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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오미크론 확진자 수가 정점을 향해가고 있지만 이번 봄은 해빙의 분위기가 짙다. 마스크를 주문할 때도 '봄인데 흰 색 말고 다른 색을 써 볼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도 느긋해졌다.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지금, 지나온 터널 가운데 인상적인 공간 하나를 뽑는다면 나에게는 '줌 화상회의' 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공간으로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면 수업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을 때 과연 강의가 잘 이루어질까, 수업하는 척만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막상 시작해보니 학생들의 적응은 빨랐고 대면강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 화상으로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는데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강의실에 다 같이 모여 대화하는 동안 그 장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공기, 그 공기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창작 강의는 가상의 모닥불을 피우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 장작을 넣어 불길을 키우고 또 다른 누군가의 견해로 불길이 타오르는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토론을 통해 작품의 중심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유의 공기가 있다. 언어를 주고받는 동안에 오가는 비언어적인 언어, 표정이나 웃음 혹은 긴장된 순간 부풀어 오르는 압력 같은 것, 이 공통의 공기를 같이 호흡할 수 없는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호흡을 나눠 마시는 것 자체가 감염상황으로 변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강의를 비대면으로 '번역'하는 가운데 가장 큰 손실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칸칸이 나뉜 학생들 화면 뒤편에는
고양이·강아지 등 반려동물들 등장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는 도서관에 웅크리고 앉아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양식으로 삼는 상상동물이 나온다. 아무도 책을 읽지 않으면 이 동물은 굶주릴 수밖에 없다. 이와 비슷하게 강의실에도 학생들의 활기를 먹고 사는 지박령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을까. 강의실의 에테르라 할 수 있는 이 유령은 어떻게 해도 줌으로 번역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더해지자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비대면 강의에서는 공평하게 창을 나누어 갖는다. 칸칸이 들어앉은 학생의 얼굴 뒤편으로 그들의 자취방, 자주 가는 카페, 반려동물이 드러났다. 한 학생에게 말을 시켰더니 고양이가 에웅에웅 의견을 말한다거나 강아지 꼬리가 화면 전체를 가리고 지나가기도 한다. 엄마의 수업에 불쑥 얼굴을 내미는 아이들이 등장할 때도 있다. 이처럼 각자 자기 공간에 있기 때문인지 강의시간이 편안하면서 내밀한,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글쓰기 강의는 본질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학을 나누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요소는 강의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이것까지도 가능해?'라는 마음으로 밀어붙인 종강파티에서는 각자 마실 것을 들고 화면 앞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대면 강의의 유사품이라기보다 우리가 만들어낸 또 다른 공간이었다.

소설은 '그렇다치고' 읽어주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상상 게임이다. 이야기는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인 줄 알면서도 동시에 사실처럼 받아들일 때 생생해진다. 대면 강의 역시 '원형으로 앉아' '공동의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는 상상을 할 때 싱싱해졌듯 비대면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화면 창 너머로 우리가 피운 모닥불을 응시하는 순간 대면-비대면을 떠나 우리만의 강의실에 가 있다. 그러다보면 강의실의 유령도 슬쩍, 온기를 쬐러 건너오는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몰두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생기 그 자체니까 말이다.

줌 프로그램 빠져 나오는 순간만은
혼자여서인지 적응 안돼 어리둥절
그 친구들 간수 어떻게 할지 아리송


그럼에도 줌 프로그램을 빠져나오는 순간만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들어갈 때는 덜한데 나올 때는 혼자여서 그런가, 항상 어리둥절하다. 강의실의 상상 동물 또한 문턱에 걸려 있는데 문턱이 어디인지, 그 친구를 어떻게 간수해야 할지 알쏭달쏭하다.

이 순간은 세태소설의 한 페이지처럼 코로나 시즌 한정 디테일인지도 모른다. 마스크에 색을 입히듯 이 순간도 일상처럼 덤덤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소한 감각에 기억의 핀을 꽂아 간직해두고 싶다. 전에 없던 세계에서만 가능한, 특수한 감각이니 말이다.

/김성중 소설가