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한 현대사회, 한편으론 허무해

책속에 답이 있다던 시대 낡았지만

아이에 아날로그 감성 전달하고파

온·오프라인 속 보이지 않는 경계

그 안에 변치않는 진심 존재했으면

김서령 소설가
김서령 소설가

시험이 끝나면 극장에 갔다. 어두운 상영관 안에 들어가 앉으면 쉬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시험 기간 내내 잘 참아낸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버스를 타고 극장을 지나갈 때마다, 벽면에 걸린 포스터를 보며 상영 중인 영화를 확인했다. 인터넷 예매는 없던 시절, 보고 싶은 영화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보려면 발품 팔기는 기본이었다. 혹여 표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으면, 리어카에서 쥐포를 팔던 아줌마가 쓱 다가와 물었다.

“암표 있는데. 몇 시 것 원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한 암표 아줌마. 무엇이든 해결하는 히어로 같았다. 극장 의자에 앉으면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볼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암전 후 따라 나오는 힘이 잔뜩 실린 성우의 목소리. 상영 직전 어디선가 들리던 ‘지직’ 소리를 떠올리니, 영화 한 편으로 행복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나는 아날로그 문화를 좋아했다.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편지함에 넣던 시절. 집으로 전화를 걸어 친구가 집에 있는지 물어야 했던 그때. 클릭 한 번, 터치 몇 번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현대의 시스템은 간단하고 편리하지만, 한편으로 허무하다. 준비하는 동안의 추억과 감정이 후룩 날아가기 때문이다.

“예전엔 말이야.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면 다시 볼 수 없었거든.”

불과 얼마 전 일을 설명해도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인터넷은 유선으로 사용했다고 말하니, 마치 내가 조선 시대 사람인 양 의아해했다. 원하는 영상을 언제든 틀어서 볼 수 있고 멈췄다 다시 보는 것도 자유자재. 심지어 1인 방송 시스템까지 생기고 나니, ‘간절히 바란다’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곧바로 시연해 보는 사회. 그래서 다른 이의 삶에 불쑥 들어가 보는 세상.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세상은 그만큼 새로운 범죄와 고통도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 TV 화면을 켜려고 화면 아래쪽을 오른쪽으로 쭉 밀어 넘기던 게 생각났다. 맞다. 이 아이는 누르는(push) 버튼이 아닌, 밀어서 켜는(slide) 버튼을 먼저 본 세대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이야기는 이제 3학년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다. 양치질을 까먹을지언정 배터리 충전은 잊지 않는 요즘 아이들.

책 속에 답이 있다던 시대는 낡았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정보를 더욱 감각적으로 얻을 수 있다. 바이러스가 범유행 상황에 이르러 사회 시설 곳곳에 제동이 걸리자, 온라인 세상이 중앙으로 나왔다. 회사 업무도 재택으로 처리하고, 아이들은 원격수업 체제에 돌입했다. 처음 겪는 교육 혼란에 모두 힘들었지만, 이제 모두 실내 생활에 능숙하다.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서로에게 거리를 두어야 했다. 바이러스로 인한 전쟁이 장기화하자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 가기 시작했지만,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린 채 플라스틱 가림막 안에만 앉아 있어야 했다. 앞을 보고 앉아 묵묵히 급식을 먹었다. 대화를 금지했기 때문에, 교실에는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온라인 기술 발전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교육을 이어가게 도와줬지만, 이론적 교육 이외의 것을 내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참담했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오해도 하고 갈등도 겪었다가 함께 해결해 내는 과정을 생략한다고 해야 하나.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의 세상은 지금과는 또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해외여행뿐 아니라 우주여행을 하고, 정말 집안일을 대신하는 로봇이 생길지 궁금하다. 나는 아이에게 아날로그 감성을 전달하고 싶어졌다. 기다리는 과정 또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까? 터치 한 번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의 전부는 아니라고. 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해 주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보이지 않는 얇은 경계가 있다. 그 안에 변함없이 흐르는 진심이 존재하길 바란다. 물론 이 또한 조선 시대 사람처럼 구는 엄마의 잔소리일뿐이겠지만 말이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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