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년 옥살이와 노역의 공포에
"나는 누구인가" 질문 앞에
매번 정직하게 응답하는 장발장
다시 만난 뮤지컬 영화
현대판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절실
사실 이 영화는 흥행의 악재라고 할 만한 조건을 몇 가지 가지고 있었다. 우리 정서에 익숙지 않은 장르인 뮤지컬 영화라는 것 외에도 상영 시간이 장장 2시간40분에 이른다는 점도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 대부분의 관객이 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점도 흥행에 유리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호평 속에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첫 번째 이유는 상영 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선 직후 열패감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이 작품이 공감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에 감정이입을 해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빵 한 조각을 훔친 생계형 절도죄로 19년의 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의 억울함과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부조리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일을 향한 갈구와 희망이 2012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도 희망의 불씨를 당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전의 힘은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압도적인 몰입감과 공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뮤지컬 영화라는 형식으로 다시 만난 '장발장'은 내겐 현대판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미리엘 신부의 자비로 구원받은 후 그의 인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고, 대개는 가진 것 없는 '비참한 사람들'의 편에 선 것이었다.
신분을 숨긴 채 안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몇 차례의 위기 앞에서 정공법을 택한다. 수레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베르 경감 앞에서 수레를 들어 올리는 위험한 선택을 주저없이 하고, 자신 대신 '장발장'으로 오인돼 잡혀간 무고한 이를 살리기 위해 법정에 서서 자신이 장발장임을 증언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판틴이라는 여인에게 그녀의 딸 코제트를 돌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온전히 바친다. 19년의 옥살이와 노역이 주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그는 매번 정직하게 응답한다.

그의 영혼은 그가 훔쳐간 은식기를 자신이 선물한 것이라 증언해 준 미리엘 신부를 만났을 때 구원받았으며, 코제트라는 순수한 영혼을 만났을 때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을 때 또 한 번 구원받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토록 지독하게 자신을 쫓는 자베르 경감마저 살려줌으로써 원한의 고리를 끊는다. 신념이 무너진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완고한 자베르 경감은 혼란에 빠져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만 그의 영혼은 구원받았을 것이다.
장발장이 현대판 예수의 현현이라는 생각과 함께 또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은 니체가 말한 원한(Ressentiment)에 대한 것이었다. 장발장과 자베르의 관계도 신부의 자비와 장발장의 각성이 없었다면 원한의 악무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어렸을 때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가 자베르 경감이었다. 장발장이 자베르 경감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었고, 빵 한 조각 훔친 대가를 19년의 옥살이로 혹독하게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집요하리만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자베르 경감이 이해가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악의 화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장발장은 자베르 경감을 복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원칙에 충실하고 타협하지 않는 자로 끌어안음으로써 원한 관계의 고리를 끊고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에 이른다.
장발장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스스로 응답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했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치유와 구원의 시간이 절실해 보인다. 계층적, 지역적, 세대적 갈등을 넘어서 우리의 분노와 절망을 다스리고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는' 이 '고적한 밤'에서 벗어나기를, 그리하여 '소리'와 '마음'과 '사랑'(한용운, '고적한 밤')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