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는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돌아갈 집이 있고, 자신을 찾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한 피난처이며 끔찍한 상황에서도 생존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소녀가 끝내 깨달은 것은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돌아갈 집이 없다"고 외치는 노숙인의 한탄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는 출구가 없고, 미래에는 전망이 없다.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부산행'의 프리퀄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전사(前史)를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부산행'에서는 뉴스를 통해 스쳐지나가듯 나왔던 '그날 밤의 폭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좀비'로 통칭되는 정체불명의 감염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폭동의 기원에 대한 영화다.
보다 정확히 말해 '왜 폭동으로 불리게 됐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산행'을 통해 이미 짐작하듯이, 폭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폭동으로 규정된 사건이 있었을 뿐.
'서울역'은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부산행'에서 연상호 특유의 강한 주제의식과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해 아쉬웠던 그의 팬이라면, '서울역'에서는 '연상호 스타일'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더욱이 후반의 반전과 연상호의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속도감 넘치는 역동적 작화는 한층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서울역'은 '부산행'의 프리퀄이라기보다는 감독 자신의 자기고백적 진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인 '부산행'과는 결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결말부가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반면, '서울역'은 출구도 없고 전망도 없는 암울한 세계관으로 되돌아온다.
첫 장편 '돼지의 왕'에서 '돼지 되기'에 대해 말했다면, 이번에는 '좀비 되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도망가고 또 도망가는 지난한 과정의 끝에서 질문한다. 죽거나 좀비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이대연 영화평론가 (dupss@nate.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