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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철 인천미추홀소방서 예방안전과·소방장
치클론B는 사람을 죽이는 생화학무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전쟁 포로를 학살하기 위해 사용했다. 전쟁 포로를 아우슈비츠에 몰아넣고 굴뚝으로 치클론B를 던지면서 대략 20분 안에 가스실에 있던 전원이 사망했다. 그만큼 치클론B의 위력은 대단했다.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동안 가스실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됐다. 비명 소리와 함께 가스실 벽면 곳곳에는 살고자 몸부림쳤던 유대인들의 손톱자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여전히 소방대원들은 치클론B 속에서 살고 있다. 치클론B의 주성분은 시안화수소인데, 흔히 청산가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안화수소는 섬유에서부터 자동차부품에 이르기까지 질소가 함유된 물질이 탈 때 생성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화재 진압이 주 업무인 소방대원은 늘 시안화수소, 포스겐과 같은 유독물질에 노출돼 있다. 유독물질로 인한 암이나 희귀 발병률이 높은 소방대원에게 공상추정법이 필요한 이유다.

공상추정법이란 유독물질에 노출이 심한 소방대원이 질병에 걸리면 질병이 공무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해 공상을 인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공상추정법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국가가 공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질병과 공무와의 인과관계를 소방대원 본인이 입증해야 한다. 이럴 경우 고 김범석 소방대원처럼 치료와 치료비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까지 3중고를 겪어야 한다.

현재 계류 중인 공상추정법 통과가 시급하다. 공상추정법은 그 필요성이 인정돼 2020년 11월9일 소방의 날을 맞아 발의됐다. 하지만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계류 중이다. 최근 10년간 공상을 인정받지 못해 국가와 행정소송을 벌이거나 소송조차 포기한 소방대원이 700여 명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각에도 치클론B가 가득한 현장에서 수많은 소방대원이 화재진압에 힘을 쏟고 있다. 새해에는 법제화해 공상추정법이 소방대원의 안전망이 되길 기대한다.

/권기철 인천미추홀소방서 예방안전과·소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