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소유 은행주 미군정 환수
재벌 우려 1954년에야 시중 매각
이병철, 상호주 지분 줄줄이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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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청은 특수은행인 저축은행을 일반은행으로 전환하고 신탁회사를 신탁은행으로, 무진회사를 상호은행으로 각각 상호를 변경했다.

1947년에는 은행지점 총수 222곳의 30%와 금융조합 401곳의 60%를 적자경영을 이유로 폐쇄했다. 또한 일본인이 소유하던 각 은행 주식은 전부 미군정에 환수됐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국고로 귀속됐는데 이것이 소위 귀속주(歸屬株)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랫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체제의 우수성을 몸소 체득했다. 또 휴전 이후 일련의 경제정책은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정부는 1950년 벽두부터 정부 보유의 은행주 민간 매각을 단행했다.

시중은행들은 해방 전 일본기업체들에 제공한 대출금 25억환(현 22여억원)이 부실채권이었다. 또한 해방으로 인해 약 291억환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및 주식 보유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수입마저 끊어진 터에 해방 후 저축률 둔화와 악성 인플레 등으로 은행들이 파국 상황이었다.

삼성 로고
1950년 5월 5일 정부는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제정해 금융 자율화와 조흥은행, 상업은행, 상공은행, 저축은행, 신탁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의 정부 귀속주 민간매각을 결정했다.

예금자보호는 물론 은행의 자주화 및 건전화란 신은행법의 기본정신을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귀속주식의 처분에 따르는 기술상의 애로와 증자, 자산재평가문제 등으로 은행법은 공포 즉시 시행되지 못했다.

더구나 시중은행 민간매각 시 정부의 국민경제 장악력 약화와 재벌들의 금융지배 우려 때문에 시중은행 매각 건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54년 6월 이중재와 김영찬이 각각 재무부 장관과 차관이 되면서 시중은행 민간 매각 사업이 본격화됐다. 민영화 작업 추진과정에서 정부는 자본 및 경영상태가 가장 취약한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을 합병해서 1954년 10월 1일부로 흥업은행(한일은행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로써 당시 시중은행은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등 4개로 축소됐다.

재무부와 관재청,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은행주매각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54년 10월 14일에 귀속주 매각 요강을 확정했다.

주요 내용은 ①연고 및 우선권을 배제하기 위한 공매방식에 의한 처리 ②독과점방지를 위해 매각 단위 주수를 일정 구좌수로 분할해 응찰 ③불하 대금의 일시지급 ④낙찰액은 정부 사정가격 이상으로 한다 ⑤2년간 명의서환(名義書換)을 금지한다였다.

1954년부터 추진된 귀속주의 공매입찰은 무려 여섯 차례나 유찰됐다. 시중은행 운영의 민주화를 목적으로 1인당 입찰 구좌수 및 양도를 제한함에 따른 대자본들의 참여가 원천 봉쇄된 때문이었다.

차제에 정부는 귀속주 매각작업을 조속히 매듭짓고자 소수지배가 되더라도 입찰 계좌수 제한을 철폐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1957년 8월에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제일은행 등 5개 은행에 대한 정부귀속 주식매각 작업을 단행하자 삼성, 삼호, 개풍, 조선제분 등이 불하경쟁에 참여했다. 삼성은 흥업은행주 83%와 조흥은행주 55%를 각각 매입, 최대주주가 됐다.

상업은행은 당초 합동증권의 진영득을 명의인으로 등장시킨 대한제분의 이한원이 최대주주였다.

그러나 이병철이 최대주주가 된 흥업은행 신탁부가 상업은행 지분율 33%를 확보하고 있었던 탓에 상업은행 또한 이병철이 최대주주가 됐다. 그 결과 이병철은 4개 시중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을 소유해 국내 최대의 은행소유주가 됐다.

비결은 상호출자였는데 은행들끼리 서로 지분을 소유한 상호주는 신탁은행 64.4%, 저축은행 56.5%, 조흥은행 41.0%, 상업은행 35.4%, 상호은행 24.8%, 조선은행 20.3%, 식산은행 14.1%이었으며 특히 환금은행은 자본금 전액이 상호주였다.

일제하의 한국인 지분을 이어받은 민간소유주는 조흥은행 53.7%, 상업은행 35.6%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은행의 상호출자가 아닌 경우는 전체 주식의 10%도 못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중은행 하나를 불하받을 경우 상호출자로 연결된 여타 은행들까지 줄줄이 낚을 수 있는 행운이 따르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이런 메카니즘에 주목해서 최대의 금융자본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만 4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시중은행 민영화 작업은 1954년 8월 15일부로 종료됐다. 그러나 이로인해 '시중은행 주식의 대부분이 소수의 재벌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금융기관을 대주주의 사금고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4·19직후 이 문제에 대한 시비가 대두됐지만 과단성 있게 해결되지 못한 채 5·16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후 혁명정부가 대주주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부정축재환수처리의 일환으로 부정축재자가 소유하는 일반은행 주식을 전부 환수하는 동시에 1961년 6월 20일에는 대주주의 의결권제한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 실시하게 됐다.'(한국상업은행 80년사, 1979, 146면)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