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과 북미정상이 합의한
공동목표가 잘 이행돼
'새로운 미래 열기위한 관계'로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필자의 아버지가 처음 군에 몸담은 때는 1948년 4월. 지금은 북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우리 땅이었던 개성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11연대였다고 한다. 11연대는 1950년 4월 서울 수색으로 부대를 옮겼는데 부대를 옮긴 지 두 달 만에 6·25가 일어났다.
아버지는 즉각 수색에서 문산으로 이동해 임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진격했으나 북한군의 기세에 밀려 남하했다가 1951년 북진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던 1951년 12월 연천 고랑포지구에서 북한군과 맞서 싸웠지만 많은 부대원이 섬멸되고,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졌다고 했다. 그 후 다시 국군에 재입대한 아버지는 1956년 12월까지 8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돌이켜보면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총 1129일의 전쟁 동안 남한은 민간인과 군인을 합해 약 160만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 역시 같은 기간 35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가 약 3천만 명이라고 하니 인구의 약 6분의 1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셈이다. 인명피해가 이 정도이니 재산피해는 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대한민국 제조업 42%가 파괴됐다.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개인 가옥도 대부분 파괴돼 국민의 생활터전이 사라졌다.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더 심해 전력의 74%, 연료공업의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6·25 전쟁은 남북에 인명과 재산피해뿐 아니라 증오와 대립이라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전쟁이 정전에 들어간 지 이제 65주년을 맞고 있지만 우리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숱한 다툼을 벌였고, 전쟁 준비로 많은 피땀을 흘려야 했다. 전쟁은 남과 북의 갈등뿐 아니라 남한 사회 내에서도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다시 6·25를 맞게 됐다. 그러나 올해의 6·25는 기존과 다른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지난 4월 27일 남북한 양 정상의 '판문점 선언'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양 정상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로 했으며,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출발한 평화논의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정점을 찍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지난 70년간의 적대감과 긴장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관계'를 맺었다. 완전한 비핵화와 체제보장 등에도 포괄적 합의를 이뤘다.
이제 새로운 길이 열렸다. 남북한과 북미 정상이 합의한 공동의 목표가 잘 이행돼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한반도 신경제 지도 구상이 실행되고, 대한민국 경제의 신성장 동력을 높여나가며, 북한 인권을 개선하고, 이산가족과 북한에 생존한 국군 포로와 납북자 문제가 해결됐으면 한다. 아울러 남북 간의 사회, 문화, 체육 교류가 활성화되어 전쟁의 위험과 갈등이 사라진 완전한 평화의 한반도가 됐으면 한다.
남북통일은 내 손으로 이루겠다는 신념을 평생 간직하셨던 아버지는 3년 전 돌아가셨다. 지금의 한반도를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뭐라 하셨을까. 올해는 아버지께서 피땀으로 지키신 대한민국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