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학자인 김미경은 “예수나 예수의 제자들조차 고민해 보지 않은 예수 존대법 문제가 우리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은 “존대법이라는 문법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의 높낮이를 계산하고 그 높이에 따라 존대를 달리하도록 훈련받는다”며 “그러는 사이에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어 차별하는 서열의식이 무의식중에 뿌리 깊게 박힌다”고 설명한다.
말이 개인 삶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새로운 언어, 새로운 관계 이어줄지
그 말로 대화 사회는 어떤 변화 올지
사실 이 글을 읽기 전에 다른 책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접하고 생각이 많아졌던 터였다. 지난해 나온 ‘예의 있는 반말’에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평어’라는 언어체계를 디자인해 사용하고 있는 디자인 커뮤니티 디학(디자인학교)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에 따르면 평어는 사람 간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으며, ‘~께, ~께서’, ‘~시~’, ‘~요~’가 없다. 나이로 따져 부르는 호칭인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호칭은 물론 직장에서의 선배, 후배라는 호칭도 쓰지 않으며, 이름 뒤에 ‘~님, ~씨, ~야, ~아’라고 붙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평어는 ‘이름 호칭과 변형된 반말의 결합’인데 예를 들면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하려고 한다면 우선 “지은”이라고 부르고 나서 말을 하는 것이다. “지은아” 같은 반말 호칭은 사용하지 않으며, “금방 지은이가 한 말은”이라고 하는 대신 “금방 지은이 한 말은”이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이름 두 글자만 부르는 호칭은 우리 일상에서는 보통 사용하지 않기에, 평어 사용 초기에는 상대방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또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경험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상대방을 절대 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평어가 반말과 구분되는 중요한 규칙이기도 하다. 실제 ‘평어 실험’의 참여자는 어느 순간 ‘극존칭으로 말하는 순간에도 생각은 반말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한 언어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쓰는 모국어의 내적 형식에 따라 그들의 체험을 소화하고, 그에 상응하여 사유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언어철학자 레오 바이스게르버의 지적과 상통한다.
‘모험의 언어’ 언제까지 실험될건지
‘관계 장벽’ 깬 대화 가능할지 궁금
하나 고백할 것이 있다. 스스로 각종 호칭에서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나보다 훨씬 나이 어린 후배가 “지은 씨, 이거 어때요?” 라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건방지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머리로는 납득했지만 나 역시 ‘말끝마다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고, 똑같은 사람의 높낮이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 높낮이를 구분하는 기준도 복잡’한 한국어에 최적화되어있는 사용자였던 것이다.
상사와 부하가 직급과 상관없이 ‘~님’ 호칭을 쓰다가 실패한 어느 기업의 실험처럼, 생각하는 방식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칭만 바꿔 부르는 건 실패의 가능성이 높다. 하루아침에 평생 써 온 언어와 사고 체계를 한꺼번에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존댓말처럼 서로 예의를 갖추면서 반말 관계의 친밀감도 가져갈 수 있는 ‘평어 실험’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하나 분명한 것은 평어를 탄생시킨 ‘말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런 말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 새로운 말로 대화를 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란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모험의 언어’라고도 불리는 평어 실험이 언제까지 ‘실험’으로 남아있을지, 아니면 “편해지면 말 놓을게요”라는 관계의 장벽을 넘어 새로운 방식의 말하기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