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거목 박완서 14주기 추모 낭독공연

첫 장편 도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김길려 음악감독, 공연 채운 11곡 만들고 연주

박완서 작가의 큰 딸인 호원숙 작가가 공연 전 공연장 앞에서 첫 장편 소설 낭독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2025.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박완서 작가의 큰 딸인 호원숙 작가가 공연 전 공연장 앞에서 첫 장편 소설 낭독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2025.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박완서를 사랑한 예술인들이 박완서가 사랑한 구리시민을 위해 만든 수작(秀作).

한국문학의 거목 박완서 14주기를 추모하는 낭독공연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지난 27일 구리 아트홀 코스모스 대극장에서 큰 박수와 함께 막을 내렸다. 딱 한 번 공연으로 끝을 내기엔 아까울 정도였다. 장편소설을 한 시간 공연으로 소화하기 위해 전 곡을 새로 써내려간 품을 생각하면, 무료라는 사실이 외려 불편해졌다.

고 박완서 작가가 생전 마지막으로 거주한 구리시는 코로나19가 극심하던 2020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추모제처럼 낭독공연을 이어 오고 있다. 2012년 1월30일 ‘그리움을 위하여’를 시작으로 지난해는 ‘자전거 도둑’까지 12회의 공연은 주로 단편소설을 낭독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첫 장편 도전이다. 장편을 온전히 낭독할 수 없어, 이번에는 뮤지컬처럼 음악과 노래로 작품을 압축했다.

총감독에 방현석, 프로듀서 이근욱, 음악감독 김길려, 극작·작사 이인애, 배우 이미주, 민채원, 임수빈, 민정아가 열연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홀로 선 박완서를 연기한 이미주 배우는 감정 조절로 어린 박완서의 슬픔을 잘 표현했다. 2025.2.27 /구리시 제공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홀로 선 박완서를 연기한 이미주 배우는 감정 조절로 어린 박완서의 슬픔을 잘 표현했다. 2025.2.27 /구리시 제공

공연은 AI(인공지능)가 구현한 박완서 작가의 음성으로 시작한다.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이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작가는, 그러나 기억에 의존한 글짓기가 ‘뼛속의 진까지 다 빼 주다시피 힘들게 쓴’ 것이라고 말한다. 원저 앞에 달린 ‘작가의 말’에서 이 같은 문장을 발췌한 것은 제작자가 소설의 완성도를 언급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지만, 공연을 보고 나니 자신들의 노고도 그러했음을 웅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몰입도를 높인 일등공신은 무대음악이다. 박완서 작가의 목소리로 공연의 문이 열리자 무거운 듯 차분한 피아노 소리가 관객을 이끌고 이내 점점 밝아지면서 철부지 박완서의 목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엄마가 어린 완서를 ‘휘뚜루 신여성’을 만들겠다고 서울에서 교육하겠다고 하자 할머니와 생긴 갈등에서 완서의 종종머리를 ‘싹둑’ 잘라내어 종지부를 찍은 부분, ‘서울살이 법도·셋방살이 법도, 아니 이건 그냥 엄마의 법도’로 완서의 스트레스를 유쾌하게 압축한 부분 등에선 ‘예나 지금이나 엄마란’이라며 빙긋 웃었다.

가장 오른쪽부터 임수빈(오빠, 할아버지 역), 이미주(어린 박완서 역) 배우와 오른쪽 세번째 민채원(낭독, 현재 박완서 역) 배우, 그 왼편에 민정아(엄마 역) 배우다. 2025.0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가장 오른쪽부터 임수빈(오빠, 할아버지 역), 이미주(어린 박완서 역) 배우와 오른쪽 세번째 민채원(낭독, 현재 박완서 역) 배우, 그 왼편에 민정아(엄마 역) 배우다. 2025.0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공연은 완서의 어린시절에서 밝고 유쾌했다. 하지만 우산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완서의 가족이 일제시대 풍파를 고스란히 맞닥뜨리면서 점차 어두워진다. 창씨개명으로 가족이 갈등하고, 강제징용으로 오빠가 내적 갈등을 하거나 엄마의 분노가 폭발하는 부분, 고향에서 맞은 해방과 이웃과의 갈등, 꿈꾸던 사대문 안에 살게 됐지만 곧 닥친 한국전쟁과 피란. 일제시대 이후 지금의 풍요에 이르기까지 박완서 작가의 세대가 겪었던 아픔이 섬세하게 선별된 구문과 대사, 음악으로 전달됐다.

박완서 작가가 모든 저서에서 보여줬듯 그런 중에도 항상 슬픔으로만 채워져 있던 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친구와 만나, 대학을 가서 느끼는 기쁨은 그럼에도 거기에 있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서울대 교정에 있던 박 작가를, 김길려 음악감독은 위험하고 어두운 음악과 해맑은 박완서의 목소리를 교차해 들려줌으로써 전쟁의 당혹스러움을 표현했다. 오빠의 총상, 20대의 박완서 어깨에 올려진 삶의 무게에도 피란을 포기하고 다시 현저동 빈집에 들어갔을 때 몸을 녹이고 주린 배를 채우면서 다시 희망을 보는 피날레는 박완서 선생이 전했던 그 희망을 환희로 바꾸는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휘파람을, 큰 박수를, 환호성을 외쳤다. 코스모스 대극장은 공연의 환희로 가득찼다.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면서 무대음악을 지휘한 김길려 음악감독은 70여 분을 꽉 채운 11곡을 작사 작곡한 인물이다. 김 음악감독은 스스로가 박완서 작가의 팬이다. 그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이미 여러번 읽었지만, 공연을 준비하며 수차례 또 읽었다. 책이 워낙 좋기 때문에 공연이 잘 됐다”고 했다. 그는 “박완서 작가님의 낭독공연을 이전에도 했지만 오늘 특히 더 좋았던 것 같다. 저도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했다. 오늘 연주는 공연에 취해 흘러갔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만난 김길려 음악감독이 자신이 연주한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만난 김길려 음악감독이 자신이 연주한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박완서 작가의 큰 딸인 호원숙 작가는 “지금까지 낭독공연할 작품을 제가 골라왔는데, 이번 책은 공연팀이 직접 골라왔다. 장편을 한다고 해서 굉장히 기대가 컸는데 정말 좋았다”고 평가하며 “연출하는 분들, 음악감독이 정말 너무 열심히 하셨다.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역시 단회로 끝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편 이날 무대 바깥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을 형상화해 책 겉 표지에 담아낸 예술제본 전시회도 있었다. 아들을 잃고 쓴 ‘한 말씀만 하소서’ 책 표지를 심해처럼 깊은 바다색의 가죽 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긁고, 금박의 작은 글씨로 제목을 꾹꾹 눌러찍어 참척의 아픔을 표헌하거나, 마블링으로 전쟁의 참화에서도 희망을 찾는 작가를 표현하는 등 제본작가들이 꾸민 특별한 12권의 책 전시회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박완서 작가의 작품세계를 두고 얘기를 나누었다.

이날 공연 시작 전 내빈으로 참석한 백경현 구리시장과 신동화 구리시의회 의장이 10여년을 지속한 행사에 대한 애정과 지원의지를 표명했다.

4명의 제본작가가 지난 27일 공연장 앞에서 자신들이 이해한 박완서의 세계를 관객들과 나누고 있다. 2025.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4명의 제본작가가 지난 27일 공연장 앞에서 자신들이 이해한 박완서의 세계를 관객들과 나누고 있다. 2025.2.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