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공무원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해임됐던 고광식(61)씨가 지난 2월부터 인천 송도유원지와 청학동, 선학체육관 일대를 운행하는 523번 버스 기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고씨는 오전 4시40분 첫차를 몰기 위해 2시간 전에 일어나 차고지가 있는 연수구 동춘동으로 향한다. 그는 공무원 해임 처분을 받고 난 뒤에도 해직 공무원과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활동에 앞장섰었다. 지난해 국회에서 '공무원 노동조합 관련 해직공무원 등의 복직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명예 회복을 했으나 이미 정년이 지난 고씨는 복직을 할 수 없게 됐다.
"공무원으로 일할 땐 문서로 행정을 봤다면 버스 기사인 지금은 매일 수백 명의 시민과 얼굴 맞대고 인사하는 대면 행정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 부평구 공무원이었던 고광식(61)씨는 40대였던 지난 2002년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해임된 후 어느덧 20년 가까이 지나 지난해 환갑을 맞이했다.
2020년 국회에서 '공무원 노동조합 관련 해직공무원 등의 복직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명예 회복을 했으나 이미 정년이 지난 고씨는 복직을 할 수 없게 됐다.
운전하는 걸 좋아했던 그는 지난해 3월 부천지역 마을버스 기사로 일하다 지금은 인천 송도유원지와 청학동, 선학체육관 일대를 운행하는 523번 버스 기사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고씨는 오전 4시40분 첫차를 몰기 위해 2시간 전에 일어나 차고지가 있는 연수구 동춘동으로 향한다. 직원 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차키와 배차표를 건네받아 버스를 예열하며 일과를 시작한다.
버스 정차할 때마다 눈 맞추고 '어서 오세요' '출발해요' 말하는 게 어찌나 설레는지…
"출퇴근길 바쁜 승객에게 내가 운행하는 버스가 '발'이 되는 거잖아요. 공직자로 있었을 때나 지금이나 시민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가슴 벅차요. 정거장에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앉으셨나요', '출발해요' 네 마디를 하는 게 어찌나 설레는지…."
새벽부터 시작한 근무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난다. 고씨는 오늘 몇 명의 승객을 태웠는지 확인한다. 하루 적게는 130여명, 많게는 200여명이 그의 버스를 이용한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그날 태웠던 승객들을 떠올리고 '오늘 버스가 흔들려서 누군가 불편하지 않았을까', '길거리에 타야 할 손님을 못 보고 지나치진 않았나?', '손님이 누른 하차 벨을 제때 확인하지 못해서 정류장에서 조금 더 먼 곳에서 내려주진 않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고씨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해직 공무원과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활동에 앞장섰던 이였다.
그는 지금도 '소속 인천광역시 부평구. 직급 지방행정 주사보. 성명 고광식'이라고 적힌 공무원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공무원증은 이미 빛이 바랬지만, 이를 바라보는 고씨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고씨는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지 8년째가 되던 1998년에 부평구의 한 동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합법화되고, 공무원 직장협의회법이 만들어진다는 보도를 접했다. 공직사회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과 권위적인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고씨는 무작정 두 장짜리 직장협의회법을 인쇄해서 동료들에게 '함께 하자'고 설득하러 다녔다.
직장협 초대위원장 '부조리 저격수 역할 자처'… 복직 특별법 통과됐으나 이미 정년 지나
이듬해 부평구공무원직장협의회 초대 위원장, 2001년엔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게 된 그는 관행이란 이유로 마냥 덮어두고 모른 체했던 부조리를 찾아내 쓴소리를 마다치 않는 저격수 역할을 자처했다.
고씨는 위원장을 맡으면서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가장 먼저 살펴봤다. 불필요한 예산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각 부서에 구청장 쌈짓돈처럼 쓰였던 '숨어있는 예산'을 찾아냈다.
환경미화원 격려금 명목으로 세운 예산은 사실상 구청장의 업무 추진비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당시 어느 예산 1천만원은 구청 출입기자 20~30명에게 설과 추석 때마다 소위 '떡값'으로 쓰이고 있었다.
구청에서 출입기자의 해외 취재 지원비 명목으로 책정한 예산 2천만원도 찾아내 전액 삭감했다. "구민 혈세 낭비하는 구청 기자실 폐쇄하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부평역전에 내걸기도 했다. 구청에서 보조금을 주는 체육회와 자문 기관에 대한 지원도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각종 단체가 1년에 한두 번 활동하는 것으로 구청 예산을 받아가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런 단체 대부분이 지역의 토우세력과 학연·지연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습니다. 공익을 훼손하는 예산 집행의 고리를 모조리 다 끊어내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 고씨에게 동료들은 '단순하고 무식하게 지른다'는 의미로 고광식이란 이름 대신 '단무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씨는 화염병이나 최루탄 터지는 거리를 휘젓던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공무원 신분으로서 선봉에 서서 투쟁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천은 물론 서울, 강원도, 경상남도 등 전국 각지 경찰서의 유치장이란 유치장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고씨는 두 차례 구속되면서 인천과 서울 구치소에 수 달간 갇혀 있기도 했다.
"당시 구치소엔 현직 공무원들만 모여있던 수감자 방이 따로 있었어요. 나를 제외하고 대한주택공사 인사 총괄 책임자와 경찰 등 6명은 뇌물 수수 혐의로 들어온 거라 명찰색이 흰색이었죠. 공안수였던 저만 갈색 명찰이었습니다."
고씨는 2002년 정부의 입법안이던 공무원조합법 폐기를 위해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실을 점거하다가 두 번째로 구속됐다. 당시 파업권이 없는 공무원 3천여명이 합법적으로 단체 행동을 하기 위해 최초로 연가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임용 동기 5급이지만 후회 안 해… 그때 목소리 내고 몸부림쳐 '공무원사회 변화 가져와'
그렇게 구속된 지 2개월이 지났을 때 고씨는 공무원 해임 처분을 받았다. 지방행정직 7급이던 때였다. 함께 임용됐던 동기들은 지금 5급으로 각 과 과장으로 공직 활동을 하고 있다. 주변에선 "그때를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고씨는 "결단코 후회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어 "그때 내가 목소리를 내고, 몸부림쳤고,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 같았던 공무원 사회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대답한다.
고씨가 일자리를 잃으면서 아내와 네 자녀가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가족들은 내색 없이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당시 첫째 대학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던 고씨를 대신해 아내가 돈을 벌었다. 자녀들은 고씨의 선택에 대해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응원했다.
운동권 출신은 아니지만 투쟁에 선봉 전국 유치장 안 가본 곳이 없어 일자리 잃고 가족들 힘든 시기… 자녀들도 '아빠가 자랑스럽다' 응원
고씨는 공무원 지위가 박탈된 이후에도 공무원 노조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공무원 신분은 아니었지만, 공무원노조 인천본부 부평지부 위원장 직함을 유지하고 직원 대표로서 당시 구청장을 상대로 2003년 상반기 단체 협약을 전격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이후엔 공무원노조 희생자구제심사위원장과 공무원노조 인천본부 수석부본부장·통일위원장, 민주노총 인천본부 부본부장, 공무원노조 인천본부 회계감사위원장·희생자원상회복투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어 공무원노조 부정부패추방위원장으로 활동을 마무리했다.
인천에서 노조 활동을 해서 해직된 공무원은 고씨를 포함해 부평구청 강영구씨, 계양구청 현창효·하태암·윤희용·박찬미씨, 서구청 이준기·박철준씨, 동구청 추인호씨 등 모두 9명이다. 이들 중 3명은 정년이 지났고 6명이 복직을 앞두고 있다는 게 고씨의 설명이다.
"복직이 결정된 동료들이 다시 출근하는 날에 다 같이 모일 겁니다. 서로 얼굴 보고 웃으며 '우리 고생했다'고 말하는 거, 이제 원하는 건 그거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공직사회가 이전보다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요즘 자주 듣는 가수 조항조 노래 '때'에는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나야지'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또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음 편하게 새 길을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