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말 16개 계열사로 성장
이승만 퇴진 후 '부정축재' 덜미
군사정권서 조홍제 부사장 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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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4대 시중은행을 장악하면서 다각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당시 삼성의 다각화 전략은 과도한 은행부채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부실기업 인수로 추정된다.

삼성이 4대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였기 때문에 해당 은행들의 관리하에 있던 부실기업 중 시장성이 양호하고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인수하는 데 있어 매우 유리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1958년 삼성은 은행부채로 부실해진 한국타이어를 이양구, 배동환과 공동으로 인수했다. 처음 주식지분은 3인 모두 33%였으니 이양구가 후일 손을 떼면서 삼성의 지분은 49.5%로 늘어났다.

한국타이어는 일제하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된 조선타이어의 후신으로 광복 후 정부에 귀속됐다가 민간에 매각된 기업으로 1957년 ICA원조 35만달러를 들여 시설보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협소한 국내시장을 감안하지 않은 과잉투자가 원인이 돼 부실기업이 됐다.

삼성은 또 경영 미숙으로 부실해진 삼척시멘트(동양시멘트)를 이양구와 50%씩 투자, 1958년 1월에 인수했으며 1957년 8월에는 천일증권을, 1958년 12월에는 동일방직을 그리고 같은 시기에 호남비료공업 주식 45%를 매입했다.

1958년 2월에는 안국화재보험(삼성화재)을 인수했다. 안국화재는 일제하에서 설립된 조선생명 후신으로 화신그룹 창업자인 박흥식과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민병도 등이 재건에 착수, 1956년 4월 26일에 자본금을 1억환으로 증액하고 손해보험으로 업종을 변경했으나 경영 미숙과 손해보험사의 난립 등으로 적자를 면치 못해 경영난에 직면했다.

1957년 2월에는 효성물산을, 1958년 12월에는 근영물산을 각각 설립했다. 당시 무역업은 수입무역 중심으로 수입에는 다량의 외화가 필요했는데 무역회사의 달러화 주공급원은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원조불이었다.

AID는 개발도상국의 경제적·정치적 안정을 기하고 경제개발을 촉진하며, 산업시설의 현대화 지원을 위하여 설립된 미국의 정부기관이다.

그러나 업계의 달러화 배정수요에 턱없이 부족해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1개 무역 업체당 품목별로 20%씩 배정했다. 더 많은 외화를 배정받기 위해선 여러 개의 무역회사가 필요했다.

1950년대 후반 삼성그룹의 기업 인수는 엄청났다. 그 결과 1950년대 말 삼성은 상업, 조흥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을 소유함은 물론 산하에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을 형성한다.

그 와중에서 삼성은 수평적 다각화에 치중, 국내 최대의 복합기업집단으로 변모했다.

'호사다마'라 하던가. 1950년대에 급성장하던 삼성에 1960년대 벽두부터 광풍이 휘몰아쳤다.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하에서 권력을 배경으로 부당이득을 취한 정치인, 관료, 기업가들에 대한 사회적 단죄요구가 비등했는데 이병철도 연루됐다.

이승만정권 퇴진 직후인 1960년 4월 27일부터 제2공화국이 등장하던 그해 6월 16일까지 51일 동안 국정을 담당했던 과도정부는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6월 1~20일까지 '1955년 1월 이후 5년 동안의 탈세를 80% 이상 정직하게 신고할 경우 벌금을 면제해준다'며 자진신고를 유도했다.

6월 20일까지 신고한 기업인들의 탈세액은 이병철(5개 업체, 21억 4천만환), 정재호(삼호 4개 업체, 5억6천만환), 김상홍(삼양사, 1억9천만환), 설경동(대한제당, 1억2천만환), 송영수(전주방직, 2억9천만환), 백남일(태창방직, 3억1천만환), 구인회(럭키, 3천만환), 이정림(대한양회, 6백만환), 조성철(중앙산업, 5백만환) 등이었다. 이들 9명이 신고한 탈세 총액은 33억1천100만환이었다.

삼성 로고
그러나 국민들은 기업들이 탈세액을 터무니없이 낮춰 신고했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검찰에서도 최소한 6개 재벌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말 정부조사결과 그룹별 탈세 업체 수는 삼성(이병철) 13개 업체, 삼호(정재호) 7개 업체, 개풍(이정림) 9개 업체, 대한(설경동) 5개 업체, 럭키(구인회) 4개 업체 등 1950년대 이후 급속하게 성장한 재벌기업들 대부분이 포함됐다.

8월 31일에 기업가 24명, 46개 기업에 대해 벌금과 추징금 등 총 196억환을 해당 기업에 통보하는 한편 1961년 4월 10일 '부정축재처리법'을 마련하고 이 법에 근거해서 5월 17일까지 해당 기업에 자수할 기회를 줬다.

그러나 자수마감기간 하루 전인 5월 16일에 군사쿠데타가 발발하면서 부정축재자 처리작업은 군사정부에 승계됐다.

부패기업인들에 대한 국민적 단죄요구는 군사정부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과제였다. 구인회, 이정림 등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투옥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삼성의 경우 일본 동경에 머물고 있는 이병철을 대신해서 조홍제 부사장이 투옥되는 등 당시 잘 나가던 기업인들은 '부정축재자 처벌'이란 죄목으로 대부분 체포당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이들에게 일벌백계 대신 기간산업체 1개씩 설립해서 국가에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투자명령'으로 대신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