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약자' 국가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아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가 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신체적인 장애, 경제적 빈곤, 문화적 차이…. 우와 열이 생기는 인간사에서 약자가 생겨나는 건 어찌보면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일지 모르죠. 그럼에도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살펴보고 돌보는 건, 어쩔수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적 약점을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보완하면 건강한 삶을 다같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1편에서 가족 간병과 일상이 서로 공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질병과 지원책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정보 우위력', 언제든 환자를 돌볼 수 있는 '돌봄 인력', 가감 없이 의료비를 지출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 등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이는 '1형 당뇨'를 앓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가 비록 '시간 빈곤'에 처했음에도 최소한의 일상과 간병을 양립할 수 있었던 건 세 조건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만난 이정민(가명·20대 초반)씨는 가족 간병과 일상의 공존이 불가능한, 즉 '경제적인 여유', '돌봄 인력', '정보 우위력' 이 세 가지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족 간병인입니다. 우리는 이정민씨와 같은 가족간병인을 '간병 약자'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가족 간병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가 되고 사회적 고립상태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가족간병인은 환자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간병인 서비스 등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주변에 환자를 함께 돌볼 수 있는 돌봄 인력이 없다면 간병을 도맡은 간병약자는 온전히 환자에게만 자신의 시간을 쏟아내야 합니다. 간병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동안 사회경제적 활동은 점저 더 불가능해지고 환자의 상태·간병 등에 대한 정보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점점 더 빈곤해지고, 간병으로 인한 스트레스 역시 커집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점점 사회로부터 고립됩니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가족돌봄청소년·청년(
'시간 빈곤' 누구에게나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인데, 일할 때를 제외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자유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보통 돈이 있고 없고를 두고 빈곤하거나 풍요로움을 따지는데 시간에도 비슷한 개념을 적용한 것이죠.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준서의 어머니를 만나며 우리가 깨달은 점은 가족 간병이라는 굴레에서는 중산층도 '시간 빈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산층에게는 '경제적 여유'라는 막강한 조건이 있긴 하나, 시간에 있어선 이들 역시 불평등하게 흘러갑니다. 가족 간병을 하지 않는 보통사람들과 비교해서 말이죠. 준서의 어머니이자 간병자,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가 자신에게 주어진 간병의 조건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가족 간병과 일상의 공존을 부단히 지켜내고 있지만, 그의 삶은 어딘가 여유가 없고 숨이 차 보였습니다. 지난달 27일 경인일보 취재진은 고양시 일산동구의 김은희씨 자택에 방문했습니다. 언뜻 보기엔 언론 등을 통해 으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 간병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저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집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준서는 여느 초등학생들의 모습과 똑같았고,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러 잠시 나왔다가 다시 영어 공부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차츰 김은희씨의 삶이 고요 속 곧이어 몰아칠 태풍처럼 다가왔습니다. 김은희씨는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5분에 한 번씩 스마트폰 속 차트를 확인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멀티태스킹을 하듯 머릿속으로는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심상치 않다 싶으면 서슴없이 준서에게로 가 '무언가'를 먹으라고 말한 뒤 다시 인터뷰 중인 식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무언가는 혈당을 곧바로 높이는 데 탁월한 오렌지 주스였습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만히 지켜
'10년' 초등학교 5학년, 부모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간병을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가족의 간병은 20대 성인이 돼서야 끝이 날 수 있었습니다. 간병은 가족의 시간과 연동돼 모두의 삶을 뒤바꿨습니다. 부모님의 일상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할머니 곁에 항상 누군가 있어야 했고 잠깐 외출하더라도 집을 오래 비우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치매까지 앓자 간병은 더욱 고됐습니다.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식사를 챙기고, 때마다 병원을 모셔야 하는 모든 일이 어린 눈에도 버거웠습니다. 할머니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시작한 간병이지만 지난한 돌봄에 부모님은 지쳐갔습니다. 일과 간병에 자녀 양육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쉴새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였지만 해소할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족의 몸과 마음이 모두 소진되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습니다. 그렇게 10년을 간병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할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집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간병=가족', 우리 사회에 통용하는 이 당연한 명제에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이 파괴될 만큼의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는 게 당연한가, 간병과 일상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가. 마음 속 오래 품었던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답을 찾는 여정에서 우리는 여러 연령, 다양한 상황에 놓인 가족간병인을 만났고 심층 인터뷰를 통해 '시간빈곤' '간병약자' '언젠가·누구나' '선택할 자유' 라는 공통의 주제를 찾았습니다. 모든 인터뷰를 1인칭 시점에 담은 건 언젠가 가족은 아플 것이고, 당신도 가족간병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일'이라는 공감 아래, 기자들의 기억법 '밀려난 삶의 반: 가족간병과 나'를 시작합니다. #'반추'. 다음은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빈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비참한 사회적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동네 곳곳에서 이뤄진 유가족과 주민들의 만남
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당한 아이들의 유해만 들어온다는 것’,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라는 것’.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들이 대부분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조은정 학생의 엄마 박정화씨는 “생명안전공원을 무조건 반대했던 주민들이 막상 세월호 선체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행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 - 목포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
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센터는 이름을 하나 더 갖고 있다. 힐링센터 0416쉼과힘.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안산주민·유가족 목포기행 동행
"공원 반대하지 말걸" 오해 확인인천선 생존자 참여 작품 전시회"도움 보답해야" 봉사활동 지속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학생의 유해만 들어온다"거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에 들어선다"는 설명이다.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 대부분이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은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라고 뒤늦은 마음을 표했다.
일반인 희생자가 중심인 인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올해 2월 1일부터 15일까지 부평아트센터 갤러리꽃누리에서는 '그날의 사람들, 오늘의 이야기' 전시회가 열렸다.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하·추모관)이 주최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념전시회였다.세월호 생존자인 김병규씨를 포함한 제주시 생존자 7명,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희생자 가족 14명이 만든 작품 63점이 전시됐다.추모관은 개관 이후 지역사회와 호흡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안전포
고잔문화복지센터 '목포기행' 기획
명성교회·연세대·선부복지관 협력유가족-주민 안정 프로그램 다양예산문제 어려움에도 필요성 제기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유가족과 지역주민 사이에 생겨난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다.이렇게 유가족과 지역주민들 간 접점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안산 곳곳서 일어났다. 상록구 반월동에 거주하는 이연우씨는 참사 1년 후 지역아동센터서 열린 유가족 간담회에서 마르고 기력 없는 모습의 유가족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반월동에 사는 '엄마'들과 함께 매달 한번씩 분향소에 밥을 지어 보냈다. 또 마을 축제, 자치회 행사마다 유가족을 위한 부스를 마련했다. 마을에서 공방 수업을 열면 416공방에 부탁해 유가족들을 강사로 초청했다.고잔동에는 마을걷기 프로그램 '같이걷자'가 운영 중이다. 시민들은 마을해설사와 함께 고잔복지센터·원고잔공원·단원고등학교·화랑유원지 등 고잔동 곳곳을 돌며 세월호참사로 인해 달라진 마을에 대해 듣는다. 눈에 띄는 건 마을 해설사다. 참사 직후 단원고에서 6개월 동안 급식봉사를 한 향미씨와 참사로 아이를 잃고 또 아이가 생존한 지인을 모두 아는 용정씨 등 고잔동 주민 6명이 마을해설사로 나섰다.■ 공동체 회복 시급한데 줄어드는 예산유가족과 주민들이 스스로 관계개선에 노력한 건 피해자 보상, 기억교실 이전 등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이 격화되며 공동체 회복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안산시민의 심리안정과 공동체 회복을 국가의 책임으로 의무화한 '세월호피해자지원법'을 제정했고 안산시도 2017년부터 '공동체회복 프로그램(희망마을사업)'을 본격 시행했다.이런 노력 덕에 안산 내 마을공동체 사업은
국회의사당·베를린필·티어가르텐 공원 등일상속 받아들여져… 한국 '님비'와 달라"역사적 사건 대하는 방식 변화 고민해야"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주변에는 또 다른 추모 공간들도 곳곳에 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길을 건너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학살된 집시를 위한 추모 공간'(사진)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베를린 필하모닉 건물 옆에는 '안락사 학살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시민들이 조깅을 즐기는 티어가르텐 공원 안에는 '박해받은 동성애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곳곳에 있는 추모 공간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만큼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베를린 시민 일상의 공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지나가다가도 들러 이들의 역사를 마주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다.독일의 추모문화는 한국과 달리 일상과 붙어 있다. 마치 '님비현상'처럼 추모 공간을 기피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독일은 2차대전 전범국가였지만,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기억 문화'가 가장 발달한 국가가 됐다.다만, 지금은 관광지로서도 추모 공간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되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건립까지 시행착오가 있었다.우베 노이마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재단 이사는 기념관 건립 15주년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수치의 기념비'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결국 매년 거의 50만명 이상이 찾는 인기 있는 관광명소가 됐다"며 "이는 우리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이들과 미래 세대가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과 맞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안할 것이다. 출판물 또는 이벤트를 통해 젊은 세대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말했듯, 추모 공간의 형태가 국한될 필요는 없다. 세대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모 공간의 의미가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다.세월호 참사 희생자 지상준군의 엄마 강지은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추
역사는 반복된다는 서늘한 진실… '끝없는 증언'으로 새겼다
독일 정부 제안, 메모리얼 지하에 정보관바닥엔 희생자 일기·편지 등 이야기 가득4가지 공간 따라가며 공감 "가슴 미어져"애도 방명록에 한글로 "기억하겠습니다"2천710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지하의 정보관은 희생자의 이야기로 메워져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관람객에게 닿아 분노와 슬픔으로 표출되고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다짐이 된다."두세살 남짓 되는 어린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야외 캠프용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울고 또 울고 비명을 지른다. '엄마, 엄마, 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군인들은 끊임없이 총을 쏘고 그 총소리는 잠시나마 아이들을 침묵시킨다.""나는 그 옆에 쓰러졌고 그의 시체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목에 총을 맞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너도 그렇게 끝날 것이야'. 이제 죽음 속에서도 인내가 피어난다. 진흙과 섞인 피가 흘러 내 귀에서 마르고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정보관을 찾은 관람객은 바닥에 있는 희생자의 일기와 편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쪼그려 앉곤 했다. 곳곳에선 나지막이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지상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는 사뭇 다른 무거운 분위기다.정보관은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소상히 서술하는 공간으로 시작해 희생자와 그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 학살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관을 지나면, '차원의 방', '가족의 방', '이름의 방' ,'장소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네 개의 방이 차례로 등장한다.관람객은 '차원의 방'의 손글씨 편지와 일기를 통해 희생자의 공포에 공감한다. '가족의 방'에서 소개되는 유대인 15가구의 해산·추방의 기록을 따라가며 안타까움은 극대화된다. '이름의 방'에서는 학대받은 유대인들의 이름·출생연도·사망연도가 동시에 네 개의 벽에 투사되며 그들의 짧은 일생을 내레이
설립 과정 민간 주도… 정치권까지 합심10여년 시간 '정치적 논쟁' 좌초 위기도독일에 대한 이해 일부로서 의미 갖게돼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설립 과정에서 시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정치권에서도 뜻을 모았다는 특징을 가진다.1988년 처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제안한 것은 저널리스트 레아 로쉬였다. 그는 역사가 에버하르트 야켈과 함께 시민단체 '퍼스펙티브 베를린(Perspektive Berlin)'의 요청을 받아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다.당초 이들은 베를린 남부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이후 헬무트 콜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의 지하벙커가 있던 인근 부지 제공에 동의하면서 지금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 한가운데에 자리잡게 된다.퍼스펙티브 베를린은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서명을 모았고, 1999년 독일 연방의회는 기념비와 이를 관리할 재단을 설립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이후 건축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피터 아이젠만이 선정되는 등의 논의를 거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2005년 5월 10일에 문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69주년에 맞춰 개관했으며, 기념비 설립이 제안된 지 17년 만이었다.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할 점은 시민사회가 주도한 서명 운동과 시민 발의 결의안이다. 시민사회가 지식인들과 뜻을 모아 의견을 전달한 과정이 있었기에 독일 시민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물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또한 설립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헬무트 콜 총리는 1994년 개최된 첫 공모전의 당선작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념비 건립 사업까지 좌초될 위기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당시 상황을 두고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순탄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시민사회가 합심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완성됐고, 베를린의 일상에까지 스며들었다.베를린 투로대학(Touro College Berlin)의 유대인 연구 전공 스테판 렌슈테트 교수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건립 과정을 볼 때, 거의 모든 경우에 추모와 추모를
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600만명 유대인 학살 비석 미로처럼 배치도심 위치 조성 일상 속 스며든 휴식공간'희생자 엄숙해야…' 통념 깨고 자유로움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회색빛 콘크리트 비석 2천710개가 줄을 지어 박혀있다. 파릇파릇한 초록잎과 선선한 봄바람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4월의 날씨와 대비되는 회색빛 풍경이다. 지난 14일 찾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주말을 맞아 관광객과 베를린 시민들로 붐볐다. 이들은 회색 비석을 가로질러 들어가며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사색에 잠기며 혼자 걷기도 했다. 미로같은 비석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해 놀라는 이도 꽤 많았다. 꺄르르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얼핏 들린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비석 높이는 제각각이다. 0.2~4.7m까지 다양하다. 초입에는 성인 기준 종아리 정도밖에 오지 않는 낮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비석은 점점 크고 높아져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정도가 된다. 지형 또한 특이하다. 마치 파도가 치는 듯 땅이 울퉁불퉁하다. 굴곡진 땅 위에서 웅장한 회색 비석에 둘러싸여 있자니, 답답하고 억눌리는 느낌까지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깊숙이 들어갈수록 마치 지하로 가라앉는 듯하다. 하지만 추모공간이라고 해서 엄숙하기만 한 분위기를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추모 공간의 통념을 깨고 베를린의 일상에 완벽히 스며들었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은 자유롭게 추모한다. 가장자리의 낮은 비석 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도, 가족들과 빵과 음료를 나눠 먹기도,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비석 위에 올라가 뛰어다니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다.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베를린의 일상에 섞일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이기도 하다. 베를린 대표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 문과 불과 1.2㎞, 국회의사당과도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