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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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5)지휘자①]점점 복잡해진 오케스트라… '두 손 자유로운' 리더 요구 지면기사
초기엔 작곡가·연주자가 맡아오늘날 작품해석까지 전문화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지휘는 중세 시기의 손짓으로 멜로디 라인, 리듬, 빠르기 등을 지시하며 합창을 이끌었던 카이로노미(chironomy)에서 발전했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좀 더 굴곡 있는 음조와 옥타브 내에서의 많은 변화가 생기며, 그 효율성을 잃지 않기 위해 카이로노미의 지시 방법은 확장되어야 했다. 17~18세기의 초기 기악 앙상블에선 건반 악기(쳄발로 혹은 오르간)를 비롯해 악장이 지휘를 겸했다. 특히 바흐와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은 작곡과 건반 악기(지휘)를 비롯해 모든 악기에 정통한 음악가였다. 때문에, 자신의 작품은 자신이 연주(지휘)하는 게 정석이었다.네 사람에 이어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 오케스트라는 발 빠른 변화를 겪었다. 관악기의 성능이 향상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욱 큰 규모의 현악 파트가 필요해졌다. 앙상블의 규모가 커지면서 음악도 복잡해졌다. 또한, 과거에는 귀족들만의 오락이었던 음악을 중산층이 즐기기 시작했다. 더 많은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주 홀에서 공연이 펼쳐진 것이다.위대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베토벤은 지휘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어느 날 베토벤은 공연장에서 피아니스트가 지휘를 겸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보다가 크게 실망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한다. 베토벤이 무대에 올라 오케스트라 앞에서 연주를 이끌자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파트에 집중했으며, 그제서야 연주가 조화를 이뤘다. 두 손 모두를 사용해 연주하는 건반 연주자는 잠깐씩 한 손이 쉴 때에만 박자를 잡아줄 수 있었는데, 곡의 편성이 복잡해지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된 거였다.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늘어난 현악 주자들을 관리하기에 바빴다. 결국, 오케스트라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리더를 필요로 하게 됐고, 전문 지휘자가 등장했다. 이후 지휘자의 역할은 더욱 전문화하면서 작품의 해석까지 맡게 됐다.연주회장이나 무수한 음반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지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음악적 의지를 조화롭게 다루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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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4)터키 음악]평화무드 타고 '오스만 군악' 유럽으로 지면기사
모차르트·베토벤 '행진곡' 영향큰북·심벌즈·트라이앵글 등 채용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터키 음악' 하면 떠올릴 만한 곡이 있다. '터키 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친숙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K 331'이다. 이 곡이 '터키 행진곡'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3악장에 알라 투르카(Alla Turca·터키 풍으로)로 연주하라는 지시어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베토벤의 극 부수 음악 '아테네의 폐허, Op 113' 가운데 네 번째 곡 '터키 행진곡'도 잘 알려져 있으며, '군대 교향곡'으로 불리는 하이든의 '교향곡 100번'의 2·4악장에도 역시 '터키풍'의 리듬이 쓰였다.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공통분모는 고전주의를 풍미한 작곡가들로, 제1 빈 악파로 묶인다. 18세기 중·후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세 작곡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터키풍'에는 시대상이 반영됐다.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1299~1922)은 16세기 술레이만 1세 때 가장 번성했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했다. 이러한 대 제국의 건설에는 군대의 용맹성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전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 굳건하고 당당한 군악(軍樂)이 한 몫 했을 터였다.큰북과 심벌즈, 트라이앵글 등이 곁들어진 당당하면서도 흥겨운 리듬에 기반을 둔 오스만 제국의 군악은 인근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대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연합군에 막혀 빈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퇴했다. 당시 남기고 간 군악대의 악기들이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18세기 들어서 세력이 약해진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들과 전쟁 대신 교류를 택했다. 이때 군악대는 평화의 사절 역할을 했다. 18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군악대는 폴란드에 선물로 보내지고, 이어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에도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의 악기인 큰북과 심벌즈, 트라이앵글이 유럽 군악대에 채용됐다. 또한, 이슬람 제국의 악기였던 팀파니 등의 타악기도 수출돼 발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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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3)베토벤이 존경한 작곡가]케루비니 '구출 오페라' 영향받은 베토벤 지면기사
그의 의견 경청 '피델리오' 밑거름레퀴엠을 썼다면 롤모델 삼았을것르네상스 시기 이후 서양 음악은 이탈리아와 나머지 나라로 양분돼 발전해 왔다. 이탈리아는 나머지 나라들의 극복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260년 전 이맘때(9월 14일) 태어난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 또한 프랑스를 주 무대로 활동한 이탈리아 작곡가였다. 케루비니는 26세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0년 넘게 파리음악원 교수와 원장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0년 후배 베토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케루비니의 오페라 '로도이스카'(1791년 초연)는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구출하는 줄거리를 갖는 '구출 오페라'의 효시 격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쫓기는 자의 심정에 강한 동정을 표했고, 불의에 쫓기는 정의로운 사람의 탈출을 돕는 영웅의 등장을 갈망했다. 이 같은 시대상이 구출 오페라를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었다. 1800년에 초연돼 극찬을 받은 '2일간'은 케루비니의 구출 오페라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이자 역시 구출 오페라인 '피델리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805년 베토벤의 오페라 '레오노라'가 초연됐다. 케루비니도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을 보고 난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고 한다. 케루비니의 위상을 높이 산 베토벤은 케루비니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후일 이 곡을 개작해 '피델리오'로 재연했다. '피델리오'는 현재까지 상연되는 걸작 오페라 중 하나다.케루비니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레퀴엠 c단조'는 1816년 1월 루이 16세의 추모 미사 때 초연됐다. 케루비니가 루이 18세 아래서 왕의 음악 담당자이자, 궁정 교회의 음악 총책임자로 활동하던 때였다. 그로 인해 케루비니는 교회음악의 작곡에 노력을 쏟았는데, 그 산물 중 하나가 c단조 레퀴엠이다.베토벤은 레퀴엠을 작곡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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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2)]노르웨이]조국의 자연 사랑한 그리그, 작품에 투영 지면기사
당시 주류 독일음악서 탈피 시도입센 만나면서 '페르귄트' 등 빛봐유난히 길었던 올여름 장마와 어우러진 국지성 폭우에 우리 기상청의 날씨 예보가 엇나가면서 해외 기상예보 사이트를 찾는, 이른바 '기상 망명족'이 늘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노르웨이 기상청으로, 국내 포털 검색 사이트의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노르웨이 기상청은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접속이 늘자 한국어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기에, 노르웨이와 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서양음악사에서 노르웨이는 에드바르 하게루프 그리그(1843~1907)만으로 각별한 위치를 점한다. 노르웨이의 문학과 미술을 각각 대표하는 헨리크 입센과 에드바르 뭉크는 그리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세 예술가 중 작품에 조국을 보다 적극적으로 투영한 사람은 그리그였다. "사람은 자연의 느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누구보다도 조국의 자연을 사랑했던 그리그는 자신의 지론을 작품에 반영했다.그리그는 6세에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북유럽의 파가니니'로 불린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은 15세의 그리그를 보자마자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다. 불은 그리그를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멘델스존 풍의 보수적인 독일 낭만주의 경향이 지배했다. 북유럽에서 온 음악학도는 라이프치히의 음악 분위기에 곧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선 4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862년 고향인 베르겐으로 돌아갔다.고향에서 그리그는 독일 음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며, 노르웨이 스타일로 구성된 대작을 발표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기초 작업으로 민요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후 그리그의 열망은 입센을 만나면서 구체화 됐다. 입센은 그리그에게 자신의 극 '페르귄트'의 부수 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1874년부터 2년간 작곡된 극음악 '페르귄트, Op 23'은 유명한 '솔베이지의 노래'를 비롯해 24곡으로 구성됐다. 나중에 제 1·2 모음곡으로 편집되는데, 네 곡씩 담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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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1)러시아 피아니즘]대자연 품은 러시아, 감정표현도 다르다 지면기사
조성진 라이벌 트리포노프 눈길다이내믹한 소리에 서정성 담아다닐 트리포노프(29·러시아)는 요즘 가장 뜨거운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트리포노프는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손열음(34)이 2위, 조성진(26)이 3위에 입상한 이 대회는 우리 음악팬들의 기억에도 각별하게 남아있다.조성진이 우승한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트리포노프는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두 대회에서 1·3위를 나눠 가진 인연(?)으로 당시 조성진과 트리포노프는 종종 비교됐다. 두 피아니스트는 현재 최고의 기량과 지명도, 인기 면에서 비슷하다.2013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트리포노프의 독주회는 현재까지도 기자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리스트와 스크랴빈 등의 작품으로 구성된 연주회에서 트리포노프는 뛰어난 기교와 전곡을 장악하는 통찰력으로 작품들을 주조했다. 강하지만 섬세한 터치. 직관을 통해 단숨에 해치우는 듯하지만, 그 안에 동반된 스마트함(스토리텔링)까지 매력적인 요소들을 품고 있었다. 연주회 후 국내 음악계는 '예브게니 키신 이후 최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출현했다'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에밀 길렐스를 비롯해 키신까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은 빼어난 테크닉, 뛰어난 음악성으로 세계 음악팬들을 사로잡아 왔다.트리포노프의 감정표현은 대자연을 품은 러시아적 기질과 연장선에 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의 경우 피아노 학도들에게 먼저 큰 소리를 요구한다. 큰 소리를 내야 피아니시모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 피아니즘은 다이내믹을 기본으로 하되 그 위에 서정성을 담는다. 이는 러시아 대가들의 연주에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올해로 타계 25주기를 맞은 슈라 체르카스키는 생전에 '은둔자'로 불렸다. 실력과 비교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체르카스키는 연주회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 대가였다. 음반에서 접할 수 있는 그의 실황 연주들은 해당 작품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한다. 포르티시모에서 풍부하고 아름다운 톤을 유지하는 체르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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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0)왼손의 피아니스트]한손 잃은 연주 '음악의 본질' 일깨워 지면기사
손가락 마비 극복 플라이셔 타계회복이후 양손 내한무대 '인상적' '왼손의 피아니스트', '피아노의 오비완 케노비(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이상적인 스승)'로 불린 레온 플라이셔가 지난 3일 미국 볼티모어에서 타계했다. 향년 92세.우리에게 고인은 국내 정상급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들인 신수정·문용희·이대욱·강충모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2005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초청 독주회에서 회복한 오른손과 함께 유려한 양손 연주를 들려준 거장 피아니스트로 깊이 각인됐다.192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플라이셔는 4세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8세에 첫 독주회를 했다. 플라이셔의 공식 데뷔는 16세에 이뤄졌다. 피에르 몽퇴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해 주목받았다.1952년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미국인으론 처음 우승한 플라이셔는 이후 조지 셀과 브루노 발터 등 화려한 진용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거느린 미국 음반사 CBS와 계약을 맺고 여러 음반을 남겼다. 특히 셀과 함께 녹음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들은 현재까지도 명반의 대열에 올라있다.31세에 피바디 음대 교수가 되면서 교육자로서의 경력을 더한 플라이셔는 37세에 '반복성 스트레스 증후군' 진단을 받는다. 오른손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마비돼 연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과도한 연습 때문이었다.자살까지 생각했던 플라이셔는 '피아노 연주가 음악을 구현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선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교육자로서 제자들에겐 음악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하며 '음악의 본질'을 일깨웠다.1967년 지휘자로 첫발을 내디딘 플라이셔는 피아니스트로도 왼손을 위한 작품 1천여 개를 찾아서 연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쓰인 작품이 다수며, 동시대 음악가들이 플라이셔를 위해 왼손 연주곡들을 작곡해주었다. 1990년대 들어 의학이 발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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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9)초고령 연주자들]세살 시작 여든 넘어 '영원한 현역' 지면기사
'이다 헨델' 80대 중반까지 활동국내엔 95세 피아니스트 제갈삼지난해 이맘때 개최된 제15회 제천국제영화음악제에선 폴란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이다 헨델(1928~2020)의 80대 모습을 포착한 다큐멘터리 영화 '이다 헨델, 삶의 변주곡'이 상영됐다. 2009~2017년 사이에 촬영된 영상들로 완성된 이 영화에서 여든이 넘은 이다 헨델의 낙천적이고 사교적인 모습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3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7세에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천재 소녀'였던 이다 헨델은 80대 중반까지 활동하며 '영원한 현역'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도 흐르는 시간은 거스르지 못하고 이달 초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헨델의 죽음에 대해 세계 음악계는 "에리카 모리니, 지넷 느뵈, 요한나 마르치, 롤라 보베스코, 이다 헨델로 이어진 '전설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며 안타까워했다.헨델처럼 인생의 황혼기를 넘겨서도 지치지 않은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연주자로 국내에선 피아니스트 제갈삼(95)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1세대 피아니스트인 제갈삼은 부산대 음대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지난 11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연주회를 했다. 현장을 취재한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제자들과 함께 꾸민 연주회에서 제갈삼은 자작곡인 '감각적인 환상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의 1악장을 연주해 관객의 큰 박수를 받았다. 관객들은 박수로 이 원로 음악인의 100세 기념 공연을 염원했다고 덧붙였다.20세기 정상급 3중주단인 '보자르 트리오'를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97) 역시 무대를 누비고 있다. 그는 2008년 보자르 트리오가 해산하자 본격적인 솔로 연주자로 새 출발을 선언했다. 이후 다양한 무대에 오른 프레슬러는 2018년엔 드뷔시의 독주곡을 녹음하는 등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이 밖에 파블로 카살스(첼로)의 피아노 파트너로도 유명한 폴란드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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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8)크로스오버]시대적 요구 대중성에 응답한 클래식 지면기사
20세기말 입문자 위해 영역 확장국내외 메들리 형식 음반도 선봬1980년대 들어서 세계 음악계는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크로스오버는 독립된 장르가 서로 뒤섞이는 현상을 말한다. 처음엔 클래식과 팝, 국악과 양악의 결합 등 주로 음악용어로 쓰였다. 그러다가 뮤지컬·연극·무용 등을 혼합한 공연이나 TV·통신·컴퓨터 등 미디어의 통합추진 등 크로스오버는 그 영역을 확장했다.20세기 말에 왜 크로스오버 음악들이 등장하고 확장했을까?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우선,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려는 문화 생산자의 욕구와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심리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대중성'이라는 시대의 과제에 클래식이 응답한 것이다. 특유의 고답성과 전위성을 내려놓고서 말이다. 또한 20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팽창하는 음반 산업도 크로스오버 음악에 힘을 실어줬다. 영국의 음악 산업 주간지 '뮤직 위크'의 1990년 보도에선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198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가정마다 CD와 CD플레이어의 보급이 늘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의 대중성도 확장됐다." 당시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보다 훨씬 비싼 CD의 소비자 중 일부는 한번 듣고 싫증 날 우려가 있는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에 눈길을 돌렸고, 이들을 수용할 초보적인 클래식 혹은 클래식과 함께 경계선에 놓인 음반들이 다수 필요하게 됐다는 거였다.이후 세계적 대가들은 물론 수많은 젊은 연주자들, 재즈계의 명인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이들은 대체로 대중음악의 클래식화를 꾀했다. 반면에 클래식의 대중음악화를 통해 인기를 끈 경우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루이스 클라크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훅드 온 클래식스(Hooked on Classics)'였다. 클라크는 클래식 명곡을 짧게 토막 내서 이를 디스코 리듬에 메들리 형식으로 이어 붙였다. 1981년 1집 발매를 시작으로 1988년에 4집까지 발매되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선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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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7)신경쇠약 피아니스트]비대면 연주로 시대 앞서간 '글렌 굴드' 지면기사
관객 방해꾼 치부 '레코딩 전념'다양한 기행만큼 '정교함' 자랑코로나19 사태로 문화예술 이벤트들은 취소되거나 온라인 중계 등 언택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술의 현장성'을 강조하는 예술가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캐나다 출신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라면 작금의 예술 활동 형태를 반겼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바흐 스페셜리스트이자 천재 혹은 기인으로 불린 이 거장은 공개 연주회를 피하고 레코딩 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린 유일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객석의 관객을 싫어했다. 자신은 음악의 구도자이며, 관객은 소음이나 만드는 방해꾼으로 치부했다.굴드의 범상치 않은 행위들과 연주 스타일은 강한 집착과 편집증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의 평생을 신경쇠약 상태로 산 그의 연주는 정교함으로 충만했다. 음반을 통해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음표의 정확한 음가(音價)와 이에 어우러지는 장식음의 균질함에 놀라게 되며, 섬세하고 치밀한 타건(打鍵)은 과한 울림이 아닌 적절한 음량으로 맑은 음색을 냈다. 굴드는 23세였던 1955년 미국 음반사인 CBS(컬럼비아)에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그해 6월 녹음을 위해 뉴욕에 온 굴드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초여름 날씨에도 두꺼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엔 두 손을 20분 동안 더운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는데, 후에 굴드는 "연주 전에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려는 방편"이었다고 설명했다. 굴드는 녹음에 들어가서도 기행을 일삼았다.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도취한 상태로 입을 벌리고 노래를 이어갔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연주자의 신음에 가까운 노랫소리는 곳곳에 담겼다. 녹음 이듬해인 1956년 출시되자마자 이 음반은 곧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후 한 번도 절판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팔리고 있다.많지 않은 공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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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6)엔니오 모리꼬네]불멸의 선율로 기억될 'OST의 거장' 지면기사
'시네마천국' 등 500여편 탄생장르따라 다양한 스타일 시도1964년 제작된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휘파람소리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유령의 울음처럼 울려 퍼지는 음산한 휘파람 소리(팬플루트로 연주)와 어우러지는 황량한 음악. 이탈리아판 서부영화의 효시로 평가받는 '황야의 무법자'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를 세상에 알렸다.이어서 '천국의 나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언터쳐블', '시티 오브 조이', '시네마 천국', '사선에서', '폭로', '러브 어페어', '유턴', '캐논 인버스', '언노운 우먼', '헤이트풀8' 등 무려 500여편의 영화음악을 쓰며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칭송받은 엔니오 모리꼬네. 그가 지난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91세. 이 거장은 최근 낙상 사고로 대퇴부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거장의 타계 이후 전 세계 영화·음악계 관계자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1928년 로마에서 태어난 엔니오 모리꼬네는 이탈리아의 명문 음악학교인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서 트럼펫과 작곡, 합창지휘를 전공했다. 그는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의 성지인 독일 다름슈타트의 1959년 현대음악제에서 '우연성음악'의 대표 작곡가인 존 케이지를 만나 사사했다. 이듬해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극장에서 자신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지휘(초연)했다. 그러나 생활고로 라디오와 TV 방송 음악의 편곡을 맡았고,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61년 영화 '일 페데랄로'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영화음악가로 출발했으나, 클래식을 전공한 자존심 때문에 본명 대신 '레오 니콜스', '댄 사비오' 등 여러 가명을 썼다. '황야의 무법자'의 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모리꼬네의 작업 스타일은 영화 장르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클래시컬한 자국 영화에선 고전적 오케스트레이션을 썼으며, 미국식 블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