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
무슬림 여인 세족식 인상 깊게 각인
2014년 방한, 세월호 유족 손잡기도
월급도 안받고 살다가 14만원 남겨
끝까지 가난한 이들 성자로 함께 해

불교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을 처음 접했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첫번째 이야기를 전하는 다음의 기록을 읽고서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인가 세존(世尊)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이윽고 밥때가 되자 세존은 장삼을 걸치고 바리때를 든 채 사위국 성으로 들어가 성안에서 걸식(乞食)하셨다’.
나는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 성안에서 먹을 것을 구걸했다는 뜻)’이라는 여섯 글자를 읽으면서 눈을 의심했다. 석가세존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수급고독원은 사위국의 태자였던 기타와 수달 장자가 바친 것으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을뿐 아니라 당대에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손꼽혔다 한다. 그런데 그토록 으리으리한 사원의 주인이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세존이라는 존호로 불리는 사람이 정작 끼니때가 되면 성안으로 들어가 걸식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어지는 설법에 나오는 무상보리도(無上菩提道)나 반야바라밀다법(般若波羅蜜多法)이야 속인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이지만 세존이 걸식했다는 기록만은 구도자의 삶을 상상할 때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줄곧 떠오르곤 했다.
걸식은 이른바 탁발(托鉢)로, 그 뜻이 바리때에 의지한다는 뜻이고 보면 탁발이란 바리때에 음식이 채워지면 먹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 끼를 장담할 수 없는 대단히 불확실한 생계 수단이다. 두말할 것 없이 바리때에 음식을 채워주는 존재는 중생의 자비심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붓다가 일체 중생에게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말의 실천적 의미와 함께 그가 자비를 설파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걸식으로 끼니를 잇는 구도자는 중생의 자비가 없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도자는 중생의 자비심에 기대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의 세계를 지탱하는 원리는 자비심이 아니라 이기심이다. 빵이 먹고 싶으면 우리는 빵집 주인의 자비심이 아닌 그의 손익계산에 따른 생산품에 나의 손익계산에 따라 돈을 지불하고 빵을 얻는다. 빵집 주인이 내게 자비심을 베푼 것도, 내가 그에게 자비심을 베푼 것도 아니다.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치료를 맡기지만 병자를 돌보는 자비심이 아니라 치료에 성공해야 이익이 보장되는 의사의 이기심을 믿고 내 몸을 기꺼이 맡긴다. 아무려나 이렇게 살아가면 자비심 없이도 살 수 있거니와 자비심을 바랄 필요조차 없어지고 말 터이니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려놓는 일 또한 따라서 사라지지 않겠는가.
며칠 전 지난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가 치러졌다. 내 기억 속 생전 교황의 모습은 무릎을 꿇고 어느 무슬림 여인의 발을 씻어주는 사진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후로도 그는 교도소의 수인을 비롯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발을 씻어주며 그들의 발에 입 맞추는 의식을 계속했다. 석가모니의 걸식과 마찬가지로 가톨릭의 세족(洗足) 의식 또한 가장 낮은 곳에 자신을 내려놓고 그들을 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고통 앞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며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자신의 교황 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것도 ‘빈자(貧者)의 성자’로 불렸던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성인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이름처럼 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가난한 이들의 성자였다. 생전의 그는 월급이 얼마인지 묻는 말에 “월급을 받지 않으며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들에게 요청하는데 대부분 얻을 수 있다”고 답했다. 그가 남긴 재산은 14만원이었다 한다.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의 수가 20만명에 이르렀다지만 그들 중에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있었고 난민과 이민자, 수감자, 노숙인, 성소수자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한 가난한 이들의 성자,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가 떠나셨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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