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 작곡가, 대표작 교향곡 5번 ‘혁명’

2차 세계대전 중에 쓰여진 7번 레닌그라드

“나치 포위보단 스탈린이 파괴한 곳 위한 곡”

사회주의 속 상상력… 올해 깊게 알아가길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5년은 구소련의 위대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서거 50주기인 해이다. ‘인상주의 음악’의 대가인 모리스 라벨(1875~1937)은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 이와 함께 전음렬주의(총렬주의·Total Serialism) 작법으로 20세기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작곡자이자 뛰어난 지휘자로 활동한 피에르 불레즈(1925~2016)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유수의 해외 연주자들과 오케스트라들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기념년을 맞아 이들의 음악을 콘서트 무대에 올리고 레코딩을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연주자들과 연주단체, 해외에서 내한하는 음악가들도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로 이들의 작품을 배치하고 있다. 글에선 50주기의 쇼스타코비치를 주요 교향곡들로 추모해본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쇼스타코비치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독재자 스탈린 치하에서 망명하지 않고 예술가로 살아간 쇼스타코비치는 어린 시절 러시아 혁명을 겪었고,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세계대전도 체험했다. 자신의 교향곡은 이 과정에서 죽은 수많은 동포들을 위한 묘비라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2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작으로 고전풍의 교향곡 1번을 발표했다. 이후 교향곡 2번과 3번이 러시아 혁명과 체제를 찬양하지만, 작품의 형식은 실험적 성격이 강하다. 이후 교향곡 4번을 작곡하던 때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 기사(‘음악이 아니라 혼돈’)가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다. 그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타락한 음악이나 만드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힌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의 초연을 미루고(초연은 25년 후인 1961년에 이뤄진다) 다음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는데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5번 ‘혁명’이다. 교향곡 5번은 작곡가의 15개 교향곡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닮았다. 똑같이 전체적 구성이 ‘암흑에서 광명으로’이며 위풍당당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더해서 쇼스타코비치가 전통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버무려낸 중도적 노선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1937년에 열린 5번의 초연은 음악 애호가들과 당국자들까지 만족시켰다. 작품이 끝나고 갈채가 40분 이상 이어질 정도였다.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초연됐다. 작품은 서양전쟁사에서 가장 길고 파괴적인 포위전으로 꼽히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속에서 탄생했다. 1941년 6월 소비에트를 침공한 나치는 그해 9월 레닌그라드의 마지막 육상 통로(보급로)를 차단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이어진 포위전에서 250만명 중 150만명이 폭격과 굶주림, 질병으로 죽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쇼스타코비치는 절망 속에서 일곱 번째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작곡 소식에 시민들은 환호했고 스탈린도 이 작품이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에 힘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6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쳐 완성된 교향곡 7번은 연주시간이 80여 분에 달한다. 작품의 초연 후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반나치 투쟁의 선봉으로 치켜세웠다. 작품이 워낙 서사적이며 영웅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에 쇼스타코비치는 전기에서 “7번 교향곡은 나치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에 의해 이미 파괴되고 히틀러가 그저 마지막에 거들었던 레닌그라드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예술가의 창작품에 관여했던 옛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와 권력이 작곡가의 상상력까지 통제할 순 없었다. 때문에 삶의 긍정에 기반해 현실의 비극성을 적절히 드러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쇼스타코비치 교향악 예술의 최고봉을 이룬다.

교향곡을 비롯해 15개의 현악4중주 등 실내악곡, 협주곡과 소나타, 오페라와 오페레타, 영화음악까지 다작을 남긴 쇼스타코비치를 더 깊게 알아가는 올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