우림이 단 몇 년 만에 초토화된다. 이제 그 가공할 장비의 위력은 그렇지 않아도 오염으로 위협받고 있는 바다 속마저 뒤집어 나갈 태세이다. 생명의 근원이 파헤쳐지고 생태계는 무너지고 있다. 인구와 기술과 장비의 발달로 급격하게 작아진 지구, 그러나 그 지구는 인류와 지구생명체의 근원이자 터전이다.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문명이 원천적으로 자원 과소비형이자 오염 유발형이라는 데 있다. 게다가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에 길들여진 가치관이 참담한 과소비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지금 이 급격한 지구의 위기를 깨닫기를 거부하고 말하기를 꺼려한다. 개발의 단물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 듣지도 않는다.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공멸을 향해서 가고 있다.어떻게 해야 할까?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자리잡아야 한다.모든 과학기술역량을 총동원하여 청정, 고효율, 저위험의 에너지 혁명, 자원소모를 최소로 하는 물질 혁명, 화석연료로부터 해방되는 운송수단의 혁명을 하루빨리 이루어 내야 한다. 이와 함께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도 반드시 이끌어 내야 한다. 물질적 욕구중심의 생활패턴에서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풍토, 즉 문화적 생활패턴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수준의 물질적 충족과 함께 허망한 물질추구의 무한경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화생활에 대한 교육과 체험을 통하여 그 가치를 터득하게 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요구된다. 변화된 인프라도 필요하다. 그 중심에 '도시'가 있다.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도시, 쾌적성을 확보하는 도시, 다양한 문화적 인프라와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 이동이 최소화되고 이동이 자유로운 도시, 그리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 아이디어와 과학기술 역량을 모으고 투자를 집중해서 정부와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우리가 60, 70년대에 동경했던 꿈의 모델이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서구화된 문명생활이었듯이 이제 이 새로운 문명과 라이프스타일이 모든 인류가 따라하고 싶어 하는 모델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인류생존과 공영의 길이 될 것이요 우리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신산업혁명이자 성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될 것이다./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2013-03-04 박연수

새로운 시작이 없는 끝은 끝이 아니다

대학생들 취업 보장되는졸업 될수 있도록 해야하고퇴직자에겐 새 일자리 찾게끔기회와 준비시간 갖도록 배려를새로운 시작 불가능한 상황서끝만 강요는 절망으로 내모는것바야흐로 졸업 시즌이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졸업식이 한창이다. 학업의 한 단계를 마감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관행이다. 나라마다 그 시기와 기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학업의 전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제도이다. 마치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갈 때 줄의 중간 중간에 매듭을 만들어 놓으면 더 효과적으로 오를 수 있는 것과 같이, 학업의 긴 과정에 졸업과 입학이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더 능률적인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래서 졸업과 입학을 축하한다. 하나의 과정을 잘 마쳤기에 축하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정에 들어섰기에 기뻐한다. 새로운 과정으로 입학할 수 있기에 졸업이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 되고, 졸업을 하였기에 입학도 새로울 수 있다. 졸업 시즌은 곧바로 입학 시즌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졸업과 입학이란 사회제도를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졸업이 졸업 같지 않고 입학을 해도 새로울 것이 없어지고 있다. 선행학습이나 조기교육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졸업하기도 전에 다음 단계 입학 이후 공부를 하도록 강요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중학교 선행학습을 하도록 부추긴다. 중학교 2학년만 돼도 고등학교 공부를 미리 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그러니 졸업을 해도 졸업한 것 같지 않고 입학을 해도 새롭게 배우는 것이 없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지루한 공부의 연속이다. 이는 매듭도 없는 줄을 타고 계속 올라가도록 재촉하는 것과 같다.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도록 학교와 학원을 오가야 한다. 낮에 학교에 가서는 틈나는 대로 잠자고 밤에 학원에 가서는 쉬는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방학이 돼도 별 변화가 없고, 졸업 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다.한편,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유치원 졸업은 어떨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초등학교 졸업을 축하할 수 있을까? 대학 입학에 낙방한 고등학교 졸업은 또다시 고등학교 공부를 반복하는 재수(再修)의 괴로운 현실이 될 수 있다. 졸업을 해도 사실상 졸업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대학원 진학이나 취직이 안 되면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부러 졸업을 늦추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대학 5학년생, 6학년생이란 말이 낯설지 않다. 졸업하여 실업자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그냥 대학생으로 남아서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입학과 취업이 불가능한 졸업은 무의미한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끝은 끝일 수가 없다.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0대 중반에 조기 퇴직을 하든 60대에 정년퇴직을 하든 직장을 그만두거나 직업을 잃는 것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초래하기도 한다. 퇴직을 했으나 뭔가 새로운 일거리나 할 일이 없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이 준비되지 못한 끝은 좌절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하물며, 불시에 정리해고나 강제 퇴직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정과 절차가 중시되어야 한다. 졸업이라는 과정과 입학이라는 절차가 실질적인 의미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작하고 끝맺는 것을 제대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입학과 취업이 보장된 졸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직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와 준비의 시간을 주면서 퇴직을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불가피한 해고라 하더라도 또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끝을 강요하는 것은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 복지(福祉)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목적보다는 수단이 중시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시작과 끝이, 끝과 시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삶 속에서 평안과 안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러한 학생복지, 사회복지가 간절하다.

2013-02-24 류성민

파른본 '삼국유사' 공개와 한국학 자료찾기

공개된 1책은 삼국유사의'왕력'·'기이' 권1·권2에 해당고대사 연구 가장 중요한 자료왕력은 고대왕들의 정보를재위 순서대로 기술한 연대력잘못된 사실 수정·보충 기대조상의 삶과 얼이 서린 흔적과 유무형의 유산을 찾아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연구하여 역사를 복원하고, 또 오늘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 정립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한편으로는 나아갈 바를 미리 짐작해 볼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까닭에 정치와 경제가 발전할수록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높아지는 것이다.얼마 전에 파른 손보기 교수의 유족은 소장하고 있던 새로운 삼국유사 1책 목판 인쇄본을 공개하고, 연세대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기증된 1책은 삼국유사의 '왕력'과 '기이' 권1과 권2에 해당한다.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고대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본자료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은 몇 종이 있다. 그럼에도 저자 일연 스님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뒤에 제자 무극이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언제, 누가, 어디에서 찍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거의 없다. 오직 중종 7년(1512) 경주에서 간행되어 흔히 '중종임신본' 또는 '정덕본'이라 일컫는 것이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이 판본의 끝부분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발문이 붙어 있으며, 당시 경주부에는 옛 책판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한 줄에 겨우 네 다섯 자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마멸이 심하여, 완전한 인본을 구해서 책판을 개간하였다. 이 '중종임신본'의 간행본 몇 종이 현재 전한다.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어쩌면 고려 말이나, 늦어도 조선 초기에 찍었을 것으로 보이는 판본이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알려졌을 따름이다. 이번에 공개한 파른본은 삼국유사 1책이 빠진 것이 없이 완전한 상태이며,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초기 간행본 권2와 완전히 같은 판본이 확실하다고 한다.그러므로 이것은 삼국유사의 여러 판본 중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파른본보다 간행시기가 앞서는 판본이 발견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파른본 삼국유사의 왕력은 대단히 중요하다.삼국유사는 전체 5권으로 되어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편제되어 있다. 이중 '왕력'은 고대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의 왕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재위한 순서대로 기술한 일종의 연대력이다. 파른본 삼국유사의 '왕력'은 중종임신본 이전에 나온 유일한 '왕력'이다. 삼국유사 '왕력'으로 기존에 널리 이용되는 중종임신본에는 글자의 탈락이나 또는 잘못 새겨진 곳이 제법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착종을 일으키게 하거나 사실을 이해함에 혼란과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이런 처지에 파른본 왕력이 찾아짐으로써 한국 고대사, 특히 각 나라 왕실의 조상과 계보 등에 대해 기존에 잘못 알려지거나 알 수 없던 사실을 수정하고 보충해 줄 것이다. 아마 이 분야 연구에서 난제가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은 그 내용이 알려주는 정보 가치가 매우 중요하며, 또 인쇄출판과 서지학적 의미 또한 지대하여 가히 국보급으로 평가하겠다.오늘날 우리 학계에는 자료 이용의 어려움 때문에 연구가 힘들고 미진한 분야가 많다. 참된 우리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한국학'이 특히 그러하다. 한국학을 발전시키고, 분야간 융합및 균형 발전과 활성화하려면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화유산과 자료 찾기가 중요하다.아울러 선행 연구자가 고생하며 자료 찾기를 한 과정과 그 결과 및 찾은 자료는 공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후행 연구자가 동일한 자료를 찾기 위해 같은 시간을 낭비하며 노력을 되풀이하지 않고, 이미 찾은 결과와 자료를 활용하여 다음 단계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이번에 공개된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에서 보듯이 한국학 연구가 한층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모두가 문화유산과 자료 찾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13-02-18 김창겸

총리론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의 자진사퇴 이후 다시 총리 인선이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특히 출범을 앞두고 있는 새정부의 총리에 대해서는 유독 책임총리 수행 여부가 관심이다.책임총리는 학문적 용어도 법률 용어도 아니다. 총리가 헌법에 명시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책임총리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데 사회통념적인 합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책임총리가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고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의 보편적 합의이다.대통령제 총리위상 역할 제한적통합과 공동체 지향 가치에 대한사회적 합의도출과 효과 위해선국민적 정당성 확보가 우선존경과 신망 받는 인사 등용될때국민 통합의 기초 이룰 수 있어우리나라의 국무총리제도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헌법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무위원의 인사제청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책임총리의 근거 조항이다.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여 민생과 내치를 책임지고, 대통령은 외교나 국방 등의 외치를 맡는다는 권력 분산의 정신이다.그러나 경제부총리가 경제부처를 장악하고, 유관한 업무 조정 능력을 갖게 되며 미래창조과학부가 과학과 기술부문을 총괄한다는 새정부의 조직개편은 원천적으로 책임총리라는 개념과는 상치되는 개념이다. 단순히 내각의 인사제청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한정적 의미를 붙인다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총리의 인사제청권 행사는 대통령제하에서 원천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직접 선출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통령 권력과 비록 국회의 임명동의를 거친다고 하지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의중과 부합하지 않는 인사를 추천한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총리가 각 부처의 상충되는 정책을 조율하고 부처이기주의를 조정하는 것도 총리실의 주요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총리실에 국무조정실을 부활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이러한 '책임총리론'의 함의를 전제할 때,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의 기본 인선 방향을 가늠하는 최근의 총리담론은 어딘지 책임총리론과는 썩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법조인 출신의 총리 발탁과 법치와의 논리적 연관성은 피상적으로, 또는 형식논리적으로는 부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 연계성은 발견하기 어렵다.그보다는 법의 공정한 집행과 정확한 적용이 '유전무죄', '유권무죄'를 추방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며, 총리가 법조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상징적 의미 이상의 의의를 부여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를 통합과 연관시키는 것은 정치적 상징의 뉘앙스를 풍긴다. 법치와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법조인 출신이 총리가 되어야 법치가 선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총리의 정치적 의미가 통합형으로 한정될 때 이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명분은 있으되, 실질적 측면에서 모호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관리형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관리한다는 것인가.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내각의 실질적 통할이라는 의미에서의 관리인지, 형식적으로 총리의 역할을 '선량한 관리자'로 국한하고, 상징적인 위치로만 자리매김 한다는 것인지 개념적인 선명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대통령제의 권력구조하에서 총리의 위상과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원천적으로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분산은 이원집정부제의 권력구조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법적·제도적 보완 없이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권력운용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명백한 한계속에서 총리가 통합과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에 상징적 효과라도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적 정당성의 확보가 우선이다. 이를 위해서 총리는 존경과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인사라야 한다. 그것이 통합의 기초다. 국민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의 궤적을 살아온 인사가 등용될 때 통합의 효과를 상징적으로나마 거둘 수 있다.왜 통합이 중요한지,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가 자진사퇴할 때 언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이후 해명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절차적 하자가 없음을 주장한 것은 그래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2013-02-04 최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