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벌러 출전한 콩쿠르 우승… 독일서도 통한 ‘짠물인천 사나이’

성악가 안갑성이 지난 2일 인천시 공공 소극장 문학시어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25.4.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성악가 안갑성이 지난 2일 인천시 공공 소극장 문학시어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25.4.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화려한 가면 무도회를 배경으로 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바리톤 안갑성은 지난달 2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한경아르떼필하모닉 정기 연주회 ‘2025 새봄을 여는 왈츠의 향연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20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박쥐’의 주인공 아이젠슈타인 남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번이 몇 번째 아이젠슈타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역할로만 수많은 공연을 소화했다.

지난 2일 오전 인천 SSG랜더스필드 지하에 있는 인천시 공공 소극장 ‘문학시어터’에서 안갑성을 만났다. 록커 같은 복장으로 나타난 성악가는 대화할 때도 에너지가 넘쳤다. 쩌렁쩌렁한 성량의 목소리가 소극장 안에서 울리며 한참을 맴돌았다. 그의 노래를 가까이에서 들으니 ‘목소리가 악기’라는 말이 실감됐다.

인현동서 나고 자란 ‘동인천 키즈’

클래식 좋아한 부모님 영향 성가대 활동

非예고 출신으로 한예종 성악과 입학

1984년 5월 인천 인현동 자택에서 안갑성(오른쪽)이 형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안갑성 제공
1984년 5월 인천 인현동 자택에서 안갑성(오른쪽)이 형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안갑성 제공

1981년생 바리톤 안갑성은 인천 중구 인현동에서 나고 자랐다. 해운업에 종사한 아버지와 은행원 출신 어머니의 막내 아들이다. 함께 성악을 전공한 세 살 터울 형이 있다. 아버지는 인천 토박이다. 할머니는 동인천역 앞에서 ‘평화제과’라는 제과점을 운영했다. 안갑성은 1987년 인현동에 있던 인천축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동인천 키즈’다. 안갑성이 축현초에 다닐 때는 ‘동인천 전성시대’가 아직 저물지 않았을 때다.

“저희 집이 지금 학생교육문화회관(축현초) 바로 뒷길에 있었어요.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성여고, 대건고, 광성고는 물론 중학교도 엄청 많아서 그 학생들이 전부 동인천에 모였거든요. 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니는 형, 누나들한테 최신 유행은 다 접했어요. 음반 파는 레코드 가게에선 최신곡이 끊임없이 나오고 인천백화점(현 동인천역사), 떡볶이집, 탁구장, 팬시아트점…. 없는 게 없는 동네였죠. 워낙 번화가라 서구, 남구(현 미추홀구)로 넘어가려면 동인천에서 버스를 타야 했어요.”

옛 인천백화점.
옛 인천백화점.

부모님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노래의 매력에 먼저 빠진 건 현재 서울아산병원 발성치료사로 널리 알려진 형 안대성씨다. 안갑성도 교회 성가대에 늘 참여하며 노래를 부르다 1996년 광성고등학교로 진학해 학교 중창단 ‘아가페’ 활동을 시작했다.

“저는 아가페 18기 보조와 19기 출신입니다. 원래 2학년부터 활동할 수 있는데, 저는 특별히 1학년부터 선배 기수인 18기 보조로 들어가면서 2년을 활동한 셈이죠. 단국대 성악과에 있는 선배나 경희대 성악과로 진학한 선배가 주말이면 학교로 찾아와 노래를 가르쳤어요.”

안갑성은 고3 때부터 성악 레슨을 받으며 음대 진학을 준비했다. 동인천 대한서림에서 구한 이탈리아어 사전을 펴 보며, 서울 압구정동 신나라레코드에서 산 클래식 음반 표지나 명동 대한음악사에서 산 악보를 드문드문 읽었다.

인천에서 음대를 다니고 싶었는데, 인천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음대가 없다. 1993년 개교한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에 99학번으로 합격했다. 한예종에 입학할 때 안갑성의 음역대는 베이스였다.

“쟁쟁한 예술고등학교 출신 동기들이 모였죠. 제가 입학할 때만 해도 인천예술고등학교(1998년 개교)는 졸업생을 배출하기 전이었습니다. 저만 빼고 성악과 동기 20여 명이 거의 예술고 출신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한예종에 입학해 오페라 클래스에서 오페라를 거의 처음 접했는데, 동기들은 이미 예술고에서 독일어, 이탈리아어 아리아까지 다 떼고 온 거지 뭡니까.”

‘정신무장’ 해병대… 백령도 교회서 노래

베를린 유학, 리릭 바리톤으로 새출발

국립오페라단 50주년 ‘박쥐’ 국내 첫 무대

수업 시간마다 주눅이 들었다. 자신감을 잃은 안갑성은 스스로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게 해병대 입대다. 1학년 1학기를 마친 안갑성은 그해 8월 해병대에 입대해, 6여단이 있는 백령도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해전’이 발발한 직후였다. 한국전쟁 이후 서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간 첫 교전이었다.

군의 병력 증강 계획으로 안갑성을 비롯한 많은 해병대 동기가 서해 5도에 배치됐다고 한다.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지금은 사라진 백령도·대청도행 여객선 데모크라시호(396t)를 타고 부대를 오갔다.

“작전장교님이 성악 전공하는 저를 좋게 봐서 백령도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게 해줬어요. 고참이 되고 나선 이탈리아 가곡집을 틈틈이 읽으면서 음악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군 생활 때 가장 좋았던 건 휴가 때 연안부두에 내려서 28번 버스를 타고 저희 집(동구 화수동)에 금방 갈 수 있었던 겁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동료 장병들은 연안부두에서도 집이 천리길인데 말이죠.”

2년2개월간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복학했으나, 외환위기(IMF 사태) 여파로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학업에만 매진할 수 없었다. 방학 때면 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남동국가산업단지의 중견 제조기업 ‘한성정공’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 1985년 설립된 한성정공은 산업기계·공작기계용 윤활급유 펌프와 냉각용 절삭유 펌프 등을 주로 생산한다. 한성정공 김창선 대표가 안갑성과 형에게 도움을 준 교회 장로다.

“저는 오일 펌프를 만드는 공정에서 일했고, 형은 기판을 짰습니다. 공장에선 내내 라디오 방송을 틀었는데, 그때 라디오를 실컷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유학 후 만든 클래식 인디밴드 이름이 ‘이지라디오’입니다. 한성정공 다닐 때 라디오를 들은 기억이 참 좋았는데, 그렇게 편하게 듣는 음악을 지향한 팀입니다.”

한예종 음악원 캠퍼스가 있는 서울 예술의전당은 클래식 공연이 있을 때마다 외부 전광판으로 공연 실황을 동시 중계했다. 수업을 마친 안갑성은 예술의전당 전광판 앞에 서서 세계 유수의 클래식 음악가들의 공연을 바라봤다. ‘저 음악가는 저렇게 제스처를 하는구나.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와 저런 식으로 인사를 나눠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국 사람들에게 내 노래가 어떻게 들릴까’라는 물음과 함께 세계 무대에 서는 꿈을 꿨다.

2007년 독일 베를린행을 택했다. 옛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 입학했다. 독일에서 자기 소리를 찾았다. 베이스였던 안갑성은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 교수의 권유로 현재 음역대인 바리톤, 정확하게는 독일에만 있는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격인 ‘리릭 바리톤’(서정적 바리톤)으로 새출발했다.

“베를린은 날씨가 요상해서 아침 8시에 해가 뜨면 오후 3시에 해가 집니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란 가곡은 ‘드디어 아름다운 5월이 왔어’란 가사로 시작됩니다. 독일에 가보니 알겠더군요. 5월이 되면 해가 새벽 6시에 뜨고 늦게 집니다. ‘5월이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라서 슈만이 노래를 지었구나’ 하고, 저도 느꼈습니다.”

유학 시절 콩쿠르 출전은 단순히 입상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콩쿠르 입상 상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고학생(苦學生)의 콩쿠르 출전기도 생생하다.

“초반에는 굉장히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출전 곡이 저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어요. 콩쿠르에 출전하려면 두 달 치 집세를 걸어야 합니다. 스위스나 스페인까지 항공료에 식비, 숙박비는 물론 가기 전에 레슨도 받아야죠. 그렇게 준비했어도 처음에는 콩쿠르에서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독일에서 임링(Immling)이라는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1위로 입상했고, 이후 승승장구합니다.”

국내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만들어진 건 안갑성이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성악과 최고 연주자 과정을 ‘최고 점수’로 졸업하고, 현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2012년이다. 안갑성은 한국 국립오페라단 관계자들이 국내 공연 캐스팅을 위해 베를린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훗날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을 지내시는 윤호근 지휘자가 어느 날 국립오페라단이 베를린에 들어왔다는 걸 알려줬어요. 그분들이 다니는 공연장이고 카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쫓아다녔어요.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겼는지, 관계자 한 분이 ‘내일 아침 빈으로 출국하니 그전까지 활동 자료를 DVD에 담아 호텔로 가져오라’고 했죠. 이후 국립오페라단에서 저를 오페레타 ‘박쥐’의 주인공으로 초대했습니다.”

‘이지라디오’ 결성… 현대음악과 접점

뮤지컬 투어하며 아내 김민주 배우 만나

인천서 ‘뮤지컬 위드 미’ 일반인 강좌

“인천에 음악대학 한곳도 없어 아쉬워”

안갑성은 2012년 12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국립오페라단 창단 50주년 오페라 갈라 콘서트’에서 오페레타 ‘박쥐’의 아이젠슈타인 역할을 맡아 국내 데뷔 무대를 치렀다. 본격적인 국내 활동의 서막이었다. 이듬해 2월에는 국내에선 생소했던 클래식 인디밴드 ‘이지라디오’를 결성해 대중적으로 고전과 현대 음악의 접점을 찾는 시도를 했다.

2013년 6월 ‘제7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딤프·DIMF)에서 공연된 뮤지컬 ‘소프 오페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뮤지컬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안갑성의 장기인 오페레타는 미국에서 뮤지컬이란 장르로 재탄생된다. 그의 음악 인생 변곡점이기도 하다.

뮤지컬 ‘쌍화별곡’ 공연 모습. 남자 주인공 안갑성(오른쪽)과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여자 주인공 김민주(왼쪽) 배우. /안갑성 제공
뮤지컬 ‘쌍화별곡’ 공연 모습. 남자 주인공 안갑성(오른쪽)과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여자 주인공 김민주(왼쪽) 배우. /안갑성 제공

뮤지컬 차기작은 중국으로 무대를 옮긴다. 안갑성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쌍화별곡’(이란영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의 남자 주인공 원효로 캐스팅됐는데, 이 공연으로 2013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베이징과 광저우를 비롯한 중국 4개 도시 투어를 진행했다. 여자 주인공 요석공주는 안갑성의 아내인 뮤지컬 배우 김민주였다.

성악가와 뮤지컬 배우 커플은 2015년 결혼에 골인한다. 2020년 복덩이 아들도 태어났다. 부부가 함께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안갑성은 2022년 ‘오픈헤르츠 아트컴퍼니’란 회사를 설립해 김민주 배우와 함께 뮤지컬 갈라 콘서트 중심으로 클래식, 재즈 등 각종 공연을 꾸려 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안갑성은 고향 인천에서 김민주 배우와 함께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문학시어터가 지난해 처음 추진한 시민 참여 뮤지컬 교육·공연 프로젝트 ‘뮤지컬 위드 미’(MUSICAL with ME)의 책임 강사로서 평범한 시민을 뮤지컬 배우로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해 6월 말 ‘뮤지컬 위드 미’ 1기 참가자들이 2개월 동안 프로그램에 참여해 최종 공연을 선보였고, 내달 중순부터 2기 참가자들을 만난다.

“학생부터 평범한 주부나 한때 배우의 꿈을 꿨던 분, 은퇴하신 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평범한 시민들이 각자의 사연과 열정을 갖고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립니다. 오히려 제가 그분들의 열정을 배웁니다. 내 고향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저에겐 큰 기쁨입니다.”

안갑성의 고향에 대한 애정은 아내가 더 잘 안다. 김민주 배우는 “연애할 때부터 동인천이나 신포시장에서 데이트하면서 ‘이게 공갈빵이야’ ‘여기가 유명한 경양식집이야’라고 하면서 엄청 자랑하곤 했다”며 “남편은 본인이 ‘독일 사람 같다’고 하지만, 제가 볼 땐 뼛속까지 인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안갑성은 지금도 속상한 일이 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땐 동인천을 찾는다. 그곳엔 추억을 되새길 흔적들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안갑성은 인천을 조금 더 곁에 두고 싶다. 자신의 활발한 성격을 디딤돌 삼아 인천 출신 성악가 선후배들을 연결하는 활동도 하고 싶다고 한다. 인천에 음악대학이 없는 것도 여전히 아쉽다. 국내 최고 수준의 예술대학, 유럽의 선진적 무대를 모두 경험하고도, 안갑성은 돌고 돌아 결국 인천이라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