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내년 7월 준공 앞둔 '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

연면적 6만4천㎡에 사업비 1542억원900개이상 부스확보 '국제회의' 가능BTL방식 민간사업 20년 임차료 해법'국가적 성격' 정부차원 원조 있어야인천 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이 내년 7월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은 미래형 고부가가치 산업인 '마이스'(MICE, 회의·관광·전시·이벤트) 및 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문제는 운영비(임차료)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은 건립 목적과 효과 측면에서 '국가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입장이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내년 7월 준공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을 내년 7월까지 완료할 계획이다.2단계 사업은 송도컨벤시아 1단계 시설 옆에 연면적 6만4천㎡ 규모의 컨벤션센터를 짓는 것으로, 이 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컨벤시아 전체 연면적이 11만7천27㎡로 확대된다. 2단계 주요 시설은 전시장, 회의장, 다목적 광장, 야간 경관조명 등이다. 총 사업비는 1천542억원이다.2단계 공사는 예비타당성 조사, BTL(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 확정, 사업시행자(더송도컨벤시아 주식회사) 지정 등을 거쳐 2015년 12월 시작됐다. 지난달 말 기준 공정률은 50.2%로,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공정률을 올해 말까지 '7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인천경제청 목표다. 10월부터는 실내인테리어 등 마감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은 인천과 대한민국의 도시·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송도컨벤시아는 2단계 사업으로 900개 이상의 부스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1단계 시설은 전시 부스를 450개밖에 설치할 수 없어서 대형 행사 개최에 한계가 있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2천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국제회의를 유치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판매시설과 다목적 광장 등 편익시설 설치로, 방문객이 늘고 이들의 편의가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예상했다. 다목적 광장은 야외음악회와 옥외 조형물 전시회 등을 열 수 있는 공간이다.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효과로 ▲서비스산업 기반시설 확충 및 질적 향상 ▲상징성(랜드마크) 강화 및 송도국제업무지구 홍보시설 구축 ▲마이스 산업 활성화로 지역·국가경제 활성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인천경제청 "2단계 임차료 국비 지원 필요"송도컨벤시아 2단계는 BTL 사업이다. BTL은 민간이 공공시설을 지으면 국가나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일정 기간 임차하는 방식이다. 송도컨벤시아 임차 기간은 20년(2018~2038년)으로, 임차료 지급을 위해선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은 2010년 10월 기본계획 수립 당시 재정사업으로 계획됐으나, 관계 기관·부처 협의 과정에서 BTL 방식으로 변경됐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을 BTL 방식으로 추진하는 안건(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안)은 2014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초 국가사업으로 제출·추진했으나, 국고 보조 지자체사업으로 수정 의결됐다. 국회가 BTL 방식을 승인하고, 정부가 국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셈이다.인천경제청은 '지역발전특별회계 경제발전계정'에 송도컨벤시아 2단계 임차료를 편성해달라고 산업자원통상부와 기획재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앙부처는 '지역발전특별회계 생활기반계정'에서 2단계 임차료를 확보하라는 입장이다. 생활기반계정은 정부가 지역발전을 위해 각 지역에 주는 것이며, 경제발전계정은 중앙정부가 별도로 지원하는 예산이다. 중앙부처 입장대로 생활기반계정에서 송도컨벤시아 2단계 임차료를 확보하면, 다른 사업에 추진할 국비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시설 임차료 지급을 위해선 당장 내년에 36억원, 2019년부터는 72억 원의 국비가 필요하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2단계 사업은 GCF(녹색기후기금) 유치 당시 정부와 국회에서 국비 지원을 승인한 사업"이라며 "송도 입주 국제기구의 국제회의를 지원하는 시설로, 국가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생활기반계정의 한도액 증액 없이 이 계정에서 임차료를 확보하라는 것은 실질적인 국비 지원이 아니다"며 "생활기반계정에서 20년간 매년 72억원을 쓸 경우, 다른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발생한다"고 했다.송도를 '서비스 산업의 허브 도시'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유효하다. 마이스 산업 육성이 일자리 창출, 외국인투자 촉진, 무역 증대 등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점도 인천경제청은 강조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내년 7월 준공을 목표로 건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인천 송도컨벤시아 2단계 공사 현장. 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효과로 서비스산업 기반시설 확충 및 질적 향상과 마이스 산업 활성화로 지역·국가경제 활성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

2017-09-0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4]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中)

美 유격대서 익힌 영어로 고교 편입 대학 준하는 인천대숙 법학과 수료 제무시 트럭 개조 버스회사 취직 우연히 만난 부대 장교 소개로 공군기지 순환버스 사업 시작 한진에 일감 빼앗기고 이후 연이어 사업 실패 전쟁 등 대비 정부 비상계획 업무 맡아 법원으로 옮기고 인천지법서 퇴직 법무사 자격 얻어 '지금까지…'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미 공군부대를 상대로 운수사업을 했다.이후 법원 공무원으로 일하다 법무사 자격을 얻어 30년 넘게 강화에서 법무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던 해 가을 고향에서 못다 이룬 학업을 마치기 위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는 3학년 때 전쟁이 나는 바람에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1953년 가을, 서울 숭문고등학교 2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20세 때였다. 미군 부대에서 유격대원으로 복무하면서 익힌 영어 실력 도움이 컸다. 숭문고는 1906년 경성야학교에서 출발해 숭문상업중학교, 숭문고등학교로 발전한 역사가 오래된 학교다."중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교장실에서 특별면접을 봤는데 당시 서기원 교장이 영어를 잘한다고 입학을 허락해 줬죠. 그렇게 3학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했어요. 인천 집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타고 다녔어요."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대숙'이라는 교육기관에 입학했다. 대숙은 당시 대학설치기준령이 정한 대학의 조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기능을 하는 교육기관이었다.할아버지는 학교법인 청운학원이 운영하는 인천대숙 법학과를 수료했다. 인천대숙은 1976년 학원비리를 이유로 교육 당국에 의해 폐교 조치 됐다.1960년대 초반 일자리를 알아보던 김은중 할아버지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서울의 한 버스 회사에서 내근으로 일했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이 회사는 군용 트럭에 철판을 덧대 버스를 만들어 운행했다."미군 '제무시' 트럭 후레임을 가져다가 도라무통 철판으로 겉을 둘러싼 버스였어요. 좌석도 요즘 지하철처럼 긴 좌석을 양쪽으로 마주보게 놨죠. 답십리에서 숙명여대, 효창공원까지 다니는 노선이었어요."할아버지가 말한 '제무시' 트럭은 미국 자동차회사 GM 브랜드 중 하나인 GMC가 생산한 트럭을 일컫는다. GMC를 일본식 '지-에무-시' 발음과 유사한 '제무시'로 불렀다. 카고트럭이라고도 하던 GMC CCKW(2.5t)는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한국지엠 쉐보레 공식 인터넷 블로그는 CCKW가 1941년 첫 출시돼 60만대가 생산됐다고 전한다. 91.5마력의 6기통 가솔린엔진에 6개 바퀴가 모두 구동되는 6륜 구동식이었다. 현대자동차가 1997년 창사 30년을 맞아 쓴 사사(社史) '도전 30년, 비전 21세기'는 "한국전쟁으로 모든 공업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오히려 우리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줬다. UN군이 가지고 들어온 엄청난 군수물자와 각종 자동차 부품, 그리고 토막 난 미군용 폐차와 드럼통들이 천막공장으로 들어가면 이내 그럴듯한 자동차가 되어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물자 쟁탈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이었다. 버스회사 대표가 군용 제무시를 뒤로 빼돌렸다가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60년 3월 21일자에는 "육군제15범죄 수사대는 19일 하오 6시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XX교통회사 사장 최OO를 '장물취득' 및 '증회' 혐의로 구속하였다. 최씨는 전방 모 부대에서 부정 유출된 군용 GMC '후렘' 7개를 23만환으로 사서 '뻐스'로 개조하였으며 수사원을 1만환짜리 보증수표로 매수하려 한 것이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할아버지는 버스를 수리하려고 서울 미도파 백화점 인근의 한 정비소를 찾았다가 과거 8240부대에서 알게 된 육군 통역장교(대위)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서울의 버스회사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며칠 뒤 미5공군사령부 계약처장인 모 중령을 소개했다. 미 공군이 한국에 있는 공군기지를 순환하는 버스운행을 민간에 맡기려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른바 '콘트랙트(contract·계약) 버스'였다.할아버지는 고모부와 회사 임원들에게 콘트랙트 버스 사업을 하자고 설득해 제무시 버스 16대를 투자받았다. 버스 내부는 기존 2열 좌석식에서 요즘의 좌석버스식 구조로 변경했다. 콘트랙트 버스는 오산비행장을 근거지로 김포비행장, 김해비행장 등 전국의 비행장을 오가거나 비행장 내부를 순환하는 노선 등 다양했다. 계기판에 찍힌 거리(마일)에 따라 돈을 받았다. 마일 당 계약금액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기억했다.1년 단위 계약으로 4년 동안 콘트랙트 버스를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당시 한진상사 조중훈 회장에게 일감을 빼앗기고 말았다. 1960년대 중반이다. 구식 제무시를 운영하던 할아버지 앞에 조중훈 회장은 신식 일본제 '이스즈(いすず)'버스를 갖고 나왔다. 1916년 설립된 이스즈는 일본 자동차 회사 중에 가장 오래됐다. 지금도 버스와 트럭, 디젤엔진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한다. 한진그룹의 전신 한진상사는 1945년 조 회장이 트럭 1대로 시작한 운수회사다. 한진상사는 전후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미군 보급물자 수송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장했다. 한진상사는 미 8군과의 수송계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957년 주식회사로 성장했고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연평균 300% 급신장을 거듭해 1960년 1년 동안 22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가용 차량이 500대에 이르렀다. 이 무렵 미 공군부대 콘트랙트 버스 사업에까지 발을 뻗었다는 김은중 할아버지의 얘기는 조중훈 회장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한진상사는 이스즈 버스를 들여오면서 관세법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64년 7월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해 1월 한진상사는 이스즈 버스 50여 대를 군납용 명목으로 한대에 2천 달러에 무관세로 들여왔다. 원래는 시가 8천 달러의 버스였다. 하지만 한진은 이 중 15대를 군용이 아닌 경인노선에 투입해 막대한 관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 경인노선에 버스를 투입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관세포탈은 결국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당시 미군 관련 수송사업에 엄청난 이권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 회장이 미군 부대와 연줄도 있었던 것 같고, 뭐 경쟁해서 떨어진 거니까요. 하지만 내가 그때 계속 미군과 인연을 맺으며 운수회사를 발전시켰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죠."한진은 이후에도 미군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쟁 병력·물자 수송 사업(용역 군납)에 뛰어들어 신흥재벌로 급성장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충로 박사가 쓴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를 보면 한진은 1966년 5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1억1천646만3천185 달러의 베트남전쟁 관련 사업 실적을 거뒀다. 이는 전체 용역 군납의 50%, 한국이 베트남 특수를 통해 얻은 수익의 11.5%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로써 한진은 '월남재벌'로까지 일컬어지게 된다.할아버지는 제무시 버스를 다른 버스회사에 팔고 영등포에서 옷 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 중수 사업을 했는데 사기를 당해 한 푼도 못 건지고 엄청난 손해만 입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 사건을 부처님을 위해 '중수불사(重修佛事)'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연이은 사업실패로 돈을 다 잃은 할아버지는 평소 알고 지내던 법무부 과장의 소개로 중앙청 총무처에 들어가 비상계획 업무를 했다. 비상계획은 전쟁 등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하는 정책이다. 지금도 매년 8월이면 을지연습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 민·관·군 합동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만약에 전쟁이 나면 정부부처는 어디로 이동하는지 관공서는 어떻게 피란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관리하는 부서였어요."할아버지는 중앙청에 있다가 법원에도 비상계획 업무가 생기면서 대법원 소속이 됐다. '법원 공무원정원에 관한 규칙' 연혁을 살펴보면 1969년 9월 대법원 조직에 비상계획이라는 업무가 처음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전국 판사의 정원이 455명, 직원이 2천94명일 때였다. 지금은 판사 3천214명, 직원 1만5천755명으로 크게 늘었다. 법원 조직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할아버지도 인사이동 조치 돼 일선 지방법원 재판부의 계장으로 근무했다. 대전, 수원지법 등에서 민사·가사·형사재판 업무 등을 하다 1980년대 인천지법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다. 당시 인천지법은 지금의 인천 남구 학익동이 아닌 남구 주안동 석바위 지금의 인천가정법원 자리에 있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1986년 법원에서 퇴직하면서 사법서사 자격을 얻었다. 사법서사는 지금의 법무사를 말하는데 1990년 법무사법이 생기면서 사법서사의 명칭이 법무사가 됐다. 당시 관련법은 검찰·법원 주사보 7년 이상의 경력 또는 검찰·법원 사무관 5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 사법서사 자격을 인정했다. 할아버지는 석바위 법원 근처에 사무실을 내려고 했으나 지인들의 권유로 출생지인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법무사협회가 1997년에 펴낸 '법무사 100년사'를 보면 1986년 가입한 인천 소속 법무사 명단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온다. 벌써 30년 전이니 피란 이후 절반 가까운 인생을 법무사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은중 할아버지는 지금도 강화군청 앞에서 법무사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지난 29일 인천 강화군청 인근 자신의 법무사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김종호기자 kjh@kyeongin.com위 사진은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 때 사용된 미 군용트럭 '제무시(GMC)'. 전후 운수회사들은 제무시 프레임에 철판을 덧대 버스로 개조했다(출처/한국지엠 쉐보레). 아래는 1950년대 서울 지역에 운행되던 '제무시(GMC)' 버스.김은중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석바위 시절의 인천지법. 오른쪽이 법원, 왼쪽이 검찰청이다. /인천지검 제공

2017-08-30 김민재

자신과의 싸움 이겨낸 '도보 6박7일'

인천바로알기종주단(단장·이동렬)이 지난 26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터뷰실에서 제17회 종주대회 해단식을 개최했다.종주단은 이날 원예은(인천 석정여고1)양에게 최우수상(인천시장상)을 수여하는 등 20명에게 개인·단체 우수상을 시상하고 종주를 완주한 대원들에게 완주증을 전달했다. 또 각 조장과 팀장들이 무대에 나와 종주대회를 통해 얻은 교훈과 동료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원예은 양은 "생각지도 못한 최우수상을 받아서 감사하다"며 "1주일 동안 170㎞를 걸으면서 힘든 것을 이겨내고 자신과의 싸움도 이겨냈다. 앞으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의료팀장으로 봉사한 조성현(26)씨는 "하루 종일 걷고 난 뒤 발에 피로가 오고 물집이 잡힌 친구들을 보살피고 부상을 예방하는 일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며 "의료 환경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법을 배웠고, 앞으로 간호사의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종주단은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5일까지 인천대공원, 계양산, 강화도, 영종도, 문학산 등 인천 전역 170㎞ 코스를 도보로 답사했다. 이동렬 단장은 "6박 7일 동안 고생한 대원들에게 감사하다. 종주기간 동안 새긴 다짐을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며 "앞으로 힘이 닿는 한 종주대회를 이끌겠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제17회 인천바로알기 종주 해단식'이 지난 27일 오후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터뷰실에서 열렸다. 인천의 뿌리를 찾아 170㎞ 대장정을 마친 인천바로알기 종주단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27 김민재

[zoom in 송도]세계최고 패션스쿨 FIT '한국 개교'

세계 최고의 패션 스쿨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지난 25일 입학식을 했다.한국뉴욕주립대학교(총장·김춘호)는 지난 25일 송도 인천글로벌캠퍼스 대강당에서 입학식을 개최했다.이번 한국뉴욕주립대 입학식은 FIT 첫 신입생 50여 명이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FIT 첫 입학식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에서 온 뉴욕 FIT 부총장 지아코모 올리바는 축하연설에서 "FIT 한국 유치를 위해 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과 뉴욕 FIT 조이스 브라운 총장이 지난 2013년부터 많은 논의를 거쳤다"며 "한국 주변 국가 학생들이 FIT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고 했다.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은 "2012년 공과대학인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대학교를 개교했고 이번에 세계 패션 명문인 FIT를 오픈하게 됐다"며 "뉴욕에 소재한 FIT는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 개교한 것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패션 업계 전반에서 활약할 우수한 패션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FIT는 패션디자인학과, 패션경영학과를 개설했으며, 이곳 인천 송도에서 2년간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을 뉴욕 본교나 이탈리아 분교에서 수학하면 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한국뉴욕주립대 FIT가 ▲패션 분야 산학연 클러스터 구축 ▲유통 물류 산업 고도화·활성화 ▲동북아 교육 허브 자리매김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 25일 열린 한국뉴욕주립대 입학식에는 세계 패션 명문 FIT 첫 신입생 50여 명도 참석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08-27 목동훈

[zoom in 송도]IFEZ 글로벌센터 '교육·문화프로그램'

2013년 G타워로 확장이전… 국내 정주 도움문화·역사 강좌·전통문화 체험 등 행사 다양의사소통 불편 해소 '한국어 교실' 최고 인기회의·모임장소 활용… 찾아가는 통역지원도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글로벌센터가 외국인 정주 지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IFEZ 글로벌센터는 송도국제도시 G타워 1층에 있다. 2011년 송도 미추홀타워에 문을 연 글로벌센터는 2013년 G타워로 확장 이전했다. 글로벌센터는 강의실과 휴식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강의실에서는 한국어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회의, 모임, 스터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올 1월부터 7월 말까지 글로벌센터를 방문한 사람은 4천559명.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상담을 받은 사람도 1천369명이나 된다.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 직원과 가족, 송도·청라·영종 등 IFEZ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주로 찾는다. IFEZ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송도 2천499명, 영종 1천201명 등 4천493명(6월 말 기준)이다. 지난 2003년 IFEZ 거주 외국인이 415명에 불과했던 점과 비교하면, 약 10배 증가한 셈이다. 국적별로는 중국이 921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미국인(599명), 한국계 중국인(345명), 베트남(264명), 일본(241명), 타이완(179명) 등의 순이다. 인기가 가장 높은 프로그램은 한국어교실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올 5월29일부터 7월6일까지 IFEZ 거주 외국인 3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2%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음식점 이용 시 불편사항으로는 '외국어 가능 직원 부족'(45%), '영어 메뉴판 부재 및 오용'(29%), '언어로 인한 예약의 어려움'(26%) 등 언어로 인한 불편함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통역이 필요할 때는 친구와 지인(25%), 글로벌센터(17%) 등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한국어교실은 한글반,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생활한국어반, 회화고급반 등 단계별·수준별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어 수준에 따른 맞춤형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수강생은 선착순으로 모집하며, 수강료는 없다. 지난달에는 정규반(초급·중급·생활회화) 116명, 특별반 16명, 기초회화반 30명 등 총 162명이 수강했다. 글로벌센터는 찾아가는 외국어(영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글로벌센터 통역 자원봉사자들은 인천대입구역 등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구간 주요 역사, IFEZ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길을 안내하거나 영어로 안내방송을 하고 있다. 안내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한다. 이들은 외국인들의 병원·은행 업무 지원, 휴대전화·인터넷 서비스 안내 등 행정 지원 서비스도 돕고 있다. 글로벌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행사로는 ▲한국 음식 만들기(분기별 1회) ▲한가위 전통문화 체험(9월) ▲문화강좌(분기별 1회) ▲역사탐방(연 2회) ▲성탄·송년이벤트(12월) ▲인문학 강좌(분기별 1회) 등이 있다.역사탐방, 성탄·송년이벤트 등의 프로그램은 내국인과 외국인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프로그램·행사 일정은 글로벌센터 게시판, 홈페이지(global.ifez.go.kr), SNS(페이스북 등)를 통해 공지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 인천경제자유구역청·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8-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3]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上)

강화 송해면 태생 부친따라 연백으로 '이주'1·4후퇴때 강화도 피란… 일 찾아 인천으로인력시장서 미군트럭에 실려가 유격대 배치오키나와로 간뒤 낙하만 70차례 고강도 훈련"사람 죽이는 법 배워 죽어도 모르는 소모품"8240부대는 미군·국군도 아닌 애물단지 전락이중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대는 존재도 몰라정전 직전 서울로 전입… 2008년 '참전' 인정한국전쟁을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른 한국군은 얼마나 될까. 황해도 연백군 출신의 김은중(83)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목숨을 건 특수 훈련을 받았다. 1958년 창설한 우리나라 육군 특수전사령부보다도 먼저 오키나와에서 공수 낙하훈련을 받았다.1934년 5월 10일 강화군 송해면에서 태어난 김은중 할아버지는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로 이주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연백군으로 넘어가 염전에서 일했다.전쟁은 할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 발발했다. 할아버지는 강화도로 다시 내려와 누나 집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흉년이 심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연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51년 1·4후퇴 때 다시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리고는 또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였다. 동구 송현동 쪽방촌에 방을 하나 얻어 둘이서 살았다.할아버지는 인천항에서 군수 물자 하역일을 했다. 지금의 인력시장처럼 아침에 인천항에 나가 있으면 미군들이 일자리를 배정해주고 급여로 쌀 한 됫박을 줬다고 한다. 10대 후반이던 그때 김은중 할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미군 트럭에 실려가 특수부대원이 됐다. 아마 1951년이었을 게다. 여느 때처럼 쪽방촌 집에서 나와 배다리, 동인천역을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길이었다."열댓 명이 쭉 걸어가는데 미군들이 군용 트럭을 몇 대 세워 놓고 '유(You), 유, 유, 컴 히어(Come here)'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미군 부대에 일하러 가는 줄 알고 트럭에 올라탔어요. 그런데 트럭이 서울로 가더라고. 아버지에게 소식도 못 전하고 끌려갔죠."노량진을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너 용산 부근에 도착했던 듯하다. 미군은 할아버지를 철창에 가두더니 '바리깡'을 가져와 머리를 박박 밀었다. 그리고선 군복과 카빈 소총 한 자루를 주고는 미8군사령부 산하 유격대로 편성했다. 이른바 군번 없는 군인, 미군이 한국인 반공의용청년을 모아 만든 8240부대였다.할아버지는 남양주 덕소로 이동해 몇 개월 훈련을 받다가 1952년 봄 여의도 비행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C-46 수송선을 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몇 시간 뒤 내렸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날씨, 오키나와였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중대 규모의 한국인 병력 100여 명은 산 중의 훈련장에 갇혀 외출도 외박도 없이 근 1년을 훈련만 받았다.할아버지는 기초적인 군사 훈련과 함께 낙하산 훈련, 무술, 인마살상, 폭파 등 그야말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한국에서 간단한 제식, 사격 훈련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병기'가 되는 훈련이었다. 할아버지의 훈련 얘기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에 나온 특공대 684부대의 훈련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은밀히 북파돼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적도 같았다. 젓가락이나 쇠꼬챙이로 급소를 찔러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고, 유도, 검도, 태권도 같은 동양 무술도 배웠다. 끼니는 전투식량 '씨-레이션'이었고, 쉴 틈도 없었다. 영국의 군사 전문가 휴 맥매너스(Hugh McManners)가 쓴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는 한국전에서는 소규모 정예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정찰과 상륙, 폭파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군인이 필요하게 됐다고 설명한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수송기에 타 3천 피트 상공에서 낙하하는 훈련을 70차례 받았다. 낙하 도중에 낙하산을 펼치는 지금의 특전사 고고도 낙하훈련과는 많이 달랐다. 낙하산 고리를 수송선에 걸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낙하를 하다가 잘못 착지한 동료가 목이 뒤로 꺾여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이야 지상으로 착지한 뒤에는 펼쳐진 낙하산을 다시 접는 정비부대가 따로 있지만 당시 오키나와에는 낙하산 정비부대가 없어 펼쳐진 낙하산을 모아 한꺼번에 하와이로 보냈다고 한다.현재 특전사사령부는 예하 특수전교육대 특전장비정비부대에서 낙하산을 포장한다. 강하훈련을 마친 대원들이 낙하산의 먼지를 털고 훼손 등 이상유무를 확인해 반납하면 11단계의 과정을 거쳐 포장병 3인 1조가 돼 낙하산을 다시 접는다. 강하하는 대원들의 목숨과 직결된 작업이다 보니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한다고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특전장비정비부대는 매년 2만9천여개의 낙하산을 정비한다. 1년에 각 부대에서 이 만큼의 공수 훈련을 한다는 의미다.특전사라고 하면 '검은 베레모'를 떠올리지만 할아버지는 '팔각모'를 썼다고 기억했다. 공수훈련을 하면 주어지는 휘장은 동그란 모양에 푸른색 유엔 표식이 있고, 그 위에 낙하산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별도의 부대 마크는 없었지만 소매 안쪽에 부착된 유엔군 표식이 신분을 증명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미군 상사는 할아버지를 '쟈니 킴'이라고 불렀다."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웠어.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린 소모품이었어. 많이들 죽어 나갔지. 죽으면 그냥 땅에다 묻어버리는 거야. 고향 생각이 안날 정도로 정말 쉴 틈도 없이 극한 훈련을 받았어요."낙하훈련 중 목이 꺾여 죽거나 다른 훈련을 하면서 맞아 죽기도 한 8240부대 소속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군의 존재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8240부대 전우들이 많은데 오키나와에서 같이 훈련했다는 전우들은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나도 소식이 궁금해요. 암암리에 운영된 부대였기 때문에 아마 기록에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라고 말했다.우리나라 군인이 오키나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은 육군 특수전사령부 연혁에서 처음 등장하는 데 그게 1958년 4월이다. 그해 4월 1일 용산에서 창설된 특전사 제1전투단 창설대원들은 보름 뒤부터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받았다.연합뉴스 국제부 김선한 기자가 쓴 '세계의 특수부대 비밀전사들 X'는 이들은 한국전 실전 경험이 있는 미 육군 제1, 제77 특전단 소속 요원들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특수전사령부는 1951년 2월 창설된 미8군 소속 제1공수 유격연대, 즉 8240부대를 모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군사편찬연구소가 쓴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도 나온다.할아버지는 왜 멀리 오키나와까지 가서 특수훈련을 받았을까.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령이 되면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다. 전후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가 쓴 '기지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을 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투기와 수송기들은 오키나와 기지에서 한국으로 출동했다. 오키나와 주둔부대는 대부분 한국 전장으로 이동해 전투에 참가했고, 새로운 보병부대가 오면 오키나와에 도착해 3주간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파견됐다.미8240부대 산하 백호유격부대(동키3~4연대)에서 미국 고문관으로 전투에 참가한 벤 S. 말콤(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쓴 '백호부대 유격전사'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유격작전과 관련해 근무하고 있는 미군은 장교 22명과 사병 37명이 전부였다. 이들에게는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도의 전투능력이 필요한 특수부대 양성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들에게 맡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특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지만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2015년 일본 방위성 방위백서를 보면 현재 오키나와에는 미 육군 제1특수부대(공수) 제1대대와 제3해병기동전개부대 사령부 등 6개의 육·해·공군 기지가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 순안비행장 침투작전을 준비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실이 쓴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유격전'에 따르면 전쟁 기간 한국에 있는 8240 유격대는 4천445회의 개별 작전을 수행했고, 작전활동의 93.7%가 황해도 서남부 지역에서 실시됐다. 유격대는 휴전 전까지 6만9천명의 적 살상, 5천 정의 무기노획, 2천700대의 차량노획 및 파괴, 3천800t의 식량노획, 80개의 교량 파괴 등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 3~10배 정도 과장됐다는 것이 존스홉킨스대 연구실의 설명이다.할아버지는 정전협정이 이뤄지기 직전 오키나와를 떠나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한 부대로 전입했다. 자신에게 쟈니 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미군 상사를 따라갔다고 한다. 미 8240부대는 전쟁 이후 미군에도 한국군에도 속하지 않은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8240부대는 편성 당시부터 한국인에 대한 신분을 '군인'으로 명확히 하지 않았다.이후 미국과 한국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진 8250부대로 편입돼 우리나라 국방부의 통솔을 받게 됐다. 하지만 우리 국방부는 이들은 육군으로 배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탈영이 일어났다.할아버지는 8250부대로 편입되기 전 특수부대를 떠났다. 한국군 소속으로 복무한 적은 없지만 징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을 인정받아 2008년 9월 29일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황해도 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오키나와 특수부대에서 죽음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키나와 특수부대는 한국전쟁 유격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초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참전용사에게 수여하는 호국영웅기장을 바라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23 김민재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입학상담 동아시아 콘퍼런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입학상담 동아시아 콘퍼런스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13~15일 국제 대학입학상담학회 동아시아지역 콘퍼런스를 진행했다.이번 콘퍼런스에는 미국 콜롬비아대, UCLA, 보스턴대, 오하이오대, 요크대 등 미주 및 유럽 지역을 포함해 나고야대, 홍콩대 등 전 세계 21개국의 대입 전문가 143명이 참석했다. 국내에서는 고려대, 연세대, 대원외고, 용산국제고 등의 입학 담당자가 참여했다. 외국 대학 대입 전문가들은 글로벌 최신 입시 트렌드를 논의했으며, 국내 대학 입학 담당자들은 한국 대학 입시의 특수성과 지원 절차를 설명했다.콘퍼런스는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교 과정으로 각각 세션을 분류해 원하는 코스에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됐다. 고등학교 코스의 경우, 참가자들의 경력 수준 및 요구에 따라 기본 과정과 심화 과정 중 원하는 세션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특히 중국,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 다양한 동아시아 국가의 입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도 있고 집중적인 토론과 발표를 진행했다.한편,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2018학년 봄학기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번 신입생 모집은 ▲커뮤니케이션학 ▲심리학 ▲영화영상학 ▲도시계획학 등 4개의 학부 과정과 석사 과정인 ▲공중보건학 ▲생명의료정보학 ▲국제법학과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원서 접수는 오는 11월27일 우선 마감, 2018년 1월19일에 최종 마감된다. ■경제청, 송도 11공구 개발·실시계획 변경용역 추진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국제도시 개발계획 및 실시계획 변경 수립용역'을 추진하고 있다.이번 용역은 송도 11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등 기존 개발사업지구에 대한 토지이용계획 재배치가 필요함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송도는 국제업무단지, 지식정보산업단지 등 사업지구별로 개발계획과 실시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중간에 계획이 변경되는 경우도 많아, 송도 전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선 이번 용역이 필요하다.용역 기간은 착수일로부터 36개월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지금의 송도 개발계획이 결정된 지 몇 년 지났다. 그동안 여러 여건 변화가 있었다"며 "특히, 이번 용역은 송도 11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와 대학교 용지 등 11공구 기존 토지이용계획을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인천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에서 '국제 대학입학상담학회 동아시아지역 콘퍼런스'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입시 트렌드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제공

2017-08-20 목동훈

[zoom in 송도]'GTX-B 신설'·도시철도 급행화 가속도

'송도 ~ 마석' 수도권 광역철 추진인천 1호선 '급행열차' 도입 결정송도~계양 - 서울 접근성 편해져'국제회의 복합지구' 지정 계획도인천시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와 연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각 실·국·본부는 '국민이 주인인 정부'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등 5개 국정 목표에서 총 100개의 인천시 연계사업을 발굴했다. '국정과제 연계사업'을 보면, 신규 사업보다는 추진 또는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 많다. 정부의 정책 방향과 함께해 국비 확보와 제도 개선 등 추진 동력을 얻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송도국제도시와 관련된 '국정과제 연계사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봤다.주민들의 관심이 높은 분야는 '교통'이다. 교통 문제는 교육, 녹지, 편의시설, 일자리 등과 함께 주거 지역을 선택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송도의 경우, 공원과 도로 등 도시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서울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인천시는 국정과제 '교통·통신비 절감으로 국민 생활비 절감'과 연계해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B노선(인천 송도~경기 마석, 80.08㎞) 건설을 추진한다.GTX 건설은 서울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으로, 송도 주민 등 시민들의 대중교통 편익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이다.특히 GTX B노선은 최근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에 포함되면서 건설 가능성이 높아졌다.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 2019년 기본계획 고시 및 2020년 사업시행자 선정 등을 거쳐 2021년부터 공사가 시작될 것으로 인천시는 내다보고 있다.'국정과제 연계사업'에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급행화 사업도 포함됐다. 이 사업은 송도국제업무지구와 계양구를 잇는 인천 1호선에 급행열차를 도입하는 내용이다.사업비(예상)는 1천952억원이다. 인천시는 '인천 철도망 효율화 방안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급행열차 도입을 결정했으며, 송도에서 계양까지의 이동시간(현재 54분)이 21분 단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인천시의 광역버스 확충사업도 계속된다. 송도의 경우, 서울 여의도·잠실을 잇는 노선 2개를 추가로 확보해 버스 9대를 투입하겠다는 목표가 있다.인천시는 국정과제 '국민외교 및 공공외교를 통한 국익 증진'과 관련해 국제기구 클러스터를 송도에 구축할 계획이다.송도를 제네바와 같은 세계적 국제기구 집적도시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송도는 공항 접근성이 좋고, 송도컨벤시아 등 회의·전시·관광·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송도에 입주해 있는 국내외 대학·기업과 협력도 가능하다.이와 관련, 'GCF(녹색기후기금) 활성화를 통한 녹색환경 금융도시 송도 건설'은 문재인 대통령 지역공약에 반영된 상태다. 인천시는 GCF 연관산업 육성 및 집적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 중이다.인천시는 송도와 영종도 일부를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하겠다는 계획도 이번 '국정과제 연계사업'으로 선정했다.국제회의 복합지구는 개발부담금 및 교통유발부담금 감면, 용적률 완화, 국비 지원 등의 혜택이 있다. 인천시는 내년 7월 지구 지정 공고를 목표로 조례 개정, 용역 실시, 문화체육관광부 승인 신청 등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인천시 투자유치산업국에서는 송도 11공구 바이오융합 산업기술단지 융합센터 내에 (가칭)'인천바이오공정전문센터'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복합쇼핑몰과 우수 외국인투자기업 유치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 등 규제 완화를 계속해서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8-2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2]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下)

교통·물류 중심지로 신문물 빨리 접해어릴적 기차 타고 개성에 소풍 갈 정도예성강 하류 위치… 민간 무역도 활발고려시대 수도와 송나라간 교류 통로드넓은 곡창지대 배고픔 모르고 자라연백 온천욕으로 피부병 완치 일화도상인들과 10여년전 '개성관광' 다녀와정몽주 피살 선죽교 등 변함없어 놀라이춘화(83) 할머니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도(碧瀾渡)는 교통·물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서해 바닷길을 따라 들어온 배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거치게 마련이었다.이 벽란도는 개성과 같은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물류·교통의 허브였다.할머니의 유년시절에도 고향 앞바다에는 조기, 새우를 잡는 배가 널렸고, 화물선도 많이 다녔다. 개성과 벽란도는 철도로도 연결됐다.중간에는 토성역(개풍역)이 있었다. 할머니는 교통 여건이 좋은 곳에 산 덕분인지 '국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개성까지 소풍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10살 때는 배를 타고 인천에서 열린 친척의 환갑잔치에 오기도 했다. 월미도 근방이었는데 배를 타고 5시간 정도가 걸린 듯싶다.할머니는 당시 벽란도가 인천에 비해서도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고 했다."일정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왔고, 고향집 근처 방개월에는 금을 빻는 공장도 있었어. 발전이 빨랐던 거지." 금을 가공하던 금점(金店)이 있었다는 게 이채롭다.벽란도는 뛰어난 입지 덕분에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 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와의 교류의 통로 역할을 했다. 벽란도를 굽이도는 강의 이름 '예성(禮成)'도 '교빙(交聘)의 예(禮)가 성립(成立) 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조선 중기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성부'편에는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를 할 때에,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송나라 휘종(徽宗) 국신사(國信使)로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1091~1153)도 예성항(벽란도)을 통해 개성으로 갔다. 당시 금(金)이 고려와 송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육로가 막혔다. 바닷길도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전라남도 근해에 왔다가 다시 예성강까지 북상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서긍은 3개월 동안 고려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고려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남겼는데, 이곳에 당시 '예성항'의 풍경도 담았다. 서긍은 예성항에 있는 '벽란정(碧瀾亭)'에서 왕의 조서를 봉안하고, 하루를 묵은 뒤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당시 항구에서 이뤄진 송나라 국신사에 대한 예(禮)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조류를 따라 예성항에 이르자 정사·부사는 신주(神舟)로 옮겨 탔다. 낮 12시쯤(午刻) 정사·부사가 도할관·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주(采舟)로 조서(詔書)를 봉안했다. 1만 명 되는 고려인들이 병기·갑마(甲馬)·기치·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섰다. 채주가 해안에 이르자 도할·제할관이 조서를 채색 가마에 봉안했다.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고 정사·부사는 뒤에서 따라갔으며 상절·중절은 그 다음으로 따라갔다. 벽란정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고 그 일이 끝나자 지위에 따라 나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으로 들어갔다."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를 보면 고려시대 벽란도에서는 민간 차원의 무역도 활발했다. 송나라 상인 '송상'은 사실상 고려 왕실이 지정하고 관할하는 항구인 예성항에 도착해 개경 등지를 무대로 장사를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 송나라 상인과 관련된 일화가 실렸다. 당시 예성강을 통해 출입하던 송나라 무역상 중에는 '하두망(賀頭網)'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예성강 주변에서 체류하는 동안 절세의 미인을 보고는 반해버렸다. 그 미인의 남편이 바둑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낸 하두망은 바둑에서 일부러 지고는 많은 재물을 잃었다. 뜻밖의 횡재에 마음이 동한 남편은 결국 아내까지 걸게 됐고, 하두망이 아내를 차지하게 됐다. 하두망은 배에서 미인을 범하려 했지만, 아내는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배가 빙빙 돌며 나가지 않았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절부가 있기 때문'이라 했고, 하두망은 배를 돌려 미인을 내려놓고 가게 됐다 한다.이 얘기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로 당시 고려인들에게 널리 불렸다. 남편이 아내를 보내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는 노래가 '전편'이고, 아내가 배에서 내리면서 부른 한이 서린 노래가 '후편'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시인 정포(1309~1345)가 지었던 시를 보면 많은 사람이 예성강곡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같은 청산이 배 창에 들어 가득한데, 가는 비 실같이 돌다리에 뿌리네. 밤 벌써 깊었지만 맑은 후에 잠 못 이루는데, 뱃사람들은 다시 예성강곡 부르네."벽란도 일대에는 예성강을 따라 펼쳐진 드넓은 평야도 있어 곡창지대를 이뤘다. 이춘화 할머니의 가족도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철이면 학교도 못 가고 온종일 일을 하고는 했다. 농번기면 온 가족이 함께해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일당을 주고 전라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을 부렸다. "고향 주변이 모두가 평야였지. 연백평야 끄트머리였는데 평야가 정말 넓었어. 쌀이 많이 나와서 유년시절에 배고팠던 기억은 없어."할머니는 유년 시절 연백군에 있는 온천에 갔던 기억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연백에는 연안온천과 배천온천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할머니도 피부병이 도졌는데 연안온천에서 10일간 온천욕을 하고 완치됐다. "어른들 말이 거기가 물이 좋다 그랬어. 옴이 와서 머리도 헐어서 옷을 입지 못할 정도가 됐는데 열흘을 (온천욕을) 하고 왔더니 깨끗이 없어졌어. 그때 약이 있겠어, 민간요법으로 하다가 안 돼 온천에 갔더니 바로 나았던 거지."온천은 지금 대중탕의 모습과 흡사했는데, 탕에는 호랑이 모습의 조형물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물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물을 식혀서 씻어야 했다. 탕에 들어갈 때는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이북5도청 황해도에서 지난 1970년 발행한 '황해도지'를 보면 연안온천은 연안읍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온정면 금성리에 있었다. 황해선 연안온천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황해도지'는 "부근에는 특히 토탄이 많이 나며 온천은 이러한 토탄지대에서 솟아나는데, '루마지스' '피부병' '부인병' '치질' 등에 모두 특효가 있다고 해 원근(遠近)에서 욕객이 답지한다. 욕탕의 설비가 완전하고 여관 등의 시설도 갖추어 있어 유숙, 휴양에 불편이 없다. 본도의 남부지성에 위치해 전의 고려조의 수도 개성에 가까웠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배천온천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도 소학교 교사였던 19살 때 배천온천에서 옴 치료를 했다고 회고했다. 이희승의 고향은 경기 개풍(출생은 경기도 시흥)으로, 서울에서 수학하다 낙향(落鄕)한 뒤 사립 소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에서 "배천온천은 후에 유명한 온천으로 발전했지만, 당시만 해도 아무 시설이 없는 자연 그대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할머니는 유년시절 개성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할머니가 본 개성의 첫인상은 '하얗고 환하다'는 느낌이었다. 밭과 논도 잘 정리돼 있었다. 이 같은 느낌은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처음 송도(개성)를 봤을 때 느꼈던 바 그대로다. 박완서는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에 가려고 고향 경기도 개풍군에서 걸어 송도까지 갔다. 박완서는 당시 고개 위에서 내려다본 송도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발 아래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 새하얗게만 보였던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송도고보, 호수돈고녀를 비롯한 신식의 큰 건물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지었고, 토지도 사질(砂質)이어서 길이나 바위가 유난히 흰 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거로구나, 나는 벌린 입을 못 다물고 그 인공적인 정연함과 정결함에 오직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이춘화 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함께 장사하는 이북 실향민 상인들과 10여 년 전 개성관광을 다녀왔다. 60여 년 만에 개성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놀라웠다. 유년 시절에 봤던 선죽교나 박연폭포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모습에 다들 놀라워 했다. "선죽교에 갔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막아놨다는 거였어. 어렸을 때는 핏자국이 그대로 있다고 신기하다며 발로 비비고 그랬는데, 개성관광 때는 그렇게는 못하게 해놓은 거지. 우리 같았으면 개발하고 그랬을 텐데 그대로더라고."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찍은 사진을 보니 선죽교 옆에 세워져 있는 '선죽교 비'의 글자도 또렷했다. 이 비의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한다. 선죽교는 1392년 정몽주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된 이방원 일파에 피살된 장소다.지난 7월 21일, 할머니는 취재팀과 함께 고향 땅 지척의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강화평화전망대를 찾았다. 할머니는 전망대에 있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흐린 날씨 탓인지 북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피란 때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도 둘러봤다. 예전 나루터는 사라지고 해안 경계 철책이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철책가에는 '지뢰매설지역 위험'이라고 쓰인 표지판과 북쪽의 대남방송이 손님을 맞이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이 변했다"며 "다시 또 북에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지난달 21일 경인일보 취재진과 함께 강화도를 찾은 이춘화 할머니가 피란 때 배를 타고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에서 고향인 벽란도 쪽을 쳐다보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개경과 예성항. 출처/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이춘화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 선죽교비에 '善竹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평양집 할머니 제공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직접 찍은 선죽교의 모습. /평양집 할머니 제공이춘화 할머니가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고향 벽란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16 홍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