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대견 사양, 우리도 주권자”… 정치 주체로 응원봉 드는 10대
생애 첫 참여 폭력적인 일 생길까봐 걱정
또래 친구들 즐거운 활동 모습 보고 용기
전국 중고교생 인터넷에 시국선언 발표
선거권은 제한받는 ‘유예된 시민’이지만
사회현안 등 참여하고픈 열망 작지 않아
학교안 정치 의사표현 등 제도 마련 목청

비상계엄 선포부터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까지 전국은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로 들썩였다.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였지만 단연 눈에 띄는 이들은 아이돌 응원봉을 손에 쥐고 K팝을 따라 부르는 청소년들이었다.
■ 응원봉을 들고 K팝을 불렀다, 잘 살고 싶어서
탄핵집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청소년들은 새로운 집회문화를 선도했다. 비폭력 저항과 평화를 상징하는 ‘촛불’ 사이에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등장했다. 오색 빛의 물결을 만들어낸 응원봉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응원하는 야구팀의 배트, 집에서 사용하던 무드등 등을 들고 자신의 개성을 표출했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온몸에 알전구를 두른 이도 있었다.
축제 같은 분위기의 집회였지만 광장에 나서는 청소년의 마음은 마냥 가볍지 않았다. 지난 9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 만난 김태희(16)양은 학교 친구들과 집회에 참여했다. 김양은 “생애 첫 집회 참여인데, 뉴스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혹시 폭력적인 일이 생길까 걱정했다”며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또래 세대인 청소년들이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여자 아이돌 ‘여자친구’와 ‘비비지’의 응원봉을 양손에 든 이효림(18)양은 “계엄령 선포 이전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서 의결한 안건에 자주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며 “대통령이 국민이 뽑은 입법기관뿐만 아니라 국민까지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광장에 나왔다”고 했다.
청소년들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인천여고, 인천성리중, 한국애니고 등 전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인스타그램, 교내 네이버 카페 등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게시했다. ‘탄핵이 DAVIDA(답이다)’라고 적힌 이미지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거나 상태 메시지에 촛불 이모티콘을 적기도 했다.

■ 살기 좋은 세상 함께 만드는 동료
최근 열리는 탄핵 촉구 집회에선 평등한 광장을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이 빛났다. 집회 주최단체는 ‘청소년에게 반말하거나 기특하다, 대견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등 연령,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 인종 등을 이유로 상대방을 구분 짓거나 차별하는 발언을 하지 말라고 공지했다.
18일 인천 부평구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촉구하며 열린 집회에서 만난 박가원(17)양은 “어른들에게 기특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라고 했다. 박양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청소년들이 이제 정치적 목소리를 낸 것으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기특하다, 대견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며 “청소년들은 정치적 주체로 항상 사회의 이슈에 관심을 가져왔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시민”이라고 했다.
청소년들은 선거권을 제한받는 ‘유예된 시민’의 자리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현안 등에 대해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은 작지 않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은 ‘미숙한’,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은 가정이나 학교 등 청소년들이 소속된 공동체가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참여를 제한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서울 은평구에 있는 예일여자고등학교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학생을 교칙 위반으로 징계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은 교사가 시국선언문을 교내에 게시하지 못하게 하거나 시국선언문을 올렸다가 학교장과 면담을 한 경우, 선언문의 내용을 수정하라고 한 경우 등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한 사례를 다수 제보받았다고 했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빈둥 활동가는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거나 교내에 정치적인 내용이 담긴 글을 부착할 경우 벌점을 부여하는 학칙이 있는 학교가 많다”며 “공부하느라, 부모님이 반대해서 광장에 나서지 못한 청소년들이 대안책을 찾다가 SNS에 시국선언문을 게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마저도 학교에서 막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광장의 주인공에서 정치적 주체로
탄핵 국면에서 드러난 청소년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닌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민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청소년들은 1979년 전두환 정권의 계엄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집회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른 세대처럼 계엄령 선포를 반대하고,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 표현에 나섰다.
최용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청소년들은 계엄과 탄핵을 미디어나 교과서 등에서 간접적으로 접한 세대이지만 다른 세대만큼 신속하게 광장으로 나갔다”며 “이는 청소년에게도 정치적 사안에 대해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정치적 주체로 자리매김한 청소년들은 그들이 자유롭게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2017년 인권 단체들이 모여 출범한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은 17일 성명을 내고 “이번 탄핵 집회에서 청소년들은 광장의 주체로 당당하게 참여했다”며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집회에 참여하고 학교 안에서도 정치에 대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학생인권법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해온 활동가는 “‘너희까지 나서게 해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며 청소년을 수동적이고 보호해 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성인들이 있다”며 “청소년들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주체로 봐주길 바란다”고 했다.

/정선아·송윤지기자 s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