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 합창을 처음 들어오게 한 선구자는 일제 강점기 때 다양한 문예활동을 통하여 한국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홍난파선생이다. 선생은 1898년 경기도 화성시 활초리(남양동)에서 태어나 근대 이후 최초로 전문음악기관(조선정악연습소)에서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였다. 이후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음악공부를 계속해 근대 한국음악의 모습을 정립시키는데 큰 몫을 한 분이다.
1933년 10월 10일 조선음악가협회 주최로 현제명, 홍난파의 작곡 발표회가 이화학당에서 개최되었을 때 경성보육학교 합창대가 홍난파 작곡의 '봄노래' 등 3곡을 부른 것이 시초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1965년 뜻있는 음악인들이 모여 '사단법인 난파합창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아래 창립된 난파합창단의 연륜은 벌써 반세기를 넘어 섰다. 1983년에는 수원시립교향악단을 태동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동안 난파합창단은 순수한 아마추어 음악인들로 구성되어 자립으로 합창단을 운영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범적인 비영리 법인단체다. 이웃을 찾아 시민과 함께한다는 슬로건 아래 매년 10여회의 공연을 하면서 수원시민의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한 '시민과 함께하는 세계명곡 페스티벌' 공연은 난파단원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하는 추억에 남을 만한 무대였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연말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공연한 52주년 정기연주회에서도 다양한 레퍼토리로 많은 청중들의 감성을 휘어잡는 공연을 함으로써 큰 호응을 받으며 성황리에 마쳤다. 이처럼 지금까지 이루어진 업적을 토대로 올해는 더 비약해 보자는 단원들의 결심으로 난파합창단의 이념을 따르는 참신하고 소질 있는 단원들을 입단시켜 보다 새로운 모습의 합창단으로 태어났다. 금년은 더 활기차게 시민 속을 찾아가는 음악회로 수원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여보자고 뜻을 모았다.
우리나라도 어느덧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국민 각자가 주어진 일터에서 열심히 일한 만큼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또 일한 만큼 휴식도 가져야 이 시대에 걸맞은 삶의 행복지수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새 정부 들어 국민들에게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펴나가겠다고, 대통령 신년사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난파합창단은 이러한 시대조류에 맞춰 시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작은 힘이지만 기여하고자 한다. 이런 활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갈 때 난파 선생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광옥 난파합창단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