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진 칼럼

 

[홍창진 칼럼]결심과 실천

'사랑' 말로 하기는 참 쉬워혈연외에 어떤 사랑도 없다면동물의 왕국과 무슨 차이일까행복이란 서로 움켜쥐는게 아니라주고 받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했습니다. 말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믿는 자'의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며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했지요.매 주말 강론을 통해 신자들에게 '행동의 중요성'을 전해야 하는 성직자들의 흔히 경험하는 속내를 김 추기경은 팔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다는 그 고백 이면에서 오히려 강한 실천 의지가 느껴집니다. 실천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곧 실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바보 선언'을 한 그의 삶에서 여느 고위 성직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사회 참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어른조차도 결심에서 실천에 이르는 길이 이토록 멀고 험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떨까요?조카뻘 되는 어느 여자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들른 한인성당에서 교포 2세 남자를 만났습니다. 서른쯤인 여자는 한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미국 여행길에 혹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남자는 편의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 현지 명문대를 졸업한 뒤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둘은 첫눈에 서로 호감을 느껴 몇 차례 데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여자가 귀국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남자는 결혼을 결심하고 한국에 와 청혼을 했습니다. 여자의 부모에게도 허락받은 뒤 둘은 바로 미국에 건너가 남자의 부모에게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마침 미국에 갔을 때 사업을 하는 남자의 고모가 여자의 취직까지 해결해 주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한두 번쯤 큰 행운이 온다고 하는데, 마침 그 여자에게 그런 행운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여자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예비 시댁 식구들과의 첫 식사 자리에 남자의 누나가 나왔는데 중증 발달장애자였던 겁니다. 물론 남자가 데이트 중에 장애인 누나가 있다고 얘기는 했지만,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니 충격이 무척 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둘이 있을 때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누님을 돌볼 능력이 없어지면 그때는 자기가 맡아서 돌봐야 한다고….여자에게는 인생에 한두 번 찾아오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역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도 반대했고 친구들도 말리고 나섰습니다. 여자는 생각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결혼할 수 없다.' 중증 장애를 지닌 누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건 감내하기 힘든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자는 행운을 불운으로 결론짓고, 미국행을 포기하기로 했답니다.사랑을 말로 하기는 쉽습니다. 남의 위대한 사랑에 박수 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만일 중증 장애를 지닌 딸을 보살피는 부모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TV에 방영된다면,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동의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여자도 그런 프로그램을 보았다면 감동의 눈물을 흐리며 동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내 일이 되었을 때는 상황이 180도 달라집니다. 혈연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 다음에야, 헌신하는 사랑을 감내하는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사막처럼 답답해질 것입니다. 혈연 외에는 어떤 사랑도 없다면 동물의 왕국과 무슨 차이일까요?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란 움켜쥐는 것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서 생기니까요. 어느 누구도 여자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강요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스스로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그의 부모는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겠지요.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용기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여자가 한 사람 나타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더 이상 삭막해지지 않으면 참 좋겠습니다./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

2018-09-10 홍창진

[홍창진 칼럼]가벼운 마음

미래에 대한 걱정 쌓아둔다고당장 해결 되는 일은 없다주어진 현실 외면하라는게 아니라달라지지않는 일 고민에 발목잡혀고통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해마다 여름이 되면 성당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캠프 준비로 바쁩니다. 당연히 신부는 봉사해줄 청년을 찾습니다. 그러나 요즘 도시 성당에서 청년 봉사자를 찾기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한국에 사는 청년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안고 있는 걱정이 있습니다. 바로 취업입니다. 취업문이 너무 좁은 탓에 방학 동안에도 쉬지 않고 스펙을 쌓아야 합니다. 물론 봉사도 스펙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성당 오빠, 성당 언니 스펙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해외연수나 국내에서의 극한 체험, 전공과 관련한 자격증 취득 등이 그나마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스펙입니다. 어떤 청년은 스펙을 쌓기는커녕 당장 학비 마련도 힘겨워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며 더위와 씨름하고 있습니다.이 위기를 넘기고자 어머니 봉사자를 모집했습니다. '모집 인원 ○○명'에 지원자는 정말 0명이었습니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겁니다. 청년들보다는 어머니들 사정이 좀 낫겠지 싶어 어머니 봉사자를 모집했지만, 그분들 상황은 청년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어머니들 대부분이 정규직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무게를 감내해야 하는 고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가사 노동과 아이 교육까지 도맡아야 하니, 일요일에 성당에 나와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성당의 주일학교 교육이 아직 무급봉사에 의존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유급교사로 전환하지 않으면 길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마지막으로 아버지 봉사자를 모집해봤습니다. 공고를 내기도 전에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옵니다. "성당 아이들 교육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빠들 죽어나가는 사정도 좀 들어주세요." "해고 걱정, 폐업 걱정, 대출 상환 걱정! 신부님,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버지 봉사자 모집은 방도 못 붙이고 계획을 철회했습니다.여름 캠프 봉사자 모집은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청년들과 어머님, 아버님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많은 일을 감당하며 바쁘게 사는 것은 좋은데, 그분들에게서 지친 모습만 보일 뿐 희망이나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걱정과 불안만 가득한 그들의 눈은 다가올 미래를 암울하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우리 마음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면 얼마나 될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음을 어떻게 측량할까 싶지만, 실제로 잴 수 있다고 해도 아마 0.0001그램도 안 될 겁니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마음이 걱정과 근심 때문에 천근 혹은 만근처럼 무겁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감내해야 할 현실의 무게는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밖의 위기가 산적해 있다고 해서 이를 고스란히 내 안으로 가져와 차곡차곡 쌓아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을 쌓아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습니다. 어차피 걱정한다고 당장 무슨 일이 바뀌지 않는다면 미래는 신의 영역에 맡긴 뒤 걱정을 내려놓고, 우리는 그저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고민한들 달라지지 않는 걱정거리에 발목을 잡혀, 내게 주어진 오늘을 고통으로 점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30% 인원 감축을 통보한 직장 현실, 대출까지 받아 장만한 아파트가 급락해 이자도 못 갚는 현실, 가진 돈 모두 털어 창업을 했는데 경제 상황이 악화돼 폐업 위기에 몰린 현실은 분명히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런 현실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그 현실이 내일 똑같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간의 인생 경험에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쁜 일이 항상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좋은 현실도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는 것을, 신은 늘 그래 왔다는 것을.여름 행사 봉사자를 모집하며 어느새 저도 모르게 제 마음에 근심과 걱정을 얹어 놓고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봉사자들이 없으면 없는 대로 떠나 볼 생각입니다. 바다에서 아이들이 하루 종일 신부와 수영만 해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고, 나라도 없었으면 그마저도 못하지 않을까 싶어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

2018-07-30 홍창진

[홍창진 칼럼]종교의 영역

나의 종교로 믿음 생활하고 있다면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잘 살펴라종교는 미래 보장해주는 보험 아냐신을 통해 인간의 본모습 깨닫고욕심 버리고 평화 얻는게 참모습지하철도 다니지 않는 어두컴컴한 새벽, 전등불이 환하게 켜지는 곳은 절, 교회, 성당 그리고 보험회사 사무실이다. 새벽 미사를 드리려고 졸음을 참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면, 건너편 고층 빌딩의 5개 층에 벌써 불이 들어와 있다. 그 환한 불빛 사이로 '○○보험'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종교인들이야 혼탁한 세상을 깨우기 위해 어둠을 뚫고 새벽을 연다지만 저들은 무엇을 위해 새벽부터 이 부산을 떠는 것일까?사실 20~30년 전만 해도 보험회사는 지금처럼 성장하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취업과 결혼, 집 장만, 육아 등 미래의 청사진을 자신의 힘으로 일굴 수 있었다. 자기 주도적으로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보험 같은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보험 상품 한두 개쯤은 갖고 있다. 미래가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보험회사는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닥치지도 않은 미래의 불행을 과장되게 꾸며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돈을 버는 셈이다. 어떤 비용 투자 없이 불안을 사고파는 것으로 영업이 되니, 일면 신기루 같은 사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 영업 형태를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세월 일부 종교에서는 진리를 가르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불안한 미래를 두고 겁을 주면서, 절대자인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설교했다. 심지어 헌금을 내면 대신 기도해 불행을 막아줄 것처럼 유도하기도 했다. 일정 보험액을 내면 미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보험회사가 떠들 듯이, 종교 역시 얼마나 정성을 바치느냐에 따라 미래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었고,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면 큰 봉변을 당하는 줄 알고 그 가르침을 맹신했다.요새는 보험회사가 하도 영업을 잘해서인지, 일부 종교의 잘못된 행태가 많이 사라졌다. 불안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이제 보험회사의 몫이다. 그나마 남은 영업수단이 장례 때 복을 빌어주는 일인데, 이 일도 상조회사가 나타나서 자리를 뺏겨버렸다.종교의 본래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잘 들여다보게 해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신에게 의존해 마치 모든 일을 신이 다 해결해 줄 것처럼 매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순리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즉,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의 정답이 실은 내 안에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란다면 돈을 내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무턱대고 합격하게 해달라고 빌 게 아니라, 공부로 힘들어하는 아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이런 세상 이치를 이해하고 제 스스로 노력하도록 힘을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설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더 노력해야겠구나'하며 힘을 낼 것이다.하지만 여전히 종교를 소원을 이뤄주는 요술램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 입시 백일 전에 성당, 교회, 절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불경이든 성경이든 어느 종교 경전에서도 "복을 빌어라, 그러면 내가 복을 주겠다"고 가르치는 구석은 없다.내가 만일 어떤 종교에 소속되어 지속적으로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면 내 종교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잘 들여다보라. 그리고 나는 어떤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잘 살펴보라. 종교는 미래를 보장해주는 보험 상품이 아니다. 신을 통해 인간의 본 모습을 깨닫고, 욕심을 버리고 평화를 얻는 것이 종교의 참모습이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8-06-18 홍창진

[홍창진 칼럼]진정한 친구

모든것 줄 수 있는 사람에 집중하면되레 집착 때문에 목 졸릴 수 있어어느 특정한 관계 유지하기 보다다방면의 여러 친구 사귀는게외로움 더는데 더 많은 도움 된다사람이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왕따로 사는 건 흡사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 같은 공포를 준다. 그만큼 사람에게 친구는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요즘 세상에서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다가 배신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거다. 한번은 방송 출연 중에 제일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누구에게 보낼까 잠시 망설이다가 한 동창 신부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동창 신부가 과연 진정한 친구일까? 과연 친구라는 존재가 내 마음을 100퍼센트 알아주고, 힘들 때 정말 위로가 되어줄까?그렇다고 그 동창 신부가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진정한' 친구라고 했을 때 기대하는 것이 허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나는 진정한 친구를 갈구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엔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친구, 내 마음을 뼛속까지 알아주는 친구는 없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오해다.친구가 내 외로움을 해결해 주는 존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각자 짊어져야 할 외로움의 몫이 있고, 그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묵묵히 자기 인생을 걸어갈 뿐이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욕심이다. 그리고 그 욕심이 결국 관계를 망친다. 대개의 인간관계, 특히 친구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내가 생각한 만큼, 상대가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또한, 상대에 대한 서운함에는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집착이 숨어있다. 집착을 우정이나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과도하게 챙겨주고 또 그만큼 요구하게 되면 결국 서로 감당을 못하는 관계가 되고 만다. 그래서 거리가 필요하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나에게 맞춰달라고 강요하면 안 되고, 또 반대로 상대의 요구에 맞춰줘서도 안 된다. 결국엔 감당이 안 돼 싸우거나 서로 피하는 관계가 되고 만다.관계에 집착하지 마라.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 인생이 망가질 일은 없다. 내 인생에 모든 걸 줄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에게 목매달다가는 오히려 그 집착 때문에 목을 졸릴 수 있다. 대신 여러 친구를 다양하게 사귈 필요가 있다. 어느 한 관계에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관계를 다방면으로 유지하는 편이 외로움을 더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직장 동료는 일을 같이하는 사람일 뿐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관계를 깊게 가진다 해도, 일이라는 공동의 목적이 무너지면 그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 따라서 일을 떠나서 하는 부탁은 사양하라. 그가 상사라 하더라도 지혜롭게 피해가라.다양한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단 하나의 규칙은 모인 목적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축구 모임에서는 축구를 열심히 하면 된다. 환경운동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사회 운동에 진심을 다하면 된다. 그 이상의 기대는 버려야 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고, 기대가 없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친구에 대한 허상에서 벗어나라. 집착을 버리고 거리를 둘 때 되레 외로움이 줄어들뿐더러, 소원하던 관계가 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8-05-07 홍창진

[홍창진 칼럼]부부공존의 미학

상대에게 뭔가 바라는건 욕심'너 아니면 죽는다'는 식의환상과 기대 갖기 때문에 불행배우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 말은"나 요즘 왜 이렇게 힘들지?"별것 아니지만 상대방 마음 움직여신부로 살면서 결혼을 시킨 커플만 수십 쌍이다. 혼배성사 날짜가 잡히면 식전에 신랑을 불러 슬쩍 물어본다. "왜 이 여자랑 결혼할 생각을 했습니까?" 대부분 "잘은 모르겠는데 결혼은 이 여자랑 해야 한다는 감이 오더라고요"하고 대답한다. 신부에게도 따로 물어본다. "왜 하필 이 남자입니까?" 이런저런 대답이 나오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저한테 잘해줘요"라는 말이 나온다.그럴 때 속으로 '결혼하고 조만간 찾아오겠구나' 생각한다. 그 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십중팔구 못 살겠다며 찾아온다. 주례할 때 AS를 보증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여자가 미쳤나 봐요. 집안일은 하나도 안 하고 친구만 만나러 다녀요.""매일 회사로 데리러 오던 남편이 요새는 전화도 잘 안 받아요.""결혼 전이랑 너무 달라요.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굴더니, 사사건건 간섭만 해요."해결될 문제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결혼은 AS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애초에 고장 난 물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하자가 있었으니 되돌려 놔봐야 고물이다. 고칠래야 고칠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어떻게든 바꿔보겠다고 아우성이니 답답할 노릇이다. 착각해서 결혼을 하고 망각해서 재혼을 한다. 좀 부실해도 고쳐 쓰면 될 거라는 착각 때문에 결혼하고, 결코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 재혼을 한다.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혼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최소한 그놈 때문에, 그녀 때문에 내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거다. 결혼해서 한집에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생은 각자 살아야 한다. 그걸 알고 자기 주도적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결혼해서 사는 게 좀 힘들더라도 배우자 탓을 하지 않는다. 결혼 역시 자기 선택으로 결정한 일이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애걸복걸해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 애걸복걸을 들어준 것은 결국 자신이 아닌가? 그를 선택한 것이 나이니, 그와 함께 사는 것도 내 몫이다. 물론 속된 말로 '사기 결혼'을 당해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결혼 생활의 문제는 배우자에게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배우자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 상대로 인해 이익을 보려는 마음,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생각 때문에 힘든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상대를 바꾸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그중에 결혼의 인연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 결혼을 한 배 탄 것에 비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한 배를 탄 것이 아니라 함께 갈 배 한 척이 내 곁에 온 것뿐이다. 그럴 거면 뭣하러 결혼하냐고?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망망대해를 홀로 헤쳐가야 하는 외로운 인생에서 같은 곳을 향할 이웃 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친 풍랑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이웃 배가 옆에 있다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결혼이 딱 그렇다. 배우자를 그저 옆에 있는 배이려니 하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에게 뭔가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기대와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힘들어 해봤자 자기만 손해지 변하는 것은 없다. 반대로 기대와 욕심을 버리면 상대방이 해주는 아주 작은 것에도 고맙고 정이 생겨난다. 죽도록 사랑해야 하고, 너 아니면 죽는다는 식의 환상과 기대를 갖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이렇게 얘기해 놓고 나니 결혼생활을 마치 수행자의 삶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배우자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말 한마디를 알려 드리겠다." 나 요즘 왜 이렇게 힘들지?"별것 아닌 말이지만, 어설픈 훈계 혹은 위로보다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말이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8-03-26 홍창진

[홍창진 칼럼]가상화폐까지 간 욕망

돈 추구하는건 나쁘지 않지만인생목표 1순위로 두는게 문제내 뜻대로 안된다는걸 인정하고부자에 대한 개념부터 바꿔야더 벌기위해 애쓰는것 보다자기삶 만족할줄 아는게 '부자'금의 보유량을 전제로 그 비율에 따라 달러라는 화폐를 만들었다. 이것은 금이라는 현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화폐는 유가증권으로도 주식으로도 변할 수 있지만 그 근저에는 금이라는 현실이 있다. 그런데 최근 가상화폐의 관심은 매우 뜨겁다. 현실이 아닌 가상을 근거로 화폐를 만들고 그것을 유통하면서 인간이 이제 현실의 욕망을 넘어 가상의 욕망까지 탐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도대체 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돈만 있으면 인생은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 그렇다고 돈을 무시하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일까?성경 구절 중에 신자들이 참 안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부자 청년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참고로 그 청년은 평소에 선행도 많이 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계명도 엄청 잘 지켰다). 그 질문에 예수는 "마지막으로 네가 가진 것을 전부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예수는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오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셨다.현실적으로 보자면 참 갑갑한 이야기다. 어릴 적에 이 이야기를 듣고는 참 원망스러웠다. 그 부자 청년의 심정이 꼭 내 마음 같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나는 부자가 아니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다' 하는 자조(?) 섞인 생각과, '바늘 귀 못 빠져나와도 좋으니 부자 한번 돼 봤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교차했다.솔직히 부자 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만 해도 신부가 되기 전까지 가장 큰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필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친구네가 엄청난 부자였는데, 2층 양옥에 연못까지 있는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이런 집에서 하루만 살아보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죽 냄새가 폴폴 나는 커다란 소파에 몸을 묻고는 기필코 부자가 되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곤 했다.신부가 되고 나서 그 마음은 옅어졌지만, 지금도 돈에 대한 욕심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한 말도 무작정 돈 욕심을 버리라고 한 뜻은 아니라고 본다. 예수가 묻고 싶었던 건 돈에 대한 그 청년의 마음가짐이었을 거다. 가진 것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은, 베풂을 강조하기에 앞서 재물을 1순위에 두는 한 인생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돈을 추구하는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돈을 인생 목표 1순위로 두는 게 문제다. 돈은 좇는다고 잡아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설혹 잡았다고 해도 그 자체가 행복과 직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주 부근 성당에 있을 때 4대강 개발 덕에 땅값이 평당 10만원에서 200만원이 된 곳이 있었다. 그 때 마침 내 지인과 그의 친구 몇이 그곳에 땅이 있었다. 지인의 친구들은 이때다 싶어 땅을 팔았지만, 내 지인은 땅값이 더 오르려니 하고 팔지 않았다. 땅값은 평당 400만원 까지 올랐고, 땅을 먼저 판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내 지인을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발 계획이 취소되면서 땅값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땅을 판 사람들의 술잔은 축배가 되었고 내 지인은 병을 얻어 입원을 하더니 급기야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불과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고통을 당하다 급기야 죽음에 이른 것이다.먼저 돈이 내 의지대로 안 된다는 걸 쿨하게 인정하자. 또 하나, 부자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은 돈을 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강남에 수백억짜리 건물을 가지고 있어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애쓴다면 부자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굳이 늘리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 부자다. 즉, 부자는 스스로 자기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8-02-19 홍창진

[홍창진 칼럼]삶의 전환점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는 동안어느덧 '괴짜 신부'·'날라리 신부'"신부가 뭐 저래?" 수군대지만좀 어떤가 내가 행복하고남도 행복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사제가 된 지 7년째 접어들 무렵, 한 3년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당시 중국은 개방은 했지만 종교에 관해서는 여전히 삼엄한 장벽을 치고 있었던 터라, 우리 신부들 사이에선 '대만 신부가 중국에서 선교를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더라', '어느 프랑스 신부가 중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알고 보니 남몰래 포교하다가 중국 공안에게 살해당한 거라더라'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그러던 차에 고향이 얀삐안(鹽邊)인 주교님으로부터 중국으로 떠날 지원자를 받는다는 모집령이 떨어진 것이다. 중국엔 관심도 없었고, 더구나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을 할 소명감 따위는 털끝만치도 없어서 모집령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눈치 없는 후배 신부가 순진한 얼굴로 찾아와서는 "형님, 저랑 같이 가요"하는 거였다. 선배된 체면에 겁나서 못 가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우리 교구에 속한 신부만 해도 200여 명인데, 설마 내가 뽑히겠어?'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지원한 지 며칠도 안 돼 주교님으로부터 "어려운 자리에 지원해줘 고맙다"는 전화가 걸려왔다.(그 전화를 받고 얼마나 벽에 머리를 박았는지 모른다.)울며 겨자 먹기로 인사공문을 받아들었는데, 좀 이상했다. 사유란에 떡하니 적힌 '중국 유학'. 선교하러 가는데 웬 유학이냐고 물으니, 중국은 성직자 입국이 금지되어 있으니 일단 유학생 신분으로 위장해 입국을 하란다.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싶었다.겁을 잔뜩 먹고 시작된 중국행은 생각보다는 살벌하지 않았다. 단지 더러운 환경 속에서, 한국에서 살던 때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는 불편이 더 컸다. 수돗물이 순환급수제여서 모임에서 식사를 하다가 집으로 달려와 수돗물을 받아놓고 다시 외출을 해야 하고 자동차는 꿈도 못 꾸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는 데 겨울에 영하 30도를 뚫고 가야 하는 일, 앞에 가는 자전거 탄 사람이 뱉은 가래침을 얼굴에 맞아야 하는 일 등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무엇보다 제일 힘든 것은 신부라는 권위를 송두리째 내려놓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특히 성당 안에서는-왕 노릇을 하다가 그곳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중국의 일개 인민으로 살아야만 했다. 중국 사람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의 직업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신부'라고 대답하면 중학교 중퇴자 정도의 사람으로 취급을 당한다. 중국 신부가 나온 중국신학교는 사설학원 같은 곳이어서 정규대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신부들이 중국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덩달아 나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이런 상황을 견디는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중국을 다녀온 뒤 내 사제 생활은 전과 참 많이 달라졌다. 아니 내가 달라졌다기보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미사 후 신자들과 인사하는 것이 피곤해 사제관으로 들어오던 것은 옛말. 한 사람이라도 더 손잡고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저 내가 생각한 신부의 모습에서 한 계단 내려온 것뿐인데, 이상하게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전에는 문득문득 가슴을 후비던 고독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신기한 건 20여 년 전의 내 사진과 요즘 내 사진이 참 다르다는 것이다. '자뻑'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젊었을 때보다 지금 모습이 훨씬 매력적이다. 머리숱이 줄고 배가 좀 나왔지만.좋아하는 어구 중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위도일손 爲道日損)'이라는 말이 있다.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며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는 동안 어느덧 괴짜 신부, 날라리 신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부가 뭐 저래?" 하고 수군대는 소리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내가 행복하고, 더불어 남도 행복해 질 수 있으니 말이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8-01-15 홍창진

[홍창진 칼럼]내 안에 답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 찾아신나게 노력하는 사람과싫은걸 억지로 하는자 결과 뻔해즐겁지 않게 하다 망하느니처음부터 안하고 노는게 더 행복자율의지 그 뭔가를 찾을 때까지신학교에 입학한 뒤 첫 1년을 지낼 때 '내년쯤이면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살짝 들었다. 화장실 갔다가 보던 일도 끊고(?) 나오기가 다반사였고, 소등 시간이 되면 잠이 안 와도 억지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2학년이 됐는데, 때려치울지도 모른다는 내 예감은 다행히 빗나갔다. 2학년부터 들었던 철학수업이 꽤나 매력적이어서 규칙이 주는 압박을 잊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령도 좀 생겨서 화장실 가서 늦게 오기도 하고, 소등 뒤에 이불 뒤집어쓰고 철학 책 읽다가 다음 날 수업시간에 좀 졸기도 하고, 규칙 안 지킨다고 교수 신부님께 욕도 좀 먹어주면서 살았다. '이렇게 살다가 잘리면 장가나 가지 뭐' 하고 맘을 편히 먹으니 숨 쉴 여지가 생기는 듯도 했다. 교수 신부님들도 이런 내 기질을 알았는지, 슬쩍 눈감아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하셨다. 그런 끝에 기적적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만일 9년간 숨 쉴 여지없이 규칙대로만 살았더라면 중도에 신학교를 박차고 나왔을지 모른다. 아무리 내가 요령껏 규율을 피하며 살았다 해도 신학교 생활이 갑갑한 건 사실이었다.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내내 속으로 외쳤다. '신부가 되기만 해봐라. 한 일주일 동안 잠만 잘 테다!'실제로 나는 신부가 되고 정말 사제관에 처박혀 잠만 잤다. 그것도 일주일이 아닌 한 달씩이나. 9년을 타율 속에 살다가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니 정말 너무 달콤했다. 하루 한 번 있는 미사만 마치면 나머지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사제관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나를 두고 신자들은 신심 깊은 신부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기도를 하나 보다 했을 거다. 그러기를 거의 한 달. 그런데 참 신기했다. 미사 집전만 겨우 하고 마음껏 게으름을 부리다 보니 슬슬 기도가 하고 싶어지는 거였다. 9년을 기도만 하며 살 때, 한 자리에 앉아 장시간 침묵 속에 기도했다는 뿌듯함은 있었지만 사실 영혼의 울림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마음에, 즉 자율로 택한 기도는 게으름을 피우며 청한 낮잠보다 훨씬 달콤했다. 신을 만나는 기도 본래의 목적을 자율 속에 맛보게 된 것이다.나를 9년이나 묶어놓은 우리 조직(?)에 대한 복수로 무려 한 달이나 테러를 저질렀지만, 그러면서 깨달았다. 똑같은 규칙이어도 타율이 아닌 자율은 내 삶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과 자유를 준다는 사실을. 똑같은 기도라도 하고 싶을 때 하면 무척 달콤하지만, '신부니까 해야 한다'는 타율에 따른 기도는 스트레스가 될 뿐이라는 걸 체험했다. 내게 압박을 주는 건 아무리 명예롭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직업이나 진로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깜냥을 벗어난 일이라고 생각되면 그냥 무시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내 직분 안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걸 찾아 최선을 다하는 것. 내가 이 빡빡한 사제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거운 일,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되면 내 것이 아니니 좀 포기하고 놀아도 된다. 즐겁게 살기만도 바쁜 인생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묻는다. "나 좋은 것만 하다가 남보다 뒤처지면요?""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놀기만 하는 건 죄 아닌가요?"걱정도 팔자다. 저 좋은 일 찾아 신나게 노력하는 사람과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억지로 해서 잘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의 시선이나 사회가 정한 룰에 따라 즐겁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하다가 망하느니, 처음부터 안 하고 노는 편이 훨씬 행복한 거다. 내 안의 자율 의지가 요동치는 그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말이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7-12-11 홍창진

[홍창진 칼럼]인연(因緣)이 미래다

모든 형태의 노력은 미래의 씨앗'인연'으로 제대로 싹 틔워야이웃과 담 쌓은채 고민하지 말고산행·종교활동·연애도 하면서일상적인 만남 많이 갖고 살아야따뜻함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신부님, 회사에 사표 냈어요. 당분간 쉬면서 생각 좀 하려고요. 일간 찾아뵐게요.'얼마 전 받은 문자메시지다. 젊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많아서인지 평소 이런 문자를 자주 받게 된다. 대부분 이직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내린 결론들이다. 먹고살 대비책을 세워두지도 않고 일단 사표부터 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불안할까?하지만 다행히 일자리를 찾았다고 해도 이전보다 행복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경제 성장이 침체기에 든 이래 일자리 자체가 크게 줄었고, 자연히 개인의 업무량은 늘었다. 눈앞의 일을 해치우느라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권고사직이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말 때문에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한다. 그래서 아예 국가고시 등 다른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위 의전, 약전, 법전 준비생들이다. 전공을 바꿔 대학과정을 밟아 전문직을 갖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멀쩡히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고시원에 들어갔다.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평생직장을 갖겠다는 그 노력이 가상하긴 하지만, 내 눈에는 미래를 향한 멋진 도약으로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는 희망을 말하지만 눈빛이나 행동에는 괴로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괴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양질의 자리는 점점 희박해지고 경쟁은 치열해져가는 세상이 너무 두려운 것이다. 가진 재주를 다 모아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될 리 없다. 무서운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가뜩이나 복잡한 마음을 더 짓누른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미래에 내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지 결정짓는 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요소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기본적인 실력도 있어야 하고, 학벌이 뒷받침되면 더 좋은 거고, 인내심이나 도전의식 등 품성도 갖출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하지만 나는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연(因緣)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젊은 친구들이 미래의 삶을 의논하러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 나는 내 주변 사람 중에 그 친구의 꿈과 엇비슷한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아니 꼭 꿈과 관련 없어도 위로를 주고 본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연락해 서로 어울리게 한다. 거창한 모임이 아니라 그저 산에 오르거나 자전거를 탈 때 놀러 오라고 한다. 안타까운 건 젊을수록 그런 자리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말이다. 학원에 가야하고, 스터디에도 가야하고, 시험 준비도 해야 한단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그 시간에 잠이라도 한 숨 더 자겠다는 마음도 보인다. 좋은 인연 날아가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다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하던 대로 이 직장 저 직장 기웃대며 고민하는 걸 지켜볼 밖에는.지나고 보니 내가 주선한 세대 간 통합 모임에 꾸준히 나왔던 친구들은 거의 자리를 잡아 열심히 잘 사는 반면, 저 하던 대로 고립돼 살던 친구들은 같은 고민에 허우적대고 있다. 먹고사는 일이 녹록지 않은 시대이지만 이웃과 담을 쌓은 채 혼자 고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끔 산행 모임도 나가고, 종교 활동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일상적인 인연들을 계속 키우며 살았으면 좋겠다.나는 아직까지 혼자 노력해 성공했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노력은 미래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그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려면 좋은 토양과 햇볕이 필요하다. 인연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인연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모르고 오로지 자기 힘만 믿고 미래를 개척하려드는 건 어찌 보면 미련한 짓이다. 인연이라는 절반의 기회를 그냥 내다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력도 좋지만 생각보다 따뜻한 인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아직 당신은 그 인연을 만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2017-11-06 홍창진

[홍창진 칼럼]좋은 선택

'밑져야 본전'이라고 부담없이내가 좋고 이웃도 좋아하는게가장 좋은 선택의 기준오로지 나만 좋은 것은 '최악'남을 생각하는게 많아질수록인생은 더욱 더 즐거워진다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그 선택에는 진학이나 취업, 결혼 등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도 있고, 점심시간의 메뉴선택이나 쇼핑할 때 옷 고르기처럼 가벼운 것도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어떤 것을 취하고, 그에 따라 어떤 것은 버려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결정에 앞서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기준 없이 순간적인 감정이나 남의 말에 휩쓸려 어떤 것을 택했다가 크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봐왔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더라도 내 기준에 따라 소신껏 선택했다면 비록 기대한 결과를 맞지 못하더라도 미련이 남지 않는다. 오히려 배움의 계기가 될 수 있다.어떤 사람이 미래의 선택을 위해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과 미래의 행복지수를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늦게까지 술자리를 하는 바람에 대리기사를 부른 적이 있다. 집으로 귀가하던 중에 그로부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그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안마시술소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자기 가게까지 차렸었다고 한다. 다섯 형제가 모두 그 일에 뛰어들어 저마다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가 운영했다는 안마시술소는 성매매로 돈을 버는 업장이었다. 한창 잘나가던 차에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쫄딱 망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세상에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뒤이은 이야기는 더 나를 놀라게 했다. "이제 제 나이 사십입니다. 언젠가는 꼭 그 사업을 다시 일으켜서 성공할 겁니다."결의에 찬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양심적 가책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나를 성당마당에 내려주고도 "성당 신부님이네?"하며 무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유유히 휘파람까지 불며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나기보다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의 인격 안에는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다. 이웃이라는 말은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언컨대 그 사람은 사업에 성공해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100이라고 한다면, 그중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행복은 1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아니라고 반박하고 싶다면, 행복을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그나마 그것도 일시적인 것일 따름이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내가 성인군자인 것 같지만, 나는 고귀한 수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챙기게 마련이고 나 역시 그렇다. 즉, 사람이란 존재는 일단 내가 먼저 만족해야 이웃이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했을까.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은 우선 나 자신부터 챙기고 보는 인간의 속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내 몸을 아끼듯이 이웃도 좀 생각하며 살라는 말인 것이다.그런데 막상 그렇게 살아보면 그 삶이 제법 재미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감사의 말로 가슴이 벅차오르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법 인기도 생긴다. 그럴수록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샘솟고, 불가능한 일마저도 능히 해 낼 힘이 생긴다.우선 선택의 기준을 세워보자. 밑져야 본전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의 기준을 세워봅시다. 선택을 할 때 가장 좋은 기준은 우선 내가 좋은 것, 그리고 이웃도 좋은 것이다. 오로지 나만 좋은 것은 최악의 기준이다. 대단한 선택이 아니더라도 모든 선택은 크든 작든 남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왕 영향을 미칠 바엔 좀 자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면 좋지 않을까?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을 생각하는 선택이 많아질수록 인생이 즐거워진다"고 말이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9-25 홍창진

[홍창진 칼럼]욕구는 본능, 그러나 욕심은 인격

불륜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금기깼어도 머물진 마라'가 정답이혼하고 새로운 사랑 이루고아름다운 제2의 인생 꿈꾸지만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상처주고 본인 괴로움에 결국 '끝'성경에 나오는 십계명 중에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다. 그런데 십계명 안에는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도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 안에 포함될 상황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는 느낌이 든다.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 세운 법으로 가장 중요한 규율만을 고르고 골라 열 개로 추린 것인데, 한 번의 설명으로 족할 이성 간의 스캔들 금지 조항을 두 번이나 다룬 게 이상하지 않은가?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당시에 그만큼 간음죄가 빈번했다는 뜻인 것이다. 얼마나 남녀 간에 사고가 많이 터졌으면, 추리고 추린 열 개 조항 안에 이성 관계에 관한 금기를 두 개나 넣었겠는가?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배우자 하나로는 만족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신에게 받은 계시대로 십계명을 세운 모세도 남녀 문제로 골치를 썩었을 것이다. 말 안 듣는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신이 점지한 땅에 무사히 도착하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남녀 문제로 저희들끼리 치고받으니, 내 짝 아닌 사람을 넘보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한 것이다. 어찌 보면 칼부림 끝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계명일지도 모르겠다. 싸움이 살인으로 이어지던 고대에 비해 지금은 이런 일이 법정에서 해결되니 일면 다행인 것도 같다. 하지만 법으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이 아니어서인지,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가 간통죄를 폐기했다. 그러나 가정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간음에 대한 금기는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본능이다. 왜 이성 간의 사랑은 그토록 변덕스러운 것일까? 한번 사랑했으면 끝까지 사랑하게 둘 것이지, 왜 신은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는 본능을 심어줬을까? 그래 놓고선 또 모세를 내세워 '하나만 누려라. 둘은 절대 안 된다'고 하고, 나 같은 신부에게는 '하나도 안 된다'고 하는지 참 갑갑한 일이다. 금기는 깨지라고 있는 것임을 지금의 현실을 통해 알게 된다(오죽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 땅의 남녀들이 부지런히 이 금기를 깨고 있는 현장의 한가운데 신부가 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현실 파악은 이미 끝났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도시에 사는 보통 남자가 평생 동안 평균 40명의 여자와 관계를 갖고 여자는 15명의 남자와 관계를 갖는다고 한다.50대 중년 남자가 있다. 어느 날 30대 여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고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처녀이고 자신은 유부남이다. 그 남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제어 기능을 상실한 남자는 여자를 잡는다. 에로스적 사랑은 감정이 먼저 작용하므로 그냥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의지를 작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40대 여성이 있다. 골프 동호회에 나갔다가 남자 하나가 눈에 쏙 들어온다. 그는 돌싱이고 본인은 유부녀다. 남자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 여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여자는 잠시 갈등하지만 남자의 구애를 핑계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두 사람 모두 금기를 깨고 빠지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금기를 깼어도 머무르진 마라"이다. '이혼하고 새로운 사랑을 이루리라!', '아름다운 제2의 인생을 살아보리라!'. 그 순간에는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여러 사람 상처 주고 그 결과로 본인들도 괴로워하다가 결국 끝을 보게 되어 있다. 배우자의 불륜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나를 찾아와 피 토할 것 같은 심정을 쏟아놓는다.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이글거리는 눈빛이 정말 무섭다. 그들의 저주가 이렇게 생생한데 새로 찾은 사랑이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8-21 홍창진

[홍창진 칼럼]보람 있는 직업 찾기

'내 천직은 뭘까?' 자신에게 묻자답하기 어렵다면 일단 저지르자감당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되레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재능에 따른 직업 택해야 행복사람이 평생 동안 일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영국의 일간지 '더 선, THE SUN'에 따르면 인간의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봤을 때 그중 일하는 시간은 26년(시간으로 치면 22만7천760시간)으로 일생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잠자는 시간은 25년으로 두 번째였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은 이보다 더하지 않을까? 세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낸다.그렇다면 어떤 직업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까?불교에서는 현재의 직업은 전생에 자기가 했던 일이라고 한다. 목수의 재능을 잘 발휘하는 사람은 전생이 목수였다는 것이다. 전생의 목수가 현생에 목사를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즉, 불교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천직이 있으니 그것은 전생에 했던 일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현생의 직업을 고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전생에서 이미 했던 일이니 현생에서는 더 잘한다는 의미이겠다.아는 스님께 "전 전생에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지금 사제 일을 이만큼 잘하시는 걸로 봐서 신부님은 전생에 틀림없이 스님이었을 겁니다"라고 했다. 스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다행히 천직을 찾은 듯하다.천직이 전생에 하던 일이라는 것,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타고난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갖추었음을 의미하니, 곧 전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전생의 직업을 찾는 일은 참 흥미롭다. 과연 내 전생의 직업은 무엇이었을지, 타고난 재능이 무엇인지(남보다 더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 게 재미있지 않을까?문제는 남보다 월등한 능력을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적성검사 따위는 그저 내 성향을 알아보는 정도의 기능일 뿐, 정확히 내 재능을 찾아주지는 못한다. 자기 재능을 찾기 어려운 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하는 건데, 사실 그걸 확인하기도 쉽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우선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왕이면 타고난 재능, 그러니까 남보다 더 잘하는 일을 찾아 그에 맞는 직업을 택하는 게 좋다고 본다. 절대 음정을 타고났는데 돈벌이가 안 된다고 음악을 하지 않고 고액연봉의 회사원이 된다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아는 지인 중에 베스트 급에 속하는 기타리스트가 있다. 이 사람은 중학교 때 아버지에게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당대 최고라 일컬어지는 기타리스트를 데려와 아들을 테스트했는데, 그 사람 입에서 "이 아이는 천재입니다"라는 말이 나왔다.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에게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기타공부를 하라고 말했다. 그 기타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를 그만두려니 처음에는 불안했는데, 돌이켜보니 다른 형제들처럼 학교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제 인생은 너무 불행했을 겁니다."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느 세월에 재능을 찾고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미 오래전에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인내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더라도 천직을 찾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노력하다 보면 제2의 인생을 선택할 기회는 분명히 찾아온다."저는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젊은 친구들이 종종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때 나는 되묻는다. "잘하는 게 없으면 큰일 나나?"잘하는 게 없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할지 모른다. 딱히 잘하는 게 없으면 주어진 일에 편견 없이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단 그나마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되는 일부터 시작해보라고 말해준다. 일단 시작하고, 내가 이 일에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지 남과 견주어 보라는 거다. 실력이 떨어진다 싶으면 다른 것을 찾아 또 시도해보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이거다 싶은 일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재능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시도했다가 멈추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변경'이다. 그런 변경은 얼마든지 해도 된다. 천직이라고 느껴지는 직업을 찾을 때까지 자신 있게 변경해보자.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 천직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과연 내 천직이 맞을까?질문에 답을 찾기 어렵다면 한번 저질러 보라. 가진 걸 다 걸고 저지르는 건 부담스러우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자. 천직을 찾는 건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을 즐겁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결혼을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행복한 것처럼, 직업 역시 재능에 따른 천직을 택해야 행복할 수 있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7-17 홍창진

[홍창진 칼럼]진정한 소통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미루고아랫사람, 윗사람 막힌 사고 원망그러나 소통엔 순서가 없다누구랄것 없이 먼저 솔직하게진정한 모습 보여주는용기있는 고백만 있으면 가능한국 근대사에서 천주교 신부들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일이 거론될 때마다 항상 화제에 오르는 주교 한 분이 있다. 당시 광주대교구를 맡았던 그 주교는 목숨이 위협받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5·18의 진실을 담은 서신을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전했다. 또한 서울대교구 등 외부로부터 어렵게 지원금을 받아 오갈 데 없는 부상자들을 보살폈다. 이런 노력으로 전국 각 교구에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들도 진실을 바로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군부로부터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분은 소신을 꺾지 않았다. 지금도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며,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큰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분의 삶에서 정말 감동받은 것은 그분의 행적 때문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외부에 진실을 전하고 진상 규명에 앞장서기까지 그분께는 차마 고백 못할 인간적인 번뇌가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대교구청은 주요 집결지인 금남로에 있었다. 특히 교구장 집무실은 금남로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건물 중앙에 있었다. 그런데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계엄군의 추격전이 살벌하게 벌어지던 어느 날,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주교 눈에 계엄군의 곤봉에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시민 한 명이 보였다. 하지만 주교는 피가 바닥까지 흐르는 광경을 보면서도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후, 또 어느 집 앞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젊은이를 발견했지만 돕지 못하고 외면하고 말았다. 또한 수천 명이 무고하게 잡혀간 것에 대해 시국미사를 드리려고 했지만, 미사 직전에 군인들이 성당을 에워싸고 위협하는 바람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미사를 포기했다. 이 일은 두고두고 그 분을 괴롭혔다. 용기가 없어 사람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 사제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주교로서 외압이 두려워 미사 집전마저 포기했다는 사실이 심한 양심의 가책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천주교의 주교는 신부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사제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것은 물론, 위기의 순간 귀감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런데 숨어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주교의 모습이 사제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광주대교구 신부들은 그분을 찾아 따지듯 물었다. 신부들의 아버지로서 이 중요한 시기에 어떻게 침묵만 지키고 있느냐고, 무고한 시민들이 쓰러져가고 있는데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이다. 사제단은 원망과 분노의 눈초리로 주교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주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주교는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총칼이 난무하는 현장을 보고 너무 두려웠습니다. 용기가 없었던 본인을 용서해 주십시오."천주교 주교에게는 교구 내에서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다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이 있다. 그 주교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제들을 자신의 직분으로 얼마든지 내쫓아버렸을 수 있었고, '침묵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적 행위'라는 말 등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두려웠다'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었다. 사제들을 이끄는 대주교입장에서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주교의 숨김없는 고백에 사제단은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해산했다. 그 고백 이후 주교는 비로소 부끄러운 기억을 딛고 5·18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진정한 소통이란 바로 용기 있는 고백에서 나온다. 보통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소통을 미루고 아랫사람은 늘 윗사람들의 막힌 사고를 원망한다. 그러나 소통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솔직하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용기만 있으면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6-12 홍창진

[홍창진 칼럼]죽음은 삶의 거울

죽음의 두려움 없애는 방법은하루하루 불평불만없이 사는것주어진 인생 잘 살아가다 보면마지막 순간엔 행복한 죽음 맞아늘 감사한 일과 마음 갖게 되면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워사람은 본능적으로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의학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죽음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세상 어떤 사람도 죽음을 앞서 경험해본 이는 없기 때문이다. 무덤에 묻혔던 이가 다시 깨어나 증언하지 않는 한, 사실 죽음에 대해 명확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웃는 얼굴로 맞을 수는 있다고 본다. 직업상 죽음을 참 많이 봐 왔다. 신부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찾아가 행하는 종부성사(임종 전에 치르는 천주교 의식)이다. 신부들은 24시간 전화기를 켜두어야 한다. 급한 임종은 대개 밤과 새벽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에, 취침 중에라도 항상 대기모드로 해 둔다. 30년 가까운 시간, 한 달에 많게는 수차례씩 임종을 지켜보다 보니 죽음을 목전에 둔 얼굴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분이 지금 천당으로 가고 있는지 지옥으로 가고 있는지 말이다. 차분하고 평안한 얼굴로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죽음 직전의 얼굴이 평생 살아온 인생의 지도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일 없이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산 사람은 떠나는 길의 표정도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웃음으로 생긴 잔주름과 잔잔한 입가의 미소가 눈물겹게 아름답다. 그러나 자기만 위하고 가족과 이웃을 외면하며 살았거나, 성공을 추구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내면의 자아를 학대하며 산 사람은 마지막 생명줄을 부여잡고 괴로워한다. 죽음 직전에 지나간 날들이 후회스러워 편히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표정에 괴로움과 회환이 가득하지만, 종교의식 한 번으로 그 표정을 바꿀 수는 없다. 잘못 살아온 삶의 대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 고스란히 받아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내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 곧 언젠가 맞이할 내 죽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거울 속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그 얼굴이 바로 당신이 죽을 때의 얼굴입니다."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찬찬히 응시하면 거울 속 내 모습은 매번 다르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 날이면 거울 속 내 얼굴이 빛이 난다. 주름도 좀 없어진 것 같고 눈가에 생기가 돌기도 한다. 그러나 나만 생각하느라 가까운 사람을 등한시했거나, 불평불만으로 하루를 보낸 날이면 거울에 비친 낯빛이 어둡다. 지친 기색 때문에 주름도 더 있어 보이고 분노, 얼울함, 후회 등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눈빛도 흐려 보인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고 생각하면, 결국 매일매일을 잘 살면 인생을 잘 사는 게 된다. 인생을 잘 살면 곧 마지막 순간에도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결국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하루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다. 매 순간 있는 힘껏 잘 살면 죽음의 공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죽음의 공포 대신 '한세상 잘 살았다'는 충만감이 자리하게 된다. 일전에 일주일 정도 단식을 한 적이 있다. 이틀이 지날 무렵부터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렇듯 결핍은 아주 작은 일에도 우리를 감사하게 만든다. 결핍 중 최고의 결핍은 죽음이다. 죽음이 예고 없이 찾아든다는 것을 늘 기억한다면 우리 사람은 감사한 일로 넘쳐나게 된다.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면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삶은 즐거워진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5-08 홍창진

[홍창진 칼럼]이제 다시 현실

흙수저라는 허울에 사로잡혀일상의 기쁨 외면하며 살면 안돼행불행은 타고난 환경·스펙 아냐가난하다고 행복까지 포기 말자더 정의롭게 더 사랑하며 사는게우리 흙수저들의 당당한 권리다민심이 모여서 정의를 이루었다. 민주사회는 국민이 주인이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보다 더 공정한 사회가 될 것이다. 계층 간의 격차가 해소되고 공정한 경쟁사회를 희망해 본다. 그러나 이런 희망이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대다수가 흙수저이고 당분간은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수년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오던 A군.그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밤낮으로 공부한 끝에 드디어 군청에 출근하게 되었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매달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태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렸다. 그런데 1년 후 A군은 모텔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싸늘히 식은 그의 주검 곁에 유서 한 장이 발견되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 이렇게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죄송합니다.'A군은 가족들에게 시험에 또 떨어졌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험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매일 아침 출근한다며 집을 나와 길 위를 떠돌았다. 그러기를 꼬박 1년, 매달 부모님께 드린 생활비와 용돈도 실은 대부업체를 통해 마련한 것이었다. 올해 초 많은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던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신문 사회면에 작게 실렸던 이 사건이 유독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았던 건 벼랑 끝에 내몰린 그의 고통이 그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흙수저라 불리는 이 시대 모든 젊은이의 자화상이 아닐까?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복권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아무리 노력해도 쥐구멍에 볕들 날을 기대할 수 없다. 부와 가난이 혈연을 통해 대물림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현실 앞에서 젊은이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내가 만나본 젊은이들은 절대 이런 일로 부모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을 안고 꿋꿋이 살아온 부모를 애틋하게 생각한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A군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젊은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 기죽지 말고 당당해져야 한다. 열악한 현실이 원망스럽기는 해도, 어떻게든 내 삶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갖은 구박을 당하고 휴일도 없이 일하면서도 가족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어 보이는 우리가 아닌가? 그런 고통을 말없이 떠안고 있는 것만으로 자긍심을 갖기 충분하다. 중요한 건 흙수저로 대변되는 우리 젊은이들은 하나도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에 눈 밝고 가족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주어진 여건 안에서 자기 계발도 하고 내 인생을 소중히 가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의기소침할 이유가 없다. 떳떳하게 목에 힘주고 살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맞서 이겨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의무에 앞서 우리 스스로 활기를 찾을 필요가 있다. 분노하고 원망만 하며 살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다. 문제 해결도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즐기고 누리는 중에 해야 한다.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하고 갈 길이 구만리이지만, 흙수저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일상의 기쁨들을 포기하며 살지는 않았으면 한다. 금수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한 건 아니다. 행불행은 타고난 환경이나 스팩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가, 내가 얼마나 사랑하며 사는가에 달렸다. 가난하다고 행복을 포기하진 말자. 더 정의롭게, 더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흙수저들이 누려야 할 당당한 권리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4-03 홍창진

[홍창진 칼럼]인연(因緣)과 우연(偶然)

어지러운 우리나라 현실 보며너무 내 중심적으로만 안 봤으면사건에 의도한바 있으리라 믿고진지한 태도로 조용히 맞이해야내가 할 몫 차분히 찾는게 중요내가 신부가 된 것은 어느 신부님의 권유로부터 이루어졌다.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만일 신부가 되지 않았으면 뭐가 됐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 신부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신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신부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신부가 되지 않았더라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인생을 택하지 못해 아쉬운 건 아니다. 남들 눈엔 성직자 생활이 갑갑해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 더 즐겁고 신나게 살고 있다.그 옛날 우연히 사제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나는 지금도 내 곁에서 일어나는 작은 우연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궁금하거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행동에 옮긴다. 그런 작은 경험들이 또 다른 경험을 불러오고, 결국엔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이루게 한다. 성직자라는 틀에 갇혀 외길 인생만 고집했더라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인생의 즐거움은 이렇듯 예기치 않은 우연에서 찾아온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된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우연한 일, 예기치 않은 인연으로 행복해진 분들이 꽤 있다.지인 중 미국 글로벌 기업에서 꽤나 잘나가던 50대 여자 분이 있었다. 그분이 한창 바쁘게 생활하던 중 몸에 조금 탈이 나 치료차 한국에 잠시 들어오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휴가를 얻은 그분은 치료 기간 중에 그동안 다니지 못했던 여행을 하고 업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많은 사람과 만남을 가졌다. 한마디로, 계획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늘 정해진 틀에 갇혀 살던 그분에게 한국에서의 시간은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그러던 차에 우연히 어느 시골 마을에 가게 되었다. 마을 풍경은 무척 정겨웠고, 며칠 머무는 동안 소박한 시골 생활이 자신과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작은 경험을 통해 그동안 미국에서 화려한 삶을 살아왔지만 정작 그 속에 자기 자신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그분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골행을 택했다. 지금은 그간 해온 직장 경험을 살려, 동네 주민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인터넷으로 거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수입이야 전에 비할 것이 못 되지만, 그분은 무척 행복해하고 있다. 시골 생활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생을 함께할 짝도 만나게 된 것은 덤이다.이 두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신이 우리와 이야기하는 방법이 바로 인연과 우연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은 침묵하는 존재다. 그러나 신은 우리 곁에서 사람과 사건을 만나게 하시면서 우리와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사건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모두 신이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내가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내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신의 프로포즈라고 생각하면, 생각하고 느낄 일이 너무 많다.요즘 어찌 보면 어지럽게 진행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너무 내 중심으로 바라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사건들 안에 신의 사랑과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라는 진지한 태도로, 보다 차분히 맞이해야 한다. 내 욕망으로 바라보면 너무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그러나 신과 함께 이루어지는 미래라면 많은 부분 신에게 맡기고, 내가 해야 할 몫을 차분히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2-27 홍창진

[홍창진 칼럼]요즘도 점을 치나요?

비전 확실한 사람은 뭘할지 안다미래가 궁금하지도 않고한걸음 더 가기위해 노력할뿐기대에 못 미쳐도 실망하지 않고'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하며흔들림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난다2016년 후반부터 2017년 전반을 보내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기존의 틀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류가 경험했던 대략의 통계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준비를 하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평가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비선과 편법이 난무하면서 미래는 혹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짝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결과의 성과를 자기 노력에 두지 않고 운의 결과에 기대고 싶어 한다. 즉, 운이 좋아서 성공했고 운이 나빠서 실패했다고 결론을 맺는 것이다. 그래서 연초만 되면 한해의 운을 점치고 싶은 심정이 돼서 점집이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점을 업으로 삼고 사는 지인이 있다. 이 분 말에 의하면 이 일을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이제는 문턱을 넘는 손님 얼굴만 봐도 딱 견적이 나온다고 한다. 사주를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미래가 어떨지 바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주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는데, 내일모레 죽을 팔자인 사람이 멀쩡하게 잘 사는 경우도 있고, 관운이나 돈복을 타고난 사람이 하는 일마다 쫄딱 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정해진 미래는 없다. 없어야 미래지 미래가 정해지면 어찌 미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분은 점 상담을 마칠 때 쯤 이런 말씀을 덧붙인다고 한다. "점은 딱 기상청 날씨 예보 정도로 생각해라. 정확히 맞추지는 않는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지만 혹시나 하여 우산을 챙길지 말지는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치과의사를 하는 제자가 SNS에 남긴 사연이다. 우리 직원들의 주당 근무시간은 37.5시간 정도이다. 주 1회 평일 휴무에 월 2회 토요일 휴무. 휴가는 4일 주는데 위 휴무와 연결시키면 일요일부터 일요일까지 8일 쉴 수가 있다. 직원들 안 갈구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면서 수직적 리더십 보다는 수평적 리더십을 추구한다. 진료의 원칙을 지키면서 치과의사로서의 기본을 잃지 않으려고 하니, 직원들이 본인 가족, 친지들의 치료를 믿고 맡긴다. 이렇게 하니 떨어져 나갈 직원은 떨어져 나가고 제대로 된 마인드를 가진 직원들은 오래 남고, 자기 할 일을 스스로 한다. 직원들의 인복은 이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지극히 상식적인 이 진리를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내게 벌어진 모든 일은 결국 내가 한 선택과 행동의 부산물일 뿐인데, 이를 잊고 미래를 알고 싶다며 점집을 찾는다.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온다. "도무지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럴 땐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물을 게 아니라 '왜 내가 해야 할 행동을 모르는지…'를 자문해 봐야 한다. 흔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삶에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비전이 확실한 사람은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정확히 안다. 따라서 미래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자신의 비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따름이다. 또한 미래를 불안해하기보다, 오히려 오늘을 사는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겨도 이를 신나는 도전으로 여기고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그 결과가 바라는 대로 나타나면 좋고, 설혹 기대에 못 미쳐도 실망하지 않는다. 어떤 결과도 내가 가진 비전을 흔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실패란 그저 보완해야 할 지점을 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실망할 수는 있어도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뭐'하며 훌훌 털고 일어난다.반면 자신만의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세상이 정한 기준대로 돈과 명성을 쌓아 남 보기에 근사하게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한다. 생각 자체가 막연하니 무슨 행동을 취할지도 막연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흔들려 갈팡질팡한다. 그러면서 점집을 찾아다니거나, 내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러 다닌다. 또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실망하면서 모든 걸 운명 탓으로 돌려버리게 되는 것이다.운명은 정해진 것이 없다. 내가 오늘 만든 역사가 훗날 나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2-06 홍창진

[홍창진 칼럼]희망을 희망합니다

국민들 피땀어린 광장의 촛불로새로운 정부 세워놓으면정치는 또 옛 악습을 되풀이한다재화만을 탐하는 욕심쟁이들은오늘도 불의를 공모 하겠지만희망을 둔 사람 꿈은 깨지지않아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지점은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분업화된 사회구조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큰 자본의 유동으로 생겨난 대량 생산체제는 소비패턴을 바꾸었고 분업화를 촉진시켰다. 생산을 하는 사람, 유통을 하는 사람, 그것이 잘 되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연구직, 금융직, 서비스직, 교육직 등등 각각의 역할을 맡아서 자기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만 되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살고 있다. 자기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되고 만일 자기분야에서 인정 못 받으면 낙오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엉뚱한 낙하산이 인정받고 기회의 균등이 깨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학생 때 열심히 노력하면 취직은 될 줄 알았는데 취직도 힘들고 취직을 해서도 보람보다는 눈치를 보며 윗선을 늘 신경 써야 하며 불의한 경우를 직면해도 나 하나 살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상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 현대는 물질로는 더 할 나위 없이 그 전보다 풍요로운데 우리 삶은 점점 더 자유가 없고 일의 양만 폭주한다. 현대는 무엇인가 큰 손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고 우리는 그 연출이 정해 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알다시피 그 연출은 거대 자본이다. 자본을 개인이 독식하고 움직이면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우리 몫의 권력을 정치에 저금해 두었으므로 선거를 통해서 정치인들로 하여금 자본이 우리를 위해 잘 움직이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이 정치가 개인 자본가와 손을 잡고 우리를 위해 힘을 쓰지 않고 자기들만을 위해 힘을 쓰는 범법을 저지르는 순간 우리는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오래전부터 정·경유착이 이루어져 왔겠지만 최근 대한민국 현실은 그 유착이 극에 달해서 국민들의 체감온도가 바로 느껴질 만큼의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 몫의 권력의 일부를 맡겨 놓았던 정치인들이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를 이용했다. 그래서 국민들은 대의정치의 룰을 잠시 내려놓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많은 부분이 촛불의 심판으로 바로 잡아 질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촛불은 약 10년 주기로 계속 반복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국민들의 피땀어린 광장의 노력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워 놓으면 정치는 또 옛 악습을 되풀이 한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 희망이라는 것이 고작 10년 짜리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희망이라는 것은 이제 가치가 없는 것일까?2000년 전 예수 시대에도 정·경유착이 있었다. 식민지시대에 로마총독에게 빌붙어먹던 사람들은 호가호식했고 또 그 자손들이 호가호식한 일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예수시대 말고 다른 여러 문명의 역사를 보아도 불의한 욕심꾸러기들은 호가호식하고, 착하게 열심히 일하는 자본 없는 사람들은 착취당하고 노예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이런 현실 속에서 예수라는 사람의 존재방식이다. 욕심꾸러기를 대하는 방법이 남다르다. 보통은 정의로운 여러 사람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탈취한 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수는 그들을 그냥 무시하고 백성들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쳤다. 즉, 세상에서 돈이라는 한 가지 가치만을 논하면 정의는 시시비비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삶을 돈의 가치로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가치로 보면 용서를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세상을 물질로만 이해하면 네 것 아니면 내 것인데 내 것을 네가 조금만 더 가져가도 불의한 것이다. 그러면 정의의 사도로서 싸우든, 악당의 입장에서서 싸우든,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현실은 인간이라면 모두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욕심이 있는 한 우리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세상에서 평생 싸움만 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세상의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하늘나라에서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3형제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의 수술비 3천만원 때문이다. 산술적으로 보면 각각 1천만원이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그러나 각자 우는 소리를 내며 어려운 사정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가장 형편이 어려운 막내의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수술비 결제를 끝냈다. 3형제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고맙다는 말보다 건방지다는 뒷담화만 무수히 남겼다. 막내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런 일 해야 인정받아요. 저는 살아보니까 내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면 누구의 뜻대로 인생이 결정될까요? 하늘의 뜻대로 되더라구요."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들은 더 현실적이고 혁명적이며 구체적인 사람입니다. 잘못된 종교의 신봉자처럼 주술적으로 하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 우정, 평화, 나눔 등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많은 재화만을 가지려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모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따라갑니다.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는다면 희망이 보입니다. 세상은 10년 주기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욕심쟁이들은 오늘도 불의를 공모하겠지요. 그러나 하늘나라에 희망을 둔 사람들은 희망이 꺼지지 않습니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7-01-02 홍창진

[홍창진 칼럼]집단 우울

부정시스템으로 운영된 나라이 사실 안 국민들 우울증에 빠져촛불집회로 '대통령 하야' 외침은건강한 의사표시라고 생각된다증상 제거하려면 최선 다해청렴한 사회 만드는데 앞장서야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집단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의 원수가 국가의 헌법을 송두리째 농단하고 반성과 사과는커녕 대통령직에 보장된 불기소특권을 누리면서 법 뒤에 숨어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상식도 없고 심지어 부끄러움도 모르는 대통령을 대하는 국민은 짜증을 넘어 집단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우울증의 가장 큰 특징은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욕은 모든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삶을 지탱하는 기둥인 것이다. 우울증은 이 기둥이 흔들리는 현상이다. 일상의 삶을 하루하루 어렵게 지탱해 온 서민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일 할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축구선수가 하루에 12시간씩 땀 흘리며 연습을 하고 시합에 나갔는데 심판이 공정한 규칙에 따라 집행을 하지 않고 상대방 편만 들어 주어서, 알고 보니 상대방 감독에게 거액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해 동안 이런 부정 판정이 지속되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축구 연습 할 맛이 나겠는가? 그래서 연습할 의욕이 생기지 않고 온 몸에 힘이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축구라는 한 분야가 아니라 나라가 송두리째 부정의 시스템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전 국민이 인지해 버렸으니 전 국민이 집단 우울증에 빠져 버린 것이다. 매 주말마다 계속되는 촛불집회는 이 집단 우울증을 해결하려는 국민 스스로의 대단한 노력이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그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물론 법리적으로야 증거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난리들을 피우지만 이 사회는 법리로만 인지되는 사회는 아닌 것이다. 이 사회는 법리라는 좁은 범위보다 훨씬 커다란 도덕과 상식이라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있다. 따라서 우리가 작금에 겪고 있는 집단 우울증의 원인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대중 집회를 통해 하야를 외치는 것은 건강한 의사표시라고 생각한다. 이 의사표시는 어떤 형태로라도 만족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되리라고 생각한다. 둘째, 우울증의 원인을 알았으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제거의 방법은 청렴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를 가꾸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과 대의정치에 입각한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정치인이 아닌 이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집단 의사표시와 선거를 통한 직접 항의 밖에 없다. 이렇게 놓고 보면 또 우울해진다. 정치인이 우리를 대신해서 잘 해 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우울해질 수는 없다. 우울증 극복의 마지막 시술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이다. 이 사건이 내 잘못으로 비롯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고 최선을 다 한 이상 나머지는 神에게 맡기고 내 삶을 유쾌하게 진행해야 한다. 어쩌면 흉한 진실을 본 사건이지만 신이 아니었다면 작금의 진실도 세상에 영원히 묻혀 질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 세상 돌아가는 현상은 선과 악이 항상 공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악의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선이 그 어둠을 뚫고 선한 역사를 만들어왔다. 선이 자라는 와중에도 악은 다시 똬리를 틀고 선을 농락하고 짓밟으면 다시 선이 그것을 극복해 올 것이다. 악의 연대가 커질 때 우리는 저마다 무관심이라는 태도로 그 연대에 가담해 온 것도 사실이다. 내 가족의 생계 앞에 어쩔 수 없이 눈 감아야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작금의 현실과 같이 사회적 대재앙이 닥쳐왔을 때 우리의 소심함도 둘러보고 비록 우울함의 찌꺼기가 내 맘을 긁고 있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툭툭 털고 유쾌하게 내 길을 가야 한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6-11-28 홍창진

[홍창진 칼럼]'비밀 없는 사회'

사회 큰 범죄는 큰 권력에 의해은폐·조작 되는 경우가 많지만역사는 놀랍게도 세월이 지나폭로되게 된다는 사실 가르쳐잘못했다면 시인하는게 좋겠다살기좋은 사회 우리가 만드는 것9·11테러가 있고 그 해 크리스마스를 지날 무렵 보스턴글로브 신문은 빅뉴스를 터트렸다. "보스턴지역의 천주교 사제들의 6%가 아동 성추행범으로 입건되었으나 천주교 측과 권력이 이 사실을 계속 은폐해 왔다"는 것이다. 입건된 사제의 숫자만도 87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입건되지 않은 건수를 포함하면 엄청난 사건이다. 신문에 이 기사가 발표되자 수만 통의 제보전화가 신문사에 걸려왔고 후속 기사로 다룬 건수만 600여 건이나 되었다.최근 대구시에 '희망원'이라는 시설을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각종 비리가 폭로되었다. 시설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와 회계의 비리까지 총체적인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교적 비리 없고 정의로운 종교조직으로 알려졌던 한국천주교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고 김수환 추기경은 "언론이 진실을 말하면 우리 사회가 행복해지고, 진리를 은폐하고 왜곡하면 우리 사회도 불행해진다"고 말했다.언론과 같이 사회 구성원을 이루는 정부, 교회, 사회단체가 잘못된 사회현상에 대하여 자기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에 진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면 이 사회는 불행해진다. 그래서 가장 먼저 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비교적 최근 발생한 미국 천주교 보스턴교구에서 일어난 엄청난 범죄를 먼저 반성하고 싶다. 그 당시 천주교회는 교회의 이미지를 정의보다 더 중요시하였다. 교회의 이미지는 진실 위에 존재해야 그 빛을 발한다. 그러나 진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였다. 검찰과 법원을 회유하고 정치인과 손잡고 교묘히 은폐하고 왜곡하였다. 심지어 대부분 가난한 피해자 가정의 부모를 금전이나 엉뚱한 신앙심을 강조하는 식으로 조직적으로 회유시킨 점은 큰 범죄에 해당한다. 또 이런 천주교회의 조직적 범죄가 횡행하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눈감고 피해갔다. 현재 대구에서 발생한 희망원 사건도 정의로운 자세로 철저히 반성하고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충 무마하고 넘어가려 했다가는 다시 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사람은 누구나 잘못 할 수 있다. 종교인이라도 이것은 예외가 없다. 모두 잘못 할 수 있는 것이 신의 뜻인데 종교인들이 마치 잘못 안 한 것처럼 꾸미면서 거짓 명성과 명예를 유지하는 것은 제일 나쁜 죄이고 신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잘못은 그 즉시 잘못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옳다. 역사는 이런 판단을 지지해 왔다. 그런데 가장 솔직하고 순수함을 유지해야 할 종교가 거짓을 모사하고 세상에 발각되어 그 명예를 실추시켜야 할까? 성폭행 아동 피해는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피해를 겪고 있는데 그 사실을 은폐하는 종교는 큰 죄를 범한 것이다.우리 사회에서 범죄가 벌어지고 큰 권력에 의해서 은폐되는 일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흔히 큰 범죄는 큰 권력에 의해서 은폐, 조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놀랍게도 세월이 지나 이 모든 일이 폭로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왔다.우리는 이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내 주위에 비리와 범죄를 나 하나의 신상을 위해서 피해간다고 역사 앞에서도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더더욱 신 앞에서 자기 양심을 저버리면 마음의 밸런스가 깨져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가장 살기 좋은 사회는 국가청렴도가 높은 사회다. 잘못 했으면 잘못 했다고 시인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측근이 범죄를 범하면 눈 감지 말았으면 좋겠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 노래의 가사말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야,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이 단순한 진리를 아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살기 좋은 사회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홍창진 광명성당 주임신부

2016-10-24 홍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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