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는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많이 나기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손꼽히는 경기도의 각종 수치들이 이를 증명하죠. 그래서 주말마다 경기도에 아이가진 부모들은 ‘아이랑 갈만한 곳’을 찾아 헤맵니다. 아이랑 가야 할 곳은 고르기가 꽤 까다롭거든요.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교육적’이어야 하기에 생생한 후기로 깐깐하게 검토한 후 그곳을 정합니다. 그렇게 훈훈한 후기들이 데이터로 쌓이면 입소문이 나죠. 오늘 레트로K가 주목한 ‘광명동굴’은 엄마아빠들 사이에 소문난 그 곳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1912년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름으로 설립… 처음엔 ‘가학광산’

오르는 언덕 이름 따 ‘도고내광산’ 불리기도

지금 인기관광지 되기까지 이름 여럿 바뀌어

경기도 내 인기 관광지로 각광받는 광명동굴.  외부 기온이 아무리 높아도 내부 온도를 12∼13℃를 유지해 불볕더위 속 도심 피서지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2022.7.21 /경인일보 아카이브
경기도 내 인기 관광지로 각광받는 광명동굴. 외부 기온이 아무리 높아도 내부 온도를 12∼13℃를 유지해 불볕더위 속 도심 피서지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2022.7.21 /경인일보 아카이브

광명동굴 역사는 꽤나 깊습니다. 1912년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으니 벌써 100년도 더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된 만큼, 불리우는 이름도 여러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마다 그 시대가 안고 있던 풍경과 삶들이 녹아 있습니다.

‘광명동굴’의 이름을 가진 지금은 경기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살짝 숨이 찰 정도의 트래킹 코스를 걸어 광명동굴 입구에 다다르면,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전시가 있는 역사관도 있고, 실제로 걷고 보고 느끼며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동굴 내부의 관람로도 잘 정비해두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시대에 광명동굴은 온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간임이 틀림없습니다.

90년대에 촬영한 폐광된 광산의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90년대에 촬영한 폐광된 광산의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관광지로 변모한 이후의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관광지로 변모한 이후의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그런데 광명동굴이 광명동굴로 불린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광명동굴의 원래 이름은 ‘가학광산’이었습니다. 옛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2년 이이다 큐이치로, 일본인의 이름으로 광산이 설립되었다고 기록돼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광상조사기관’을 통해 금은광산을 찾고 직접 시굴한 뒤 채산성이 있다 판단되면 일본 광업가들에게 팔아넘기는 방식이었죠. 서울 바로 옆에 위치한 가학광산도 이와 유사한 이유로 시작됐을 것이라 유추됩니다. 이렇게 광명동굴의 전신, 가학광산이 일제의 수탈로 개발된 광산이었고 해방 전까지 운영됐다는 게, 2011년 ‘관광지’로 재단장해 대중에 공개되기 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광명동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방 이후엔 경방광업주식회사가 운영

서울 옆 도심 가운데와 산림 한 축에 위치

광산 깊은 산 속 아니라 오가는 사람 많아

가슴아픈 역사여서 그럴까요. 유독 많이 알려지지 못한 광명동굴의 옛 이야기 아니, 가학광산의 ‘그후’는 보통사람들의 고락(苦樂)이 녹아있습니다. 해방 이후 70년대 초까지 경방광업주식회사가 광산으로 운영했습니다. 그 곳엔 광산에서 금속을 캐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으며 마을들도 자리했습니다.

가학광산은 서울 바로 옆, 도심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물론 당시엔 도심이 아니었을테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제일 중심의 도시, 수도 서울 인근에 있다는 지리적 특이점은 변하지 않죠. 지리적 특징은 또 있습니다. 광명에는 여러 산이 있는데, 도덕산과 구름산, 가학산, 서독산으로 이어지는 산림축에 위치해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광산이라 하면 떠오르는 ‘깊은 산 속’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가학광산 주변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꽤 있었습니다.

90년대 폐광된 가학광산으로 올라가는 길. /경인일보 아카이브
90년대 폐광된 가학광산으로 올라가는 길. /경인일보 아카이브

20여년 동안 광명시에서 학예 연구를 해온 양철원 전 광명시 학예사는 그 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광산 뒷쪽 길에서 캐온 광물들이 이동했어요. 이 길하고, 아래쪽 도고내부터 올라가는 길로도 사람들이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광산) 옆쪽으로 돌아가면 트럭 1대가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산길이 있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소하리’라는 마을이 있었어요. 이 동네에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출퇴근을 많이 했어요. 여전히 지금도 이 길은 광명동굴을 진입하는 길이기도 해요.”

가학광산으로 올라가는 그 언덕배기 입구를 도고내라고 불렀다 합니다. 도고내 고개에는 신목(神木)을 모시는 서낭이 있었습니다. “아랫동네 무녀들이 치성을 드리던 장소들이었다고 해요. 개발이 되기 전엔 기도도 하고, 신성하게 모시던 곳인데 길이 넓어지고 개발이 되면서 사라졌죠. 그만큼 오래전부터 이 고개가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광부들 이야기

24시간 3교대로 쉬는 날 없이 바삐 근무

언덕 뒷골에는 막걸리집… 한 말 1200원

쌀밥 먹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항상 쌀밥을 지어 먹었어. 힘이 나야 일을 하니까.

1960년대 관리직 근무했던 김규선씨

지난 2012년 광명시가 발간한 ‘광명 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를 보면 당시 광산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가학광산에서 관리직으로 일했던 김규선씨의 이야기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도고내 하고 뒷골에 막걸리집이 많았어요. 도고내에 세집, 뒷골 가게 옆에 하나, 장절리에도 또 하나 있었고. 그때는 막걸리 초롱으로 먹었지. 한 말이 한 초롱이거든. 플라스틱 통으로. 두세명이 가면 무조건 한 초롱이야. 그때 돈으로 천이삼백원 정도 했지.”

“그때는 쌀도 워낙 귀하고 혼분식 장려운동이다 뭐다 해서 쌀밥 먹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우리 광산 사택에서는 항상 쌀밥을 지어 먹었어. 힘이 나야 일을 하니까.”

당시 광산은 24시간동안 계속 가동됐고, 광원들은 3교대로 일하며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했다고 합니다.

“1조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2조는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 3조는 밤 12시부터 아침 9시까지. 3교대로 계속 도는거야. 발파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착암공들은 3,4시간만에 나오지만 돌을 싣고 나오는 운반공하고 싣고 나온 돌을 골라내는 사람들은 교대시간까지 일했어요. 골라내는 일은 여자들도 많이 했고 밤에도 일하고. 그래야 기계가 계속 돌아가니까.”

가학광산은 인근 동네 사람들 말로 ‘도고내광산’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가학광산에서 기계수리공으로 일했던 장원화씨도 ‘광명 가학광산동굴 100년 스토리’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광산 간판에 ‘(주)경방광업’이라고 돼 있었지만 사람들은 도고내광산이라고 불렀어요.”

“사고도 많이 났어요. 굴 무너지는 사고, 끌어올리다가도 떨어지는 사고도 나고 사망까지는 아니지만 사고가 나면 보상으로 다 해결했으니 무난히 넘어가곤 했죠. 그런데 마지막에 둑이무너져서 광미가 동네로 쏟아지는 바람에 감당을 못하고 문을 닫은거죠.”

경인일보의 전신인 연합신문 1972년 8월 19일자 3면에 실린 대홍수 발생 관련 기사. /경인일보 아카이브
경인일보의 전신인 연합신문 1972년 8월 19일자 3면에 실린 대홍수 발생 관련 기사. /경인일보 아카이브

역사 한 줄기 잘라낸 건 1972년의 태풍

대홍수 발생해 광미 쌓아놓은 둑 터져

중금속 오염 심각해 800만원 상당 피해

직간접적 피해 늘어나며 결국 폐쇄 길로

광미는 금속을 골라내고 남은 찌꺼기 돌가루를 말합니다. 광미에는 미량의 중금속이 섞여 있어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1972년에 서울과 중부지역을 휩쓸었던 태풍 베티로 인해 대홍수가 발생했는데 이 홍수가 가학광산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켰죠.

“기계간 공장안에서 파쇄를 하고 곱게 갈아 모래가 되면 납과 구리를 분리하는 작업을 합니다. 거기에 하수구를 만들어서 물하고 같이 광미 모래를 흘려보냈죠. 광미가 어디로 흘러가 쌓였냐면 둑을 높이 쌓아올려서 저수지 같은 걸 만들었거든요. 거기에 광미가 쌓여요. 물은 물대로 흘러나가고, 몇 십년동안 파서 나온 광미들을 몇 천 톤 쌓아 올렸는데, 그 둑이 터져 내려갔으니 그 밑에 도고천, 가학골 같은 곳의 논들을 다 쓸어 묻은거죠.”

가학광산이 폐광되고 방치되며 발생한 문제를 다룬 1993년 12월 3일자 13면 경인일보 기사. /경인일보 아카이브
가학광산이 폐광되고 방치되며 발생한 문제를 다룬 1993년 12월 3일자 13면 경인일보 기사. /경인일보 아카이브

이 일로 인해 도고내 일대 주민들은 당시 추산 800만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더불어 인근 토양과 하천이 중금속 오염은 더 심각한 피해였습니다. 결국 홍수로 인한 직간접적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이를 견디지 못한 경방산업이 결국 가학광산을 폐쇄합니다. 야적장에 있던 광미들은 1996년에 모두 제거됐고 1999년엔 자원회수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지난 70년대초까지 도덕산 산기슭에는 우거진 나무숲을 이루었으나 점차 개발이 되면서 주택들이 들어서 철산 4동의 주택들은 대부분 고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1991.10.22 /경인일보 아카이브
지난 70년대초까지 도덕산 산기슭에는 우거진 나무숲을 이루었으나 점차 개발이 되면서 주택들이 들어서 철산 4동의 주택들은 대부분 고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1991.10.22 /경인일보 아카이브

그 이후의 이야기… 다른 모습으로 시민 곁에

에어컨 없던 시절 광산 앞에 모여 피서

코펠에 동굴 물 떠다 라면 끓여먹고

특유의 분위기 영화 촬영장소 되기도

이후에 가학광산은 철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광산의 특성을 활용한 인근 동네 주민만의 ‘피서(避暑)’법이 생기기도 했죠. 아무리 굳게 닫혔다 해도 철문 사이로 삐져나오는 바람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에어컨 없던 시절, 더운 여름을 견디기 위해 가학광산 앞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합니다. 광산 안에서 빠져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했거든요. 그래서 가끔 단체 야유회가 열리는 장소로도 활용이 됐다고 합니다.

또 가끔 철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출입을 통제하지 않는 동굴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 박쥐도 구경하고 모험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코펠이랑 버너를 들고 가 동굴 안에 고인 물을 떠다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미끄럼틀 삼아 타기도 했다는, 이제는 어른이 된 광명시민들의 후일담도 들립니다.

광산이 폐광되고, 중금속 오염 등 흉흉한 소문으로 사람들이 잘 오지 않으면서 광산 앞은 황량 그 자체였습니다. 황량한 분위기는 또 다른 이들의 눈에는 쓸만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가깝고, 동굴이라는 장소의 색다른 분위기 때문에 영화 촬영장소로 종종 선택됐습니다. 1978년에 개봉한 무협영화 ‘파천신권’, 1989년에 개봉한 ‘블루하트’가 그러합니다. 파천신권은 1세대 액션배우인 왕호가 출연한, 무협영화 애호가들이 꼽는 한국형 무협영화이고, 블루하트는 당시만 해도 1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였다고 합니다. 최고 인기배우였던 신성일씨가 출연했고 당시 광명에 주둔하고 있는 52사단 군인들이 직접 영화에 출연하기도 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광명동굴 개발 당시 갱도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광명동굴 개발 당시 갱도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고생 참 많았다.

어떠신가요, 광명동굴의 옛 이야기. 일제치하를 견디고, 못 먹고 못살던 그 시절 온가족의 생계를 지켜주던 광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길고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명동굴에게 “고생 참 많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