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이 맨몸으로 붙는 싸움

‘뱃살은 곧 힘’… 달라진 정의에 열광

씨름에 엮어 편견 비춘 영화 ‘모래바람’

“저들의 결투에서 여성관객 힘 얻어가길”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모래판에 여자들의 두 다리가 우뚝 섰다. ‘장사는 곧 남자’.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들의 스포츠로만 여겨졌던 씨름, 이제는 먼 과거다. 여자도 장사다.

전국 곳곳을 돌며 여자씨름 프로 시합이 펼쳐진다. 60㎏ 이하의 매화급, 70㎏ 이하의 국화급, 80㎏ 이하의 무궁화급. 이 모든 체급을 통틀어 최강자를 꼽는 여자부 천하장사대회가 지난 2009년 시작됐다. 그렇게 1대 여자 천하장사 임수정이 탄생했다.

여기, 여자씨름에 얽힌 세 여자들이 있다. 죽을 힘을 다해 샅바를 잡는 여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모래판을 지켜보는 여자, 그리고 이 모습을 기록한 여자.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또 어째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우리가 여자씨름을 사랑하는 이유’,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 스틸컷. 모래판 위 두 여성들의 치열한 싸움에 숨은 고뇌와 우정 등을 보여준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 스틸컷. 모래판 위 두 여성들의 치열한 싸움에 숨은 고뇌와 우정 등을 보여준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 남자 아닌 ‘여자’ 선수… 여자씨름 보러 연차 낸다

“갑자기 웬 휴가? 씨름? 남자 선수들 보려고?”

수원시에 사는 이모(30대)씨, 그리고 그의 지인들은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연차 휴가를 ‘씨름 보러 가기 위해’ 쓴다는 게 적잖이 특이하다는 반응이다. 그럴 때면 분명하게 일러둔다. “아니, 남자 말고 ‘여자씨름’ 보러 가는 건데?”

‘힘쎈 여자’들의 샅바 싸움을 지켜보는 두 눈. 관중석을 메운 건 또 다른 여자들이었다. 전통적인 씨름 관중, 중장년층과 분명 대비되는 모습이다. 손에는 플래카드와 편지가 들려있다. 아이돌 팬덤의 상징, 대포(망원렌즈) 카메라도 따라온다. 이들은 모래판 뒤에서 스트레칭 하거나 팬들을 향해 손 흔드는 선수들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는다.

수원서 열리는 추석씨름대회… 여성장사 보러 여성팬 몰렸다

수원서 열리는 추석씨름대회… 여성장사 보러 여성팬 몰렸다

때마다, 기막히게 터지는 탄성은 관람에 재미를 더해줬다. 넷플 사이렌 우승자 김은별 인기커피차·손에 든 현수막으로 응원매화·국화·무궁화장사 44명 격돌여성 장사들의 결투를 보러 전국 각지에서 수원으로 모여든 이들은 모두 2030세대 여성들이다. 최근 가는 곳마다 '여덕(여성 덕후의 줄임말·여성 팬)'을 몰고 다닌다는 여자 씨름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12일 오전 수원시 장안구 수원체육관에서는 이날 개막한 '위더스제약 2023 추석장사씨름대회'의 여자부(매화급·국화급·무궁화급) 예선 4강 선발전과 여자부 단체전 결승 선발전이 진행됐다. 매화장사(60㎏ 이하) 결정전 17명, 국화장사(70㎏이하) 결정전 16명, 무궁화장사(80㎏ 이하) 결정전 11명. 총 44명의 선수가 4강 진출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단체전 예선에는 6개 팀(안산시청·영동군청·거제시청·괴산군청·구례군청·화성시청)이 참여했다.명실상부, 이날 씨름장 분위기 메이커는 김은별(매화급·안산시청)의 팬들이었다. 경기장 앞에 온 '커피차'에서부터 손에 든 현수막까지 다양한 응원법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은 김은별에게 환호하는 것을 넘어 안산시청 소속 선수를 비롯한 다른 지역 선수들도 목청껏 응원했다. 경기를 보러 휴가를 내고 충북 충주에서 왔다는 권수미(33)·권수민(30)씨 자매는 "사이렌을 보고 씨름에도 관심이 생기고 김은별 선수 팬이 됐다"며 "여자부 경기를 모두 다 보고 갈 계획"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여자 씨름에 매료된 여성 팬이 급증한 데는 이처럼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섬'이 톡톡히 한몫했다. 커다란 렌즈와 카메라를 들고 김은별을 촬영하던 박모(26)씨는 "씨름은 매력 포인트가 많은 스포츠다. 1분 안에 경기가 끝나는데 긴장감이랑 역동감이
https://www.kyeongin.com/article/1655386

여자씨름에 팬덤이 생긴 시작점은 단연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섬’(2023)이었다. 여기에 안산시청 씨름단 김은별이 출연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인기는 김은별, 안산시청을 넘어 여자씨름 전체로 확대됐다. 여자씨름 팬덤은 ‘진국’으로 부를 만큼 심지가 굳다. 씨름 종목 특성상 수도권보다는 지방에서 시합이 열릴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기꺼이 달려간다.

여자 선수와 이들에 열광하는 여자 팬. 이들이 여자씨름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김은별의 팬클럽 ‘금별단’ 회장 이모씨는 편견을 넘어선 여자들끼리의 사투, 그리고 씨름 직관만이 선사하는 특유의 매력을 꼽았다. 응원하는 선수를 고르고 승패를 지켜보는,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여자 둘이 맨몸으로 서로 있는 힘을 다해 결투를 벌이는데, 그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보면 빠져들어요. 여자들도 이렇게 이를 악물고 서로를 이기기 위해 엄청나게 사투를 벌이고 싸우는구나…. 근데 또 경기 끝나고 내려갈 때는 서로 잘했다고 격려해줘요. 경기장에 가면 그런 아주 세세한 모습들이 다 보이거든요.”

지난 2009년 열린 제1회 국민생활체육 전국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 해당 대회에서 우승하며 임수정은 최초의 여자 천하장사 타이틀을 얻게 된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지난 2009년 열린 제1회 국민생활체육 전국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 해당 대회에서 우승하며 임수정은 최초의 여자 천하장사 타이틀을 얻게 된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 여자씨름 조명한 최초의 영화… 다큐멘터리 ‘모래바람’

“씨름이 내 삶에 최고의 활력소였던 거 같아요. 인생을 좀 바꿔놓은 거 같아 나름.”(송송화)

‘힘쎈 여자’가 되기 위한 사투. 여자 팬들뿐만 아니라 여자 선수들에게도 씨름은 스포츠 그 이상의 의미였다. 안다리, 밭다리, 들배지기…. 단순히 기술을 연마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갔다. 때로는 자신의 한계와도 겨뤘다.

오는 27일 개봉을 앞둔 최초의 여자씨름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이 보여준 현실의 드라마다. 송송화(58·대한씨름협회 이사), 임수정(39·영동군청), 양윤서(34·영동군청), 김다혜(33·안산시청), 최희화(32·구례군청). 여자씨름계의 전설로 회자되는 팀 ‘콜핑’ 시절 다섯 선수의 고군분투가 담겼다. 콜핑은 지난 2015년 최초의 여자 실업씨름단으로 창단해 막강한 실력을 뽐내던 팀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에 나오는 송송화의 은퇴식 장면. ‘주부 장사’로 이름을 알리며 씨름판을 평정했던 송송화가 샅바를 내려놓고 제2의 씨름 길로 들어서는 모습 등이 등장한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에 나오는 송송화의 은퇴식 장면. ‘주부 장사’로 이름을 알리며 씨름판을 평정했던 송송화가 샅바를 내려놓고 제2의 씨름 길로 들어서는 모습 등이 등장한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영화는 모래판 아래서 벌어지는 선수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5년간 콜핑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취재해 기록한 덕분이다. 독특한 건 씨름을 소재로 삼았지만, 주된 장면은 경기 장면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자 선수들의 감정을 세세하게 드러내는 데 집중하며, 씨름과 여성주의를 세련되게 연결짓는다.

송송화가 ‘주부 송송화’에서 ‘장사 송송화’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가 하면, 여자씨름 최초의 천하장사 임수정이 맛본 성취, 그리고 곧이어 맞닥뜨린 1위를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과 그에 따른 고뇌를 등장시킨다. 양윤서·김다혜·최희화는 이런 두 선배를 롤모델 삼아 천하장사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섬’이 의도치 않게 여자씨름 대중화에 불을 지폈다면, 그보다 훨씬 앞서 팀 콜핑은 막강한 실력으로 여자씨름의 전문성을 증명한 역사 그 자체였다. 이미 여성씨름 팬들 사이에서는 공식 개봉에 앞서 영화제 등에서 단체관람하며 호응했다. 한국을 넘어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지난 1월 제53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전 세계인들과 만났다.

최초로 여자씨름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은 제53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단순한 스포츠 영화를 넘어 여성들의 사투와 우정을 그려 호평을 받았다. /박재민 감독 제공
최초로 여자씨름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은 제53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단순한 스포츠 영화를 넘어 여성들의 사투와 우정을 그려 호평을 받았다. /박재민 감독 제공

■영화 ‘모래바람’ 박재민 감독 “운동하는 여성의 몸, 자유로움 보여줘”

5년간 팀 콜핑 쫓아다니며 다큐 제작

나약하지 않고 강인한 모습들 보여줘

묵묵히 자신의 길 걷는 선수에 포커스

“높은 체급의 선수들은 뱃살이 있어요. 그런데 선수들이 그걸 애써 가리지 않아요. 부끄러워하지 않거든요. 배에서 힘이 나오니깐요.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박재민(41) 감독은 5년여간 팀 콜핑을 쫓아다니며 ‘모래바람’을 찍었다. 전업 감독이 아니다. 한 영화사에서 경영직으로 일하는 직장인이다. 그는 아껴뒀던 연차를 하나하나 내고서 현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완성한 게 지금의 다큐멘터리다. 여자씨름을 향한 호기심과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박 감독은 “영화사에 다니면서 느낀 게 여성들의 이야기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접 여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며 “어느 해 설날 티비를 틀었는데 여자씨름을 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아 이거다’싶어 취재하면서 촬영을 시작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오마주해 제작한 영화 ‘모래바람’의 포스터. 남성들이 씨름하는 원작을 재해석해 여성들의 모습으로 바꿨다. 실제 경기에서 샅바는 오른쪽 허벅다리에 맨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오마주해 제작한 영화 ‘모래바람’의 포스터. 남성들이 씨름하는 원작을 재해석해 여성들의 모습으로 바꿨다. 실제 경기에서 샅바는 오른쪽 허벅다리에 맨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모래바람’은 씨름이라는 스포츠를 소재로 삼았지만, 여성 정체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 사회가 여성의 신체를 표현할 때 어리고 마른 몸을 선호하고, 그게 아름답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며 “운동하는 여성들의 몸은 여성들에게 자유로움을 준다.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싸울 수 있는 강인한 존재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2021년. 결코 짧지 않은 촬영 기간을 온전히 팀 콜핑에 쏟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당시 콜핑은 최고의 막강한 팀이었다. 또 다양성이 있는 팀이기도 했다. 여자씨름 최강자 임수정 선수와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는 볼 수 없는 나이대의 송송화 선수, 그러니깐 가장 ‘센캐(힘이 센 캐릭터)’와 가장 나이 많은 캐릭터가 공존한다는 게 돋보였다”고 설명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 속 씨름 장면. 여자씨름 최초의 천하장사 임수정이 화성시청 선수와 결투를 벌이고 있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 속 씨름 장면. 여자씨름 최초의 천하장사 임수정이 화성시청 선수와 결투를 벌이고 있다. /(주)영화특별시 SMC 제공

영화에는 독보적인 여자씨름 전설, 천하장사 임수정이 시합에서 연달아 패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살면서 늘 위로만 올라갈 수는 없다. 내려갈 때도 있는데, 임수정 선수의 패배는 이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도전하는 길을 선택한다. 부상에 힘들어해도 계속 연습하고 재활에 힘쓴다. 승패에 상관없이 나만의 길을 가는 모습에 울림을 받았다”고 전했다.

여자 선수와 여자 팬이 일궈낸 고유한 장르, 여자씨름. 박 감독은 “저도 여자씨름 팬 중 한 명이다. 모래가 사방으로 튈 때의 쾌감들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래바람’의 주인공들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걷는다. 이런 여성들의 강인한 몸에서 나오는 힘을 보고 여성 관객들이 힘을 얻었으면 한다”고 힘줘 말했다.

■함께 응원해요… 경기도 여자씨름 팀은?

▲안산시청 씨름단┃2007년 창단

매화급: 김단비·김은별·김채오

국화급: 이유나·이재하·정수영

무궁화급: 김다혜

▲화성시청 씨름단┃2018년 창단

매화급: 박수연·윤희준·이연우·이현민

국화급: 김주연·신하진·이서후

무궁화급: 김아현·이화연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