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이 쌓여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잘’ 대하는 것들이 그렇다. 2년 전 겨울 사무실로 한 중년 여성이 찾아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십중팔구 억울한 사연이 있는 사람일 터. 동료 대부분은 외근 중이거나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가 그를 맞았다. 다른 사무실 공간으로 그를 데려가 이야기를 나눴다. 중년 여성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자신이 왕족이고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고 감시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화 도중 풍기는 낯선 냄새는 계속 코를 찔렀다. 가만히 하소연을 듣다 말이 끊기자 잽싸게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사연을 조롱하거나 비웃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귀찮았고, 만에 하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여러 개 꺼냈고 이내 나는 기겁했다. ‘공격당해 빠진 머리카락’이라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쫓아내듯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일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인천지방법원 인근에서 국선전담변호사들과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노인, 미성년자, 정신질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주로 상대한다. 대화가 어려운 사람들과도 자주 만난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사람을 구한다는 심정으로, 나아가 법치주의를 지킨다는 책임감으로 법정에 나선다고 한다.
어디 이들뿐이랴. 답답함을 참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걸 알았다. 빛나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책임을 다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영웅, ‘언성 히어로(unsung hero)’라고 칭할 만하다.
이따금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사무실로 찾아오곤 한다. 언젠가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그럴 때마다 언성 히어로들을 떠올려보자.
/변민철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