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초연에 이어 지난 9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재연을 시작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장강명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품은 학창시설 동급생을 살해하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온 남자와 동급생이던 여자, 그리고 피해자의 어머니 세 인물의 기억을 다룬다. 이 소설은 시간과 사건을 뒤죽박죽으로 재생한다. 작품은 대사와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있다. 작품 속의 모든 대사는 어느 인물이 말하는 대사인지 알기 어렵게 모호하게 쓰여졌다. 어느 시점인지도 알 수 없다. '잘게 자른 책의 페이지처럼' 뒤섞인 사건과 기억 속에서 죄와 속죄가 반복되는 것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남자는 '우주알'이라는 외계생명체가 몸속에 들어와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 정신병원에 감금됐던 환자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는 기억과 회상을 통해 남자의 정체가 다소 모호하게 표현됐다. 남자의 정체는 죄와 속죄의 관점에서 중요한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출은 남자의 모호성도 깊이 있게 표현했다. 예를들어 '케이팍스'라는 작품은 주인공의 정체가 외계인과 정신병원 환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동명의 원작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맺었지만, 영화는 한쪽에 힘을 싣는 결말을 택했다.

강량원 연출가의 '그믐…'은 비어있는 대사와 상황설명의 공백을 신체적 연기로 채운다. 무용을 보는 듯한 짜임새있는 몸짓이 120분의 시간동안 펼쳐진다. 무대는 두개의 기울어진 달에서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기억과 사건의 재생은 혼재돼 있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동급생을 살해하는 광경은 대여섯 가지 다른 버전의 기억으로 반복해서 재생된다. 기억을 다루는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연극에서도 '진실한 기억'이 무엇인지 찾는 것만큼 '기억의 의미'도 중요하다. 따라서 관객의 이해를 배려하기 위한 장치도 곳곳에 보인다. 예를 들면 사건선 A와 사건선 B가 분리되는 시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주인공 역으로 2인1역이 수행되는 연출도 쓰였다.
연극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돋보이는 점은 자전이다. 배우들은 둥근 달 모양의 무대를 빙글빙글 돌면서 연기를 하고 있다. 이 연극은 진실과 거짓, 기억과 실재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혼재돼 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로 바뀌지 않는 대목은 작중 두 인물의 죽음이다. 무대를 둥글게 회전하듯이 '바뀌지 않는 사실들을 바꿀 수 있는 기억으로 반복재생하는 것', 연극에서 말하는 죄와 속죄의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외계생명체 우주알의 정체는 무엇이고, 두 가지 사건선의 차이는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연출 속의 사실들은 관객에게 배우들의 몸짓과 감정을 통해서 각자의 진실을 찾아가도록 이끈다.
강량원 연출가는 "이 연극은 소설을 읽었다면 책과 연극을 비교하는 재미를, 읽지 않았다면 공연을 통해 원작을 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작품"이라며 "이 작품이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누구나에게 의미있는 공연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지난해 9월 초연된 이 작품은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등을 받으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오는 27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볼 수 있다.
/강보한기자 kb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