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의료 선교사, 인천 최초 병원 개설

1895년에만 한국인 환자 4천728명 진료

고아원 설립, ‘약대인’(藥大人)이라 불려

논문 22편 등 한국학 저술… 인천서 연구

성공회 인천내동교회에 있는 랜디스 박사 흉상. 2025.4.16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성공회 인천내동교회에 있는 랜디스 박사 흉상. 2025.4.16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닥터 랜디스┃전영우 지음. 다인아트 펴냄. 190쪽. 1만5천원

조선이 제물포(인천항)를 통해 문호를 개방한 이후 세계 각국에서 많은 외국인이 선교, 사업 등을 목적으로 우리 땅에 들어와 제물포(이하 인천) 조계나 항성 등지에 자리를 잡았다. 개항기 조선에 머문 외국인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칭송받은 이는 그리 많진 않다.

한국 의료 선교의 개척자이자 한국학·인천학 연구의 선구자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1865~1898) 박사는 우리와 가까워지고자 스스로 ‘남득시’(南得時)란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한국식 이름이 아닌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았다.

랜디스기념사업회와 인천생각협동조합이 기획하고, 전영우 인천생각협동조합 이사장이 쓴 ‘닥터 랜디스’는 그동안 전설처럼 전해지기만 했던 랜디스 박사의 삶을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비로소 정확하게 복원해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태생의 의사 랜디스는 성공회 의료 선교사로 1890년 9월29일 새벽 인천으로 입국했다. 인천에 들어오자마자 의료 봉사를 시작한 랜디스 박사는 1891년 10월18일 지금의 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자리에 건립된 성누가병원이 개원하자 본격적으로 의술을 펼친다. 성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병원이다.

랜디스 박사는 성누가병원이란 명칭이 한국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주로 ‘약대인병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랜디스 박사는 환자의 집과 인근 섬까지 왕진을 나갔다. 1891년 10월부터 1892년 9월까지 1년 동안 병원을 찾은 환자는 총 3천594명으로,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1895년 한 해에만 한국인 환자 4천728명을 진료했다. 사실상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환자들이 랜디스 박사를 찾은 것이다.

랜디스 박사는 인천에서 고아원도 열었다. 그의 환자였던 과부가 6살 난 아이를 맡기고 숨을 거두자 그 아이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조선에서 8년여 동안 거의 쉬지 못했던 랜디스 박사는 과로와 질병으로 1898년 4월16일 서른 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랜디스 박사는 인천 외국인 묘지에서 잠들었다. 그의 무덤은 7피트 길이의 흰색 대리석 켈트 십자가와 라틴어 비문이 세워져 있다. 십자가 뒤편에는 한자로 ‘남득시’가 새겨져 있다. 랜디스 박사의 무덤이 있는 인천 외국인 묘지는 중구 북성동에서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가 2017년 부평구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졌다.

랜디스 박사는 한국 문화와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생전에 불과 3년 동안 22편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무속, 속담 등 민속 문화, 동화와 동요 채록, 불교 경전 번역 등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은 서구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랜디스 박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인천에서 보냈다. 그의 연구는 인천에서 이뤄진 것이므로 인천학 연구이기도 했다.

다음은 저자의 설명이다.

“랜디스의 한국학 연구에서 무속과 더불어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 동요의 채집이다. 당시 한국에서 불리던 동요와 민요를 채록한 것인데, 한국학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육성을 녹음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기에 당시 불리던 동요 가사를 고스란히 채록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됐다. (중략) 랜디스가 채록한 동요와 민요는 인천 지역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으로, 그의 연구가 인천학 연구로서 갖는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140쪽)

성공회는 랜디스 박사가 생전에 300여 종의 수집한 자료를 ‘랜디스 기념 문고’로 명명하고 제물포 선교회가 소장하도록 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서구 선교사들을 추방하면서 성공회가 철수할 때 랜디스 문고를 조선기독대학(현 연세대학교)에 위탁했다. 해방 이후 다시 한국에 돌아온 성공회가 랜디스 문고를 회수하려 했으나, 연세대 측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공회의 요구를 거절했다.

랜디스의 자료들은 일부 유실된 채 현재 연세대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일반인 접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자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천 시민 중에서 랜디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며 “랜디스가 인천에 머물던 8년이란 시간 동안 ‘약대인’으로 불리며 인천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던 그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인천은 그동안 위대한 위인을 기리는 일에 너무나 소홀했다. 인천 시민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127주기 맞아 ‘닥터 랜디스’ 출판 기념회 개최

랜디스 박사의 127주기인 지난 16일 오후 7시 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본당에서 랜디스기념사업회가 마련한 ‘닥터 랜디스’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성누가병원(낙선선시의원)이 있던 그 자리다. 성공회 인천내동교회에는 성공회 병원을 가리키는 ‘영국병원(英國病院)’ 표지석이 남아 있고, 랜디스 박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날 출판 기념회는 유동현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의 사회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가 제작한 랜디스 박사 소개 영상 시청 ▲내동교회 성가대 임지은 지휘자의 축하 공연 ▲한인숙 내동교회 신자회장의 추모 기도 ▲장기용 신부의 발간사 ▲인천학 연구자인 김창수 전 인천연구원 부원장의 추천사 ▲저자 전영우 이사장의 발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김정환 주교의 축사와 축복 기도 순으로 진행됐다.

지난 16일 오후 7시 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본당에서 랜디스기념사업회가 개최한 ‘닥터 랜디스’ 출판 기념회에서 기념사업회 대표인 장기용 인천내동교회 신부가 축사를 하고 있다. 2025.4.16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지난 16일 오후 7시 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본당에서 랜디스기념사업회가 개최한 ‘닥터 랜디스’ 출판 기념회에서 기념사업회 대표인 장기용 인천내동교회 신부가 축사를 하고 있다. 2025.4.16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지난해 12월 출범한 랜디스기념사업회는 랜디스 박사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관련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랜디스기념관을 설립하는 게 가장 굵직한 계획이다. 이번 책 출간으로 기념사업회의 본격적인 활동을 알렸다.

랜디스기념사업회는 우선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한 의사 랜디스의 헌신과 노력을 되돌아보고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고아원을 열어 진료 활동을 마치고 휴식할 시간을 쪼개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보살핀 랜디스의 인간애와 숭고한 봉사 정신을 살펴 우리 삶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는 교육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랜디스가 남긴 다양한 한국학 연구의 성과를 출판 등을 통해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랜디스 관련 자료와 유물을 전시하는 기념관 설립을 위해선 랜디스 문고를 보유하고 있는 연세대 측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랜디스기념사업회는 ‘닥터 랜디스’ 판매 수익금으로 기념사업회 기금을 조성한다. 기념사업회 대표를 맡은 장기용 신부는 출판 기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랜디스 박사의 삶은 너무나 훌륭한데, 너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랜디스기념관을 조성하고, 랜디스 문고를 개방해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랜디스연구회를 결성해 선집을 발간하는 등 그를 꾸준히 기억하길 바랍니다. 랜디스 박사의 삶을 다룬 글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랜디스 연구는 이번에 출간한 ‘닥터 랜디스’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