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600만명 유대인 학살 비석 미로처럼 배치
도심 위치 조성 일상 속 스며든 휴식공간
'희생자 엄숙해야…' 통념 깨고 자유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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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람 키를 뛰어넘는 높이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2024.4.19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회색빛 콘크리트 비석 2천710개가 줄을 지어 박혀있다. 파릇파릇한 초록잎과 선선한 봄바람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4월의 날씨와 대비되는 회색빛 풍경이다.

지난 14일 찾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주말을 맞아 관광객과 베를린 시민들로 붐볐다. 이들은 회색 비석을 가로질러 들어가며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사색에 잠기며 혼자 걷기도 했다. 미로같은 비석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해 놀라는 이도 꽤 많았다. 꺄르르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얼핏 들린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비석 높이는 제각각이다. 0.2~4.7m까지 다양하다. 초입에는 성인 기준 종아리 정도밖에 오지 않는 낮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비석은 점점 크고 높아져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정도가 된다.

지형 또한 특이하다. 마치 파도가 치는 듯 땅이 울퉁불퉁하다. 굴곡진 땅 위에서 웅장한 회색 비석에 둘러싸여 있자니, 답답하고 억눌리는 느낌까지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치 지하로 가라앉는 듯하다.

하지만 추모공간이라고 해서 엄숙하기만 한 분위기를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추모 공간의 통념을 깨고 베를린의 일상에 완벽히 스며들었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은 자유롭게 추모한다. 가장자리의 낮은 비석 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도, 가족들과 빵과 음료를 나눠 먹기도,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비석 위에 올라가 뛰어다니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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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시민과 관람객이 비석 위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24.4.14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의 일상에 섞일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이기도 하다. 베를린 대표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 문과 불과 1.2㎞, 국회의사당과도 1.5㎞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걸어서 5분이 채 안되는 거리다.

이날 만난 한국인 관광객 김옥자(51)씨는 "어제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베를린 중앙역에서 이동이 제일 편해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첫번째 관광지로 찾았다"며 "미디어를 통해서만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접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는데, 실제로 와보니 경건해진다. 독일에 와보니 추모도 그렇고 여러 방면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브레멘에 거주하는 독일인 부부 루코브스키(71)씨와 훌세부쉬(64)씨는 베를린에 방문할 때마다 종종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들른다. 그들은 "독일의 안좋은 역사를 체험하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루코브스키씨는 "방문할 때마다 가슴이 억눌리는 듯한 기분"이라며 "물론 독일인이라고 하더라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 같이) 독일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이 공간도 조성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결국 중요한 건 서로의 뜻이 모아지는 것이다. 가장 어렵지만 뜻이 모아져야 이런 공간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전후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늦었다'는 비판도 무릅쓰고 베를린 중심부에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 학살된 유대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되짚으며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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