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는 게 답답하고 회의가 들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회의주의자 몽테뉴다.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 천장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 그의 회의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무려 20년 동안 아무런 물리적 강요나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 단 한 권의 책 집필에만 몰두했을 정도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에세(Les Essais)'다. 프랑스인들은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의 고유한 지적 계보를 형성한 작가와 사상가들을 모랄리스트(moraliste)라 불렀다. 그의 가장 앞자리에 몽테뉴의 이름이 있고, 그 뒤로 파스칼과 라 브뤼예르, 라 로슈푸코 등이 포함된다. 모랄리스트 몽테뉴의 정신은 이렇게 압축된다. "뒤흔들고, 의심하고, 따져 묻고,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고, 어떤 것도 다짐하지 않는 것."(이환 '몽테뉴와 파스칼'에서)
정치혐오, 자체 부정하는듯 해도
진영이라는 이름의 '패거리 산물'
상대 불신·적개심 극대화 음모론
몽테뉴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회의를 통한 희망 찾기다. 일테면, 역설적 도그마다. 몽테뉴는 기본적으로 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학자들이 하는 말은 마치 새들이 모이를 맛도 보지 않고 새끼들의 입속에 넣어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갈레누스는 잘 알지만,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법률로 가득 차게 하지만 소송의 요점은 모른다."(박홍규,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에서) 정권에 빌붙는 어용학자가 미디어를 활보하고,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폴리페서'가 들끓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몽테뉴의 회의는 크세주(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에서 출발한다. 몽테뉴는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끊임없이 의심하라.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의 길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 의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의 사유와 믿음, 욕망이 들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오롯이 '에세'의 열쇳말들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맹목적 믿음에서 해방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몽테뉴는 절대니, 영원이니 하는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고 삶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 유한한 삶에 자족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안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고명섭 '즐거운 지식'에서)
우리네 삶이란 수많은 결핍과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결핍 속에서 낙관과 긍정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바로 몽테뉴의 화두였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사유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일테면, 역사의 발전법칙에 대한 성찰이다. 역사란 구조의 결핍과 개인의 결핍을 극복해 온 과정이니 말이다.
정치 회의는 뻔한것 헷갈리게 해
이해관철 동의 조작 저항하는 것
정치혐오와 정치를 회의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치혐오는 얼핏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패거리 정치의 산물이다. 진영이라는 이름의 패거리가 정치적 상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 적개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추잡한 음모론에 매달리는 행태일 뿐이다.
정치를 회의하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것을 되도록 복잡하고 헷갈리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한 뒤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한다"는 동의의 조작에 저항하는 것이면서, 그러한 회의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려는 노력의 과정이다. 나는 회의한다, 고로 희망을 품는다.
/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