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영웅을 찾고 있다. 영웅이라고 해서 평범한 사람보다 지혜나 용기가 더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혜는 필요한 때 발휘되고 에머슨의 말처럼 용기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약 5분쯤 길 뿐이라 해도 이 위기를 극복할 위인을 기다리고 있다. 주말마다 타오르는 촛불은 비단 대통령뿐 아니라 국정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한 2016년도 국가경쟁력 평가 중 정치인에 대한 공공의 신뢰는 조사대상 144개국 가운데 96위로 2015년보다 더 떨어졌다. 필자의 기억으로 2004년도의 순위가 104개국 중 85위였으니 우리가 제대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따라서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인들과도 연관된 정부정책 결정의 투명성은 거의 바닥 수준인 115위(2015년 123위)인 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우리가 기다리는 영웅은 달변이나 전쟁시 필요한 무예로 다져진 영웅이 아니다. 대립과 갈등을 중재하는 조정자로서의 영웅, 비전을 갖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영웅,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의사로서의 영웅,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고 냉철하게 결정하는 판관으로서의 영웅, 창의력 발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혁신가로서의 영웅들이 있으나 지금 우리가 만나보고 싶어 하는 영웅은 이 모든 것을 가슴으로 품은 소박하고 담백한 영웅이다. 이미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파도와 국민의 원성이, 꺼져가는 경제의 불씨가, 영웅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시대가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어떤 영웅이 지금 필요한지는 각자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선 무자기(無自欺)와 신독(愼獨)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집행한다면 비록 말솜씨가 부족하고 배경이 약할지언정 이 위기를 극복하는 영웅이 될 것이다. 국민들이 힘을 실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용맹함으로 시대의 영웅이 되었는가? 그는 미천하고 연약하였던데다 직업도 변변치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가 절대적으로 거친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항우가 가지고 있지 못한 원대한 비전과 흐트러진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어서 였을 것이다. 그리고 유능한 참모를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웠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정된 헌법의 이름은 홍범(洪範) 이었다. 중국 하나라 우왕이 제정했다는 국가 경영의 대 원칙인 홍범9주(洪範九疇) 중 3덕(三德)은 정직과 강극(剛克)과 유극(柔克)이다. 이것을 영웅에게 대입해 본다면 영웅은 정직해야 하고,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며, 상대를 대하는데 부드럽고 편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자기와 신독·측은지심이 없다면 그 3덕은 한낱 보여주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영웅이 우리에게 나타나 주기를, 시대가 부르고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영웅이 나라를 이끌어준다면 정직하고 유능한 정부가 서고 공공질서와 안보·경제·문화 등 국정 전반의 신뢰는 확보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대공황시절 어떤 신문에 났던 기사를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열을 지어 지나가고 있다. 영원히 기다리고 있다. 수프를, 일터를, 하룻저녁의 숙박처를, 내일도 또 기다릴 것이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거짓 영웅이 이끌어 내놓는 정책의 내용에 정당성이 있을 수 없고, 집행에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밑에서 정치를 하는 리더들은 제 욕심만 차리고 국민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이합집산에 입신에만 신경을 쓰면 그리될 것이다. 하지만 영웅이 났다고 해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곁에 훌륭한 책사를 두지 않고는 기름도 없이 횃불을 밝히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군주의 생명은 책사(策士)가 쥐고 나라의 운명은 책사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릇 책사는 옛 사관(史官)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본연의 책무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어두운 시대가 영웅을 기다린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민의 서럽고, 억울하고, 실망한 눈물을 닦아줄 영웅이 필요하다. 부디 진정으로 국민을 우러르는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신원철 (사)인천연수원로모임회장· 전 인천 연수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