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편에서 만난 수원 무등탕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몇날 몇시 어디서 만나자, 굳이 세세하게 약속을 잡지 않아도 밥 같이 먹을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속상하거나 마음 복잡한 일이 있어도 한바탕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나면 마음이 풀리는 마법같은 곳. 꼭 약속하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나를 반겨주는, 우리가 만난 수원 무등탕은 동네의 안식처이자 사랑방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수원 무등탕과 같은 사랑방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는 각종 온라인 사랑방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검색창에도 나오지 않는 무등탕을 처음 간 날,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데 저 멀리 ‘목욕합니다’라는 입간판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이런 목욕탕이 있구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처음엔 분명 새하얐을 만한 나무입간판은 이제 껍질과 함께 군데군데 벗겨졌고 ‘목욕’이라는 빨간 글씨 역시 바래져 있습니다. 입간판에서부터 “여기 오래된 곳이오” 말하는 듯했습니다. 입간판이 세워진 골목길로 들어서니 ‘여성전용 무등탕’이라 적힌 유리문이 나옵니다. 유리문을 지나 한 계단 반을 오르면, 매표소가 보입니다.
10년 전 여름, 기차 여행을 하던 대학생들의 인터뷰가 최근 SNS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10년 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10년 전 이들의 약속에 많은 사람이 낭만적 재회를 기대한 것이죠. 이들의 오래된 약속처럼 우리도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또는 눈물이 나는 옛 추억 하나쯤 마음에 안고 삽니다. 레트로K 시즌3는 당신 마음에 새겨진 그리움을 찾아 떠납니다. 무언가 특별하거나 놀라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주말마다 엄마와 손잡고 갔던 동네 목욕탕, 목욕탕 평상에 앉
36년의 참혹했던 일제 치하, 광복을 가슴에 안고 희망과 혼란이 공존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벌어진 잔혹한 내전, 깊은 상흔만 남은 채 폐허가 된 한반도. 20세기가 시작된 후로 장장 반세기를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과 그럼에도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희망이 교차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죠. 감히 가늠해보건대 1950년대는 결국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랬던 시대에 평택국제중앙시장은 유일하게 눈과 귀와 코를 사로잡는 공간이었습니다. 1958년에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한 평택국제중앙시장은 1952년 오산공군기지가 송탄에 건설되면서 미군 주둔지가 형성됐고, 이들 미군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 들어서며 시작됐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헐벗던 시절이었죠. 유일한 소비자였던 미군을 잡기 위해 미군부대 앞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고 송탄역 철로길을 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자연히 소비 공간도 커졌습니다. 그렇게 시장이 형성되자, 점차 보통의 우리도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생필품을 구하기위해 오는 큰 상권이면서도, 사실 이때부터 평택국제중앙시장을 찾는 일은 놀거리 볼거리 하나 없던 흑백시절에 '컬러TV'를 구경하는 일과 같았다고 볼 수 있죠. 여기 오면 다 구할 수 있어요 오랫동안 국제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해온 정창무 평택국제중앙시장 상인회장의 기억도 그랬습니다. “미군기지가 생기면서 신장쇼핑몰이라고 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 하나 둘 늘어난 거리가 생겼어요. 그땐 우리가 워낙 못 살때잖아요. 그런 경제규모로 비교해보면, 주한미군 씀씀이가 (우리한텐) 엄청나니까 정말 좋은 상권이었죠. 오죽하면 그때 이 시장을 부르는 별명이 '달러박스'였어요. 그렇게 물건들이 넘치고,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내국인을 상대로 한 중앙시장이 같이 생겨났구요. 그땐 아무것도 없을 때잖아요. 근데 여기에 오면 다 구할 수 있으니, 그때 규모가 엄청 컸어요.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다양성'의 상징… 원조 식당들 즐비 수제 햄버거·피자 1세대들 모였던 곳 미군 양장점
안산 사동 234번지와 242번지 사이 100여척 배 오가던 안산 마지막 포구 이방인에게 보금자리 되어준 곳 저는 '안산토박이'입니다. 안산에서 태어나 안산에 있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서른해 동안 안산 곳곳을 누비며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안산의 아들'이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그 덕에 레트로K 안산편 취재에 참여했습니다. 안산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저도 불과 30년 전까지 안산에 어업을 하던 포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어촌보다는 '공업도시', '계획도시', '이주민의 도시', '세월호의 도시'가 제게 더 친숙하기 때문이죠. 반월국가산업단지가 위치한 공업도시 안산은 대표 관광지인 대부도가 있어 서해와 밀접한 바닷가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도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엔 대부도로 소풍을 많이 갔습니다. 방아머리 해수욕장에서 밀물 땐 물장구를, 썰물 땐 갯벌 체험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돼서는 광활한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구봉도 낙조 전망대도 여러 번 갔죠. 이들 대체로 안산 중심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은 가야 하는 지역입니다. 그렇게 보니, 안산의 본질은 '어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성곶포·조구나루·원당포·별망포구·사리포구 등 조선 후기 때부터 번성했던 포구와 나루가 한둘이 아니죠. 외곽지역에서만 어업을 했던 건 아닙니다. 시 중심부에서 차로 10분, 걸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사동 호수공원도 한때는 주말에 많으면 수천 명이 찾는 포구였습니다. 포구의 이름은 사리포구. 30년 전까지 이 공원에 100여척이 넘는 배들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안산 사동 234번지와 24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사리포구는 1950년 형성돼 1999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87년 시화방조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배들이 경기만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제대로 된 어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50년 가까이 안산 시민과 경기도민의 일터이자 관광지였던 사리포구는 안산의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은 '경부선'. 세로로 길쭉한 우리 국토의 중추선을 따라 서울 용산에서 부산까지 연결된 길입니다. 경부선은 산넘고 물건너 걷거나 말타고 서울서 부산까지 가던 구시대의 종식을 의미했죠. 경부선을 따라 수많은 '교통 요충지'들이 탄생했고 요충지마다 행정이 커지고 상업이 융성해졌으며, 산업도 발달했습니다. 안양이 '별의 순간'을 맞는 시점도 바로 이때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길, 그 첫번째 길목이 바로 '안양역'이기 때문입니다. 1905년 안양역은 경부선이 만들어지는 그 시기에 함께 건설됐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생전 본 적도 없는 기차라는 것을 타고 사람들이 내리고, 또 기차를 타기 위해 사람이 모였습니다. 사람이 모인다는 건 곧 도시의 발전과 직결됩니다. 근방에 있던 시장, 음식점, 여관 등 상업시설들이 안양역 인근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세를 몰아 경기 중부지역의 경제중심지라 불렸던 '군포장'이 안양역 인근으로 옮겨왔고 그게 '안양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행정도 마찬가지입니다. 1973년 안양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시흥군 안양읍에 속했는데 시흥군청이 서울 영등포에서 1949년 안양역 인근으로 이전하면서 안양은 명실상부 경기중부 행정의 중심지 역할까지 도맡게 됩니다. 군청에 교육청, 읍사무소, 경찰서 등 공공기관들이 역사 맞은편에 줄줄이 자리를 잡았고 주변으로 식당과 유흥주점, 상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한번쯤은 들어본 '안양1번가'의 시작입니다. 안양1번가는 지금도 건물 곳곳에 걸린 간판들에서 '잘 나갔던' 그 시절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1번가 콜라텍' '1번가 노래방' 등이 상점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안양을 비롯해 군포, 과천 등 경기 중부지역 주민들에게 안양1번가는 젊음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불립니다. 그래서 안양1번가에는 청춘들의 재밌는 추억이 많습니다. 1970년대 안양역에 지하철이 개통되며 안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