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80]세계유산 구리 동구릉과 태조의 건원릉 지면기사
공민왕릉 영향… 곡장·석물 변화봉분등 후대왕들과 차이 '과도기'건립당시 원형 잘 간직한 신도비미술사적·학술적인 가치 뛰어나세계유산 조선 왕릉 40기 중에서 31기가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9기는 구리 동구릉 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동구릉은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5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현릉(顯陵), 14대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인 목릉(穆陵), 21대 영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인 원릉(元陵) 등을 포함한 능 9기가 있고, 그곳에는 17위(位)의 왕과 후비가 영면하고 있다. 이렇듯 동구릉에는 조선 전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왕릉들이 있어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왕릉의 규범이 된 건원릉이 있어 명실상부 조선 왕릉의 대표격이다. 건원릉의 조영을 담당한 사람은 박자청인데, 그는 공민왕릉과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만들었던 김사행의 제자였다. 이런 사실은 건원릉이 고려 왕릉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공민왕릉의 양식을 본받아 축조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 한편 왕릉의 예법과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1474년(성종 5)에 완성된 사실을 감안하면, 건원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에서 조선왕릉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처럼 건원릉은 고려 왕릉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더해졌다. 구체적으로 건원릉은 병풍석의 무늬나 문인석·무인석 등의 양식에서 고려 공민왕릉의 영향이 보이지만, 봉분 주위로 곡장을 새롭게 돌린 점, 석호와 석양의 배치에 변화를 준 점, 장명등 등 석물의 양식과 문양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점 등이다. 한편 건원릉은 이후 다른 왕릉과 비교할 때, 혼유석의 고석(鼓石)이 5개인 점, 석양과 석호가 다른 왕릉과 달리 배와 다리 사이가 메워져 있지 않는 점, 건원릉 정자각 위 오른쪽에는 다른 능과 달리 배위가 자리하고 있는 점, 신도비가 세워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9]시흥 능곡동 신석기 마을유적과 빗살무늬토기 지면기사
경기문화재연구원, 2007년 발굴서울 암사동 뒤잇는 '중기' 추정토기 7점 예술적·기술적 큰의미공원조성후 방치·상주인력 필요10년 전인 2007년까지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은 서울 암사동 유적이었다. 그런데 이 암사동유적은 마을 전체가 발굴된 것도 아니었고, 시기도 기원전 4,000~3,5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 전기에 국한되어,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석기문화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암사동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1970년대 초반 이후 최근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이런 학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경기도의 신석기문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 유적이 오늘 소개할 시흥 능곡동 유적이다. 이 유적은 2007년 시흥시 능곡동 일원에 택지개발사업지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경기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한 것으로, 과거 해안선에 인접했던 해발 30m의 작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유구로는 말각방형의 주거지 24기가 정형성을 보이면서 확인되었고,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망치돌, 갈돌, 갈판, 화살촉, 굴지구 등과 같은 석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유적의 연대는 집자리 규모와 형태, 토기의 형식 등에 의거하여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600~2,500년)로 추정되었다.이 유적의 발굴로 신석기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게 되면 취락의 입지가 하천변의 충적대지에서 해안가의 구릉 지대로 옮겨간 사실, 당시 마을의 구조는 중앙의 공터를 중심으로 20~30호의 가옥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던 사실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출토유물 중에 어망추와 낚시 같은 어로도구가 전혀 출토되지 않은 반면에, 갈돌과 갈판 그리고 땅을 파기 위한 굴지구(掘地具)가 출토되어 농경이 생업경제였고 어로는 보조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유물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형태 복원이 가능한 7점의 빗살무늬토기였다. 몸통 전체에 단일의 문양만을 넣은 동일계 문양과 함께, 입술·몸통·바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문양을 넣은 구분계 문양도 함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8]안양 석수동 마애종과 김중업박물관 지면기사
고려전기 범종연구 학술적 가치스님도 새겨… 국내 유일 마애종공장터에서 '안양사지'도 발굴돼김중업 작품건물 '박물관화' 독특우리나라 지정문화재 가운데 불교문화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를 넘는다. 이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것도 있지만, 일반인이 볼 때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석탑의 경우 특별한 양식을 갖춘 것을 제외하고는 그저 그런 것들이 흔하다. 경기도 지정문화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명분론을 빼고는 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다소 미흡한 것들도 있다.그에 비해 국가문화재로 승격해도 손색이 없는 것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안양 석수동 마애종(安養 石水洞 磨崖鐘)'이다. 안양예술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넓적한 바위에 종과 종각, 그리고 종치는 스님을 새겼다. 구체적으로 종은 사각형의 목조 결구에 쇠사슬로 매달아져 있으며, 윗부분에는 용의 몸체와 머리를 형상화한 용뉴와 중국종에는 없는 음향조절 기능의 음통(音筒)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몸통에는 사방구천(四方九天,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유곽과 종유, 연화문 당좌, 종 아래 부분의 하대(下帶) 등이 치밀하게 새겨져 있다. 한편, 종각의 기둥 위에는 화반(花盤)과 구름무늬를 중앙과 좌우에 새겨 단조로움을 피했다.이 마애종의 압권은 종매(타종 막대)를 잡고 종을 치려는 스님의 모습이 있는 점이다. 발까지 내려온 법의와 오른쪽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종각 속의 종과 일체가 되어 생동감을 더한다. 이 마애종은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스님의 조각으로 당대 법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종매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특별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이 유적은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 그만큼 희소성이 빼어나다. 또 종의 세부 표현이 치밀하여 고려시대 범종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기에 정감이 간다.해질 무렵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7]오산 수청동 유적, 우리나라 최대 백제고분군 지면기사
'매홀 = 수원' 정설 뒤흔드는 발굴한성백제시대 무덤 500여기 분포출토 유물중 1500여점 국가 귀속오산시 박물관 추진 반가운 행보백제시대 경기도 서남부 지역, 특히 수원·화성·평택·안산 등지의 행정 거점은 어디였을까? 또 삼국 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까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매홀(買忽)'은 과연 어디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대부분의 백과사전류에서는 지금의 수원을 '매홀'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설은 오산 수청동 유적(烏山 水淸洞 遺蹟)이 발굴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오산 수청동 유적은 세교신도시를 개발하면서 발굴된 유적으로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지난 2005년 11월에 착수하여 2008년 12월에 완료했다. 발굴 결과 한성백제시대의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지하에 움을 파서 무덤칸을 만들고 무덤 주변에 도랑을 돌린 토광묘의 한 형식)가 330여 기 확인되었는데, 이미 파괴된 무덤과 공원지역으로 지정돼 조사가 이뤄진 무덤들을 합해 총 500여 기의 무덤이 약 9만9천㎡의 범위 내에 밀집 분포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아 국가에 귀속된 것만 해도 1천567점이었는데,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또 167기의 무덤에서 총 7만 6천여 점의 구슬이 출토돼 "마한 사람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았는데 옥구슬로 옷을 치장 하거나 목걸이와 귀걸이를 사용했으며, 금·은·비단은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고 기술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입증해 줬다. 이외에도 경기지역의 백제 무덤에서는 아주 드물게 출토되는 갑옷과 마구가 함께 출토됐으며, 백제의 무기 체제를 밝힐 수 있는 대도, 철모, 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다량으로 수습됐다. 특히, 중국 동진(東晋)에서 제작된 청자반구호와 금동제 화살통이 발견돼 이 수청동 유적의 정치적 위상을 가늠케 해줬다.오산 수청동 유적은 우리나라 최대의 백제고분군이다. 또 그 조성기간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6]명승 제10호 삼각산과 북한산성 지면기사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개의 뿔'국립공원 지정 후 북한산으로 불려개국의 영산 빼어난 자연경관 간직북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 당위성북한산성이 자리한 삼각산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명승 제10호인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지정 명칭은 '삼각산', 분류는 자연유산 중 자연명승, 지정구역은 27만4천143㎡이고 지정일은 2003년 10월 31일이다.삼각산은 빼어난 산세를 지니고 있고 지리적으로는 한양 도성의 진산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국가제사의 대상이었다. 또한 삼각산은 한북정맥의 마지막 정점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풍수적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도선, 신경준, 김정호 등 역대 걸출한 역사지리학자들에 의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당으로 손꼽혔다.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제사를 지낸 후 진흥왕순수비를 세운 곳도 이 삼각산이다. 아울러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왕사 무학대사가 만경봉에 올라 나라를 다스릴 도읍터를 정했다는 속설도 있다. 어쨌든 삼각산이 '개국의 영산'임은 분명하며, 삼각산의 등정은 중원을 장악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현재 명승 삼각산의 지정 구역은 백운대·인수봉·만경대만을 포함하지만, 원래 삼각산은 현재 북한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 더 나아가서는 북한산국립공원 지구 중에서 도봉산 지구를 제외한 우이령 남쪽의 산괴를 말한다.이 북한산성이 자리한 곳을 지금은 북한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바라볼 때 백운대·만경대·인수봉이 세 개의 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산성을 가리킬 때에는 북한산으로, 명산대천의 하나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될 때에는 삼각산이라 했다. 또 자연자원이 중심 주제일 때에는 삼각산으로, 인문자원을 서술할 때에는 북한산 혹은 북산(北山)이라 말했다.이렇듯 원래 삼각산이었으나 북한산성의 축조 이후부터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5]안성 양성향교·덕봉서원·정무공 오정방고택 지면기사
조선시대 유교이념 전파 중심도시화 진행 안돼 '원형' 간직한적한 전원 풍경 '힐링 답사'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인의예지로 대표되는 유교 이념을 백성에게 교화, 전파하고자 공립교육기관인 향교를 '1읍 1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배치하였다. 한편 조선의 정치 운영은 향촌사회에 기반을 둔 여러 붕당(朋黨)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들 붕당은 서원을 매개로 한 학연과 지연에 기초했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읍치(邑治)가 있던 곳에는 대부분 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명현을 배출한 지역에는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로 향교는 공립기관인 까닭에 지금의 시·군·읍·면 소재지에 주로 위치하며, 서원은 향촌을 기반으로 한 사립기관인 까닭에 비교적 경관이 빼어난 한적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의 제사를 지내면서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는 곳이고, 서원은 선현을 봉사(奉祀)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맞게 서원과 향교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중심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나즈막한 야산의 경사면을 따라 전면의 낮은 곳에 명륜당이, 배후의 높은 곳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가 기본적인 배치였다.건축사적으로 볼 때, 명륜당은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이 일반적이고, 대성전은 정면 3칸의 맛배지붕이 기본인데 죽은자가 머무는 곳이기에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을 창호가 없이 벽체로 조성한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향교의 경우 제향공간 내에 서원에는 없는 동무와 서무가 대성전의 좌우에 배치되어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향교와 서원에는 어김없이 은행나무가 있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경기도는 명유현사(名儒賢士)와 고관대작이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한 조선유학의 중심지였고 그런 이유로 서원과 향교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향교와 서원들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그리고 최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하여 제자리를 벗어나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4]맹사성의 묘 지면기사
강남·분당과 가까운 광주에 위치고위관료에 엄격 청렴한 성품 탓벼슬자리 절반이상이 좌천·유배무덤도 소박 고관대작 석물 없어이 어수선한 시국과 일그러진 권력자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적 인물이 죽으면 그의 생애와 치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글 즉 졸기(卒記)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맹사성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이 79세로 죽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방으로 모시고 윗자리에 앉혔다.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배웅하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이처럼 아랫사람에게까지 관대한 그였지만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고위관료에게는 엄격했다. 그는 조선의 군왕 중에서 가장 무자비했던 태종 치하에서 26년 4개월간 벼슬자리를 하였는데, 그 절반인 13년 2개월 동안 좌천·파직·유배를 당하였다. 태종의 처남인 민공생을 공격하다가 공주목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후, 세종이 한번 보자고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무고로 처리되자 그 잘못을 끝까지 지적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에 처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성석린·하륜 등 태종 측근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100대의 곤장을 맞고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청백리였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청빈을 잘 대변해 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안 곳곳에 물이 새서 의관이 모두 젖게 되었다. 병조판서가 집에 돌아와 "정승의 집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3]오성과 한음 이야기와 용연서원 지면기사
전래되는 이야기 23건중 7건 배경'한음' 학문수양 '오성' 고이잠든곳 道문화재돌봄단, 미화·보수관리 시민관심 부족 답사프로그램 제안오성과 한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그러던 중 오성이 약혼을 하였다. 옛날 양반들은 약혼하고도 부인될 사람을 못 만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성도 약혼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하루는 한음이 오성에게 말하기를 "네 부인될 사람에게 말을 시키면 내가 한턱을 내고, 말을 못 시키면 네가 한턱을 내라"고 해서, 오성이 "그러마" 하고 둘은 내기를 했다. 오성은 "그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작대기를 들고 날 때려죽인다고 쫓아만 오너라" 하니, 한음이 작대기를 들고 "이놈, 때려죽인다"고 쫓아갔다. 오성은 계속 쫓기다가 자기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대청 마루에 서 있던 자기 약혼녀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부인 나 좀 살려주쇼!" 하니, 약혼녀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약혼을 했으면 겉만 봐야지 속까지 볼랍니까?"라고 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오성은 한음과의 내기에서 이겼다고 한다.어릴 적 동화책으로 읽었던 오성과 한음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이들 모두 포천에 연고가 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그의 외가가 포천 자작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왕래했고 포천을 대표하는 인물인 양사언과 교유했다. 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인 용연서원(龍淵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포천에 자리하고 있다. 오성(鰲城)으로 더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한음보다 포천과 더 인연이 깊은데,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포천에 정착하여 살았고, 그의 무덤(경기도 기념물 제24호)과 배향서원인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이 현재 포천에 있다. 이외에도 경기지역에 전해지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 23건 중에서 7건이 포천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실도 그들이 포천과 인연이 깊다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오성과 한음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을 극복하는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2]포천 인평대군 묘와 신도비, 그리고 치제문비 지면기사
기와얹은 곡장 전형적 사대부 무덤경기도 신도비중 으뜸가는 조형미치제문비는 조선후기 문화 잘반영원형보존도 잘돼 '사적' 승격 필요2016년 현재, 경기도기념물은 전체 183건 중에서 무덤이 91건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 전국 신도비의 70% 정도는 경기도에 분포하고 있다. 이렇듯 경기도는 조선시대 묘제의 중심지이고, 고관대작의 묘는 경기도에 더욱 밀집해 있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 고위관료들이 현실적인 여건상 주로 경기 지역에 그들의 터전을 정한 데에 있다고 판단된다.문화재 지정은 크게 역사성, 희소성, 예술성, 학술적 가치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런 기준으로, 경기도에서 지정한 묘와 신도비를 평가해 볼 때, 인조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묘와 신도비(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 치제문비(致祭文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인평대군 묘는 기와를 얹은 곡장(曲墻)으로 둘러싸여 있다.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와 합장된 단분(單墳)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 동자석·망주석·문인석 한 쌍씩 배치하였다. 묘역 뒤 오른쪽에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오른쪽 아래에 판석을 깔았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의 일반적인 규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건립한 것으로,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웅장·화려하여 경기도 소재 신도비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치제문비는 효종·숙종·영조·정조가 제문을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 비문으로 모두 2기인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네 분 임금의 글과 글씨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이런 인평대군 묘역의 문화재를 문화재 지정 기준에 따라 가치를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술성: 인평대군은 효종이 매우 아끼던 동생이다. 그런 그가 효종의 재위 기간에 돌아갔으니 효종이 인평대군의 묘와 신도비의 조성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
-
[경기 문화유산을 찾아서·71]경기소리 긴잡가 보유자 임정란 명창 지면기사
12개 노래로 구성된 민속 성악곡이창배 사사·묵계월 선생 뒤이어1999년 도무형문화재 지정·활동대중화 위해 경기창극단 설립 꿈예로부터 경기지방에서 부르던 노래들을 일컬어 경기소리라 한다. 이 경기소리 중에서 민중들이 애창하던 노래를 경기민요, 전문소리꾼이 불렀던 것을 경기잡가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잡가(雜歌)란, 가곡·가사와 같은 긴 사설에 노랫가락을 실어 부르는 민속적인 성악곡을 말한다. 이런 잡가는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유입된 신파음악과 트로트가 들어오기 이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그들의 감정을 표현한 대중음악이었던 바, 가사의 내용도 다양하고 표현도 직설적이며 발성도 굵고 힘찬 편이다. 잡가는 지역을 기준으로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기잡가로 나뉘고, 성격에 따라 12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긴잡가와 휘몰이잡가로 구분된다. 이중 긴잡가는 경기 12잡가로도 불리며,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경기좌창(京畿坐唱)이라 일컫기도 한다. 음악적으로 볼 때, 경기잡가는 맑고 청아하며 아주 담백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6박 장단의 반복으로 경쾌하고 힘찬 기운이 있다. 그리고 목을 잔잔히 떨면서 부르는 것이 특징이고, 누르는 목·끊는 목·조이는 목을 적재적소에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에 뛰어난 기량을 갖추어야만 노래의 참맛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경기 12잡가의 전통과 예술혼을 잇고 있는 명창이 오늘 소개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긴잡가 보유자 임정란(본명 임정자, 1943년생)이다. 과천의 '광대집안'에서 태어나, 1964년 우리나라 잡가의 정통맥을 이은 이창배 명창에게서 사사받으면서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1975년부터 경기민요(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의 보유자인 묵계월 선생의 지도를 받아 그의 첫 전수장학생이 되었으며 이수자, 전수조교를 거쳐 1990년에 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 경기도립국악단 악장이 되어 고향인 경기도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경기도 땅에 전승·보급하는 일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